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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처럼 복음 변증과 전도를 재판 변론 목적으로 삼자[특별기고] 개혁사상 부흥운동 인사이트 (insight) 개혁주의 신약신학 ② 법정 변론 개혁

공회 구성원을 고려, 선한 양심과 부활의 소망 강조하며 청중의 영적 성장 이끄는 메시지도 전해

교회 내 재판이 많아지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법정 변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사도행전에 소개된 바울의 재판 변론을 살펴보자. 바울의 재판 변론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한 것(행 23:1, 3, 5, 6), 더둘로의 기소에 맞서 벨릭스 지방수세관 앞에서 한 것(행 24:10~21), 유대인들의 비난에 맞서 베스도 지방수세관 앞에서 한 것(행 25:8, 10~11), 베스도의 설명에 이어 아그립바2세 앞에서 한 것(26:2~23) 등 모두 네 개이다.

이 가운데 벨릭스와 베스도 재판은 정식 재판이고, 산헤드린 공회와 아그립바2세 재판은 정식 재판이 아니었다. 공회는 “바울이 왜 유대인들에 의해 기소되는지” 알고 싶었던 천부장의 요청에 의해 소집되었고(22:30), 아그립바2세 재판은 황제에게 쓸 무언가를 얻고자 했던 베스도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되었다.

1. 배경
바울의 네 재판이 열리던 기간에 로마 황제는 율리우스 집안의 마지막 황제인 네로(54~68년)였다. 지방수세관으로는 벨릭스(52~59년)와 베스도(59~61/62년)가, 대제사장은 아나니아(47~58년)와 이스마엘(58~60년)이 연관된다. 바울을 심문하기 위한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열한 번째 날에 있었다. 57년도 오순절이 5월 28~29일쯤 되기에, 바울이 오순절 직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본다면 공회는 6월 8일쯤 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벨릭스 재판은 가이사랴에서 6월 15일쯤 열린 것이 된다.

▲ 박형대 교수 ·총신대학교 신약신학 ·개혁사상부흥특별위 전문위원

벨릭스 재판 이후 두 해가 지나는 동안 바울 문제가 다시 다뤄지지 않고 미뤄지다가, 새로운 지방수세관 베스도가 와서야 재심된다. 때는 59년 여름이고, 장소는 여전히 가아사랴이다. 베스도 재판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이 먹어 죽었던 헤롯 아그립바1세(행 12:1)의 아들인 아그립바2세가 가이사랴에 와서 베스도를 방문 인사했다(행 25:13). 바울에 대해 들먹인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서 “나 자신도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하여 바울이 헤롯 대왕의 증손인 아그립바와 버니게, 가이사랴 지역의 천부장과 그 도시의 걸출한 남자들, 그리고 베스도에게 변론할 기회를 얻는다.

2. 주요 인물
재판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로 소개된다(행 23:26). 글라우디오는 ‘씨족 이름(nomen[gentilicium])’이고, 루시아는 ‘가족 이름(cognomen)’이다. 천부장이 “나는 많은 밑천을 들여 이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말한 것을 볼 때(22:28),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돈으로 로마 시민권을 사고 천부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루시아가 거느리고 있던 부대는 보병대(cohort)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보병대는 보충대로 보병 760명과 기병 240명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에 대해서는 요세푸스가 자세히 소개한다. 47년쯤 임명된 것, 52년에 묶여 로마로 간 것, 62년에 지방수세관 알비누스 치하에서 악을 행한 것, 63년에 ‘시카리파’라 불리는 암살단에 의해 그가 당했던 어려움, 63년에 있었던 대제사장들 사이의 갈등, 66년에 그의 집이 불 탄 것, 그리고 66년에 있었던 그의 죽음에 대해서이다. 52년부터 58년 사이에 대제사장을 지낸 아나니아는 ‘탐욕스러운 정치가’로, 로마를 위한 ‘부역자(collaborator)’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는 바울의 벨릭스 재판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마엘에게 대제사장직을 넘겨주었다.

벨릭스는 노예였다가 해방된 자유민으로 씨족 명이 두 개(타키투스에 따르면 Antonius이고, 요세푸스에 따르면 Claudius임)나 있어 지방수세관이 되기 어려웠지만 대제사장 아나니아 등의 추천으로 지방수세관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 기소인 편을 들 수밖에 없었음에도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뢰아 지역의 지방수세관을 7년(주후 52~59년)이나 지낸 매우 유능한 정치인이었다. 이때 벨릭스는 “그 구원의 길에 대한 것들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행 24:22), 구브로 유대인을 이용하여 결혼한 19세의 드루실라와의 사이에 2~3세 된 아들을 둔 상태였다.

보르기오 베스도는 잘 알려진 로마의 명문가문 ‘보르기오’(그의 씨족이름) 출신이었다. 59년에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베뢰아의 지방수세관이 된 그는 자존심 강한 로마 귀족이었다. 이로 볼 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1차 독자로 명명되고 ‘각하’로 불리는 데오빌로와 신분상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아그립바2세(27년 출생, 93년 혹은 100년 사망)는 59년 여름 당시 여러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전 황제인 글라우디오는 53년에 바타네아, 가울라니티스, 드라고닛, 아빌라 지역을 그에게 주었고, 황제인 네로는 56년에 디베랴, 갈릴리 서쪽 타리케아 지역, 베레아의 율리아와 인근 14개 마을을 아그립바에게 주었다. “아그립바는 로마 지지자였고 로마와 연관된 일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는 글라우디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의 후견인으로 임명받아, 대제사장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입는 복장을 소유했으며 성전고를 돌보는 일도 맡았”다.

아그립바보다 한 살 어린(28년 출생) 헤롯 아그립바1세의 장녀인 버니게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첫 번째 남편 알렉산더는 13세(주후 41년)에 죽고, 두 번째 남편인 삼촌 칼키스의 왕 헤롯은 20세(주후 48년)에 죽고, 오빠인 헤롯과의 불륜에 대한 소문으로 재혼한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와는 이혼하고, 59년 당시에는 오빠와 다시 살고 있었다. 버니게는 이후 로마 황제가 된 베스파시안(69~79년 통치)과 티투스(79~81년 통치) 부자(父子)의 애첩이었다.

3. 바울 변론의 특징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의장인 산헤드린 공회 재판에서 바울은 전날 변론을 정리한 다음, ‘소망과 부활’이라는 표현으로 변론을 마무리했다. 천부장을 고려해서 ‘하나님의 시민으로 살았다’고 말했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 구성된 공회 구성원을 고려하여 ‘소망과 부활’을 말했다. 로마 시민권을 돈을 들여 산 천부장에게는 ‘하나님의 시민’이야말로 ‘시시하지 않은 도시의 시민’(행 21:39)이라고 말한 것이 되었다. 율법을 어기는(행 23:3) 아나니아와 하나님의 초월적 사역을 거부하는 사두개파에게는 ‘부활이 소망’이라는 것을 피력했다. 율법대로 살려하는 바리새파에게는 ‘소망이 부활에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중요하게 사용했던 ‘선한 양심, 시민, 소망, 부활’ 가운데 ‘시민’이 벨릭스 재판의 바울 변론에서 빠진 것은 천부장이 없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해될 수 있다. 천부장과의 대화로 인해 중요하게 된 요소가 ‘시민’이었는데, 천부장이 없으니 그 요소는 빠져도 되는 것이다. 대신 ‘구원의 길을 잘 알고 있었던’ 벨릭스와 공회에서 이미 바울을 통해 ‘소망과 부활’을 들었던 유대인 기소자들(아나니아와 몇몇 장로)을 고려해 ‘소망과 부활’을 설명하되, ‘성경을 믿음’ 및 ‘하나님을 섬김’과 연결하여 풀어주었다. 더불어 성경을 믿고 부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흠이 없는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더둘로의 기소를 무산시키면서도 청중들의 영적 성장을 위한 발언을 변론 중심에 둔 것이다.

바울의 베스도 재판 변론에서 ‘가이사에 대한 무죄 언급’ 부분과 ‘특전을 어근으로 하는 “내놓는다”는 단어 사용’은 베스도를 고려한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매우 단호한 어조를 읽을 수 있다. 로마행을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바울의 결심이 반영된 듯하다. 2년 전 산헤드린 공회 직후에 주어진 주님의 말씀(행 23:11)이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 그 말씀을 들은 뒤 이태나 지났지만 구금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재판장들은 판결을 미루기에, ‘자신의 민족을 고소할 거리를 가졌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행 28:19)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다. 2년 반 전에 서신(로마서)을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해 가르쳤던 로마 교인들이 있는 곳에 ‘사슬에 묶인 채로’ 가야하는 결정이었지만,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가이사 상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로 볼 때, 베스도 재판에서 한 바울의 ‘가이사 상소’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벨릭스 재판에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믿음, 소망, 부활, 양심’으로 표현했던 바울이, 베스도 재판에서는 그러한 표현에 걸맞는 결정을 ‘행위 말(화행, speech-act)’로 선언한 것이다. 바울 재판 기록을 읽었을 베스도와, 이전 재판에 대해 알고 있던 유대인은,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바울에게서 ‘부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흠이 없는 양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이다. 가이사랴에 있는 성도들,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 등은 바울의 결정을 통해, 이미도 알았지만 ‘주님의 뜻’이 이뤄지는(비교. 행 21:14)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아그립바 재판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아그립바와 버니게를 고려해서 ‘모세와 선지자’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고, 베스도와 다른 이방인들을 위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변론했다. 그간의 변론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었던 ‘소망과 부활’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한 모든 민족 구원의 소망’으로 구체화하였다.

4. 적용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 변증과 전도를 재판 변론의 목적을 삼는다면 성경적 개혁을 하는 것이겠다. 무작정 승소가 아니라, ‘죄가 있다면 벌을 받겠다(행 25:11)’는 태도로 정직하나 조리 있게, 예절 바르나 아첨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고소하는 사람들마저 축복하는 마음으로 재판에 임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재판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하는 경우마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바울대로 복음 중심이면서도 올곧고 체계적일 수 있다면 공동체마다 바른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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