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태 소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김승태 소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9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정부 기관들은 물론, 사회 각 단체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계에서도 교단별로, 또는 연합으로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꼭 100주년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매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3월 1일에 앞선 주일을 3·1절 기념주일로 지켜왔다. 그러면 왜 우리가 3·1운동을 기념해야 하며,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가. 특별히 한국교회는 왜 3·1운동을 기념해야 하며,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 중국, 일본, 미주, 하와이, 러시아 연해주 등 모든 곳을 포함한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더라도 1500여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은 20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리 인구가 1천 800만에서 2000만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3·1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하게 되었다. 3·1운동이 3·1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3·1혁명에서 추구하였던 이념 내지 정신이 아직도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혁명의 이념 내지 3·1정신은 크게 3가지다. 자주독립(自主獨立), 정의인도(正義人道), 평등평화(平等平和)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로 나서고 지도력을 제공했다. 운동 확산의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큰 기여를 했다. 일본헌병대의 조사에 따르면 3·1운동의 주동자나 과격 행동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람은 1919년 말까지 1만9054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전체의 17.7%이다. 당시 총 인구를 2000만명으로 보고, 기독교 신자를 대략 30만명으로 보았을 때, 총 인구의 1.5%에 불과하던 기독교계가 3·1운동 총 피검자의 17.7%나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3·1운동에서 기독교계의 역량과 비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여성 피검자 총 471명 중 308명(65.4%)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한국교회는 지금과 무엇이 달라서 그렇게 큰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사회적 존경을 받았을까? 지금의 한국교회와는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달랐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신앙의 성격이고, 둘째는 축복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신앙은 사사화(私事化)되지 않고 공공성(公共性)을 띠고 있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공공의 선(善)을 위해서는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화합하였다. 그리고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과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

우리가 3·1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신앙전통을 회복하고 이어받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현대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앙이 사사화되고,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축복관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 있다. 다가오는 3·1운동 100주년은 한국교회가 민주화, 사회정의, 평화통일 등 3·1정신의 구현에 앞장서고,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과 축복관을 회복하고 이어받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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