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섭 교수(총신대.기독교통일학회 회장)

▲ 안인섭 교수(총신대.기독교통일학회 회장)

2019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게 된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통치에 저항한 한국 역사상 최대의 근대적 민족운동이었고,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실제로 이 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는데 많은 인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두고 ‘3.1운동100주년기념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사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점차 약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더더욱 중요하다.

개혁주의 신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고 고백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스위스의 개혁주의자들, 프랑스의 위그노들, 화란의 칼빈주의자들, 영국의 청교도들이나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근대 민족 국가 형성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1919년 한국의 3.1운동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측면 뿐 아니라 기독교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10년에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아 무단 통치를 자행하고 있었고 신앙적인 탄압도 강행했다. 1911년 105인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양심으로서 3.1운동의 준비 단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비폭력적인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서 이 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평양대부흥운동 등 1900년대의 부흥 운동들을 경험했던 인물들이 지도자로 나섰다. 1919년 3~4월 1214회의 3.1운동 중 주동 세력이 명확하게 밝혀진 311곳을 보면 기독교가 78지역, 천도교가 66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합동으로 42지역에서 3.1운동이 발생했다. 총독부의 자료를 보아도 3.1운동으로 수감된 사람들 가운데서 16.2%, 기소 인원 가운데 21.4%, 불기소 인원의 11.7%가 기독교인이었고, 소각된 예배당이 59개, 일부 파괴된 예배당이 24개, 기독교학교가 3개 등이었다. 이 통계들은 3.1운동에 기독교가 얼마나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전체 인구의 2퍼센트도 되지 못했던 기독교가 전체 3.1운동의 20퍼센트 이상을 추진했던 것이다.

3.1운동의 33인의 대표 가운데 천도교 15인, 불교 2인에 비해서 가장 많은 숫자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가운데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등 평양신학교 출신이 5명이었다. 또한 1919년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선두 목사는 3.1운동에 앞장서다가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투옥되어 제8회 총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본 교단의 승동교회는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의 학생 대표들이 모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눠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역사유적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고난의 시기에 있던 민족에 3.1운동을 통해서 소망을 전했다. 특히 기독교는 3.1운동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공헌했으며, 3.1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3.1운동100주년기념준비위원회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하다.  단지 일회성의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첫째 이 위원회는 3.1운동의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철저하게 연구해야 한다. 둘째 이 위원회는 신학적 토대 위에서 한국교회 전체가 3.1운동 100주년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 셋째 그렇게 될 때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대 사회 신뢰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며 한국교회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