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3년 7월 1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회의를 열어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7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이다. 그 중 초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107개 문답으로 이루어진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반영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행위나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밭에 먹을것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란 말씀처럼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만족하고 행복해 하겠노라는 고백아닌가!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가?

선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목양의 임직을 받은 목사와 장로들이 초신자가 지켜야 할 소요리문답 제1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되겠는가? 언제부터 기독교가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하였는가? 빛의 열매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인데 목사와 장로 임직을 받을 때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요리문답을 신구약 성경의 교훈과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믿고 따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 인면수심의 얼굴을 한 채 타락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되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예수님은 바로 이런 자들에 대하여 “그러므로 무엇에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시며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눈먼 인도자라고 책망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9.15 쿠테타로 정관개정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총회를 낙심시키는 재단이사들과 불의한 일에 몸을 담으며 신학자의 양심을 송두리째 팔아먹은 교수들은 물론 총회 언저리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하고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어리석은 부자 같은 총대들과 총회를 섬기는 총대 모두가 기본에 충실해져야 한다. 언제고 우리 총신의 교훈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회자가 되라’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는 총장과 교수 그리고 총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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