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한인기독교회 탄생

1918년 7월 29일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신립교회(新立敎會)가 탄생한 날이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세운 이 교회는 그해 12월 23일 정식 교회 명칭을 ‘한인기독교회’로 정하고, 하와이 한인사회의 또 다른 구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와이에 한국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 13일이다. 갤릭호에 몸을 싣고 호놀룰루항구에 도착한 102명을 시작으로 2년 반에 걸쳐 약 7500명의 한인들이 국운이 기우는 조선 땅을 떠나 하와이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 고국을 그리는 마음을 하와이한인기독교회는 광화문을 본뜬 예배당 건축으로 표현했다.

초창기 이민자들 중에 감리교회인 인천 내리교회 출신들이 많았고, 하와이감리교회 또한 이민자들의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에 이민사회는 주로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결속했다. 105인 사건 이후 일제의 기독교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한 이승만도 1913년 하와이로 건너와 한인교회와 한인기숙학교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감리교회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승만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아무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는 일종의 독립교회 설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하와이한인기독교회였다. 때문에 자치적인 민족 교회를 탄생시켰다는 긍정적 평가와, 한인사회의 분열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한다. 초대 담임목사는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수학한 민찬호 목사였으며, 1938년에는 서울 광화문의 모양을 본뜬 예배당을 건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와이한인교회는 이후 기미년 만세운동을 계기로 이승만이 본격적으로 전개한 독립운동의 적극적인 지지자와 후원자가 되어,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현재에도 교회당 앞에는 이승만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
보수신학 대변 ‘신학지남’ 창간

1918년 3월 20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는 장로교 칼빈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학술지를 창간한다. ‘넓은 신학의 바다에 올바른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이라는 뜻을 가진 <신학지남>이라는 제호가 이 학술지에 붙여졌다.

▲ 칼빈주의 신학을 진흥하고 보수신앙을 대변해 온 <신학지남>의 1918년 창간호.

창간호에는 발간사격인 편집인의 사설을 시작으로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선교사의 ‘신학변증론’, 맥파랜드(한국명 맹의와) 선교사의 ‘부활이치’, 당시에 이미 고인이 된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선교사의 설교문 등이 게재됐다. 꽤 많은 광고들이 창간호를 장식하고 있는데, 독자인 교역자들을 위해 책값을 낮추고자 광고를 싣는다는 별도의 설명문도 나와 있다.

1910~20년대는 이제 막 태동기를 벗어난 한국교회에 수많은 간행물이 쏟아지며 그 자산들이 풍요로워지던 시대였다. 특히 <신학지남>은 감리교의 <신학세계>, 성결교의 <활천> 등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신학적 저변을 확충하고 진흥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회자로 사역하는 이들에게는 계속해서 풍부한 신학정보와 목회자료를 제공하고, 사역지로 나설 준비를 하는 신학도들에게는 설교준비에 필요한 필수요소들을 제시하면서 <신학지남>은 당시 복음사역자들을 위한 필독서로 각광을 받았다.

초대 편집인인 호주 출신 엥겔(한국명 왕길지) 선교사를 시작으로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남궁혁, 로버츠(한국명 나부열), 클라크(한국명 곽안련) 등이 이어받아 발간해 오던 <신학지남>의 행진은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휴교한 이후, 1940년 10월에 제22권 5호를 끝으로 잠시 멈춘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 이후 대구에서 장로회총회신학교 학장으로 취임한 박형룡 박사가 1954년 2월 1일 <신학지남> 제23권 1호를 속간하면서 13년만의 복간이 이루어진다. 당시 <신학지남> 발행인이자 편집인을 맡았던 박형룡 박사는 ‘신학의 지남침은 다시 움직인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속간사에 남긴다. “이 땅의 신앙의 동지들은 다 일어나서 신학의 정로를 가리키는 이 성역에 합력하여 매진하세.”

박형룡 박사는 <신학지남>이 이 땅에 밀려온 자유주의 신학의 파고 속에서도 보수신학의 입장을 굳건히 견지하도록 지켜낸 인물이다.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가 김재준 목사의 기고 금지 사건이다.

1933년 <신학지남> 가을호에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표방한 김재준 목사가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 성경축자영감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자, 박형룡은 편집인으로서 더 이상 그의 글이 실리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학지남>은 보수신학의 대변지로서 정체성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훗날 장로교 총회가 분열되면서 예장통합 측 장로회신학대학은 <교회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지남>과 결별한다.

현재 총신대학교 글로벌개혁신학처에서 발간작업을 담당하는 <신학지남>은 올해 2월 통권 333호에 해당하는 2017년 겨울호 발행을 앞두고 있다.
-----------------------------------------------------------------
일제 항거 ‘강경성결교회’ 설립

충남 강경은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여러 교파의 다양하고 오랜 역사들을 축적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1918년 10월 설립된 강경성결교회이다.

강경성결교회는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을 졸업한 정달성이 개척한 신앙공동체이다.
교회가 안정된 궤도에 이른 것은 1922년의 일이었다. 매일 오전 2시에 온 성도들이 모여 새벽기도운동을 벌인 것을 계기로 부흥이 일어나며 예배당 건축도 시작됐다. 가장 큰 난관은 막대한 비용이었는데, 이 문제의 해결에 매우 독특한 사건이 개입된다.

▲ 강경성결교회의 소중한 유산인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한옥예배당.

앞서 1919년 3월 20일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한창일 무렵, 초대 성결교회 감독이던 존 토마스 선교사가 강경을 찾아와 시찰하던 중이었다. 만세 함성을 외치던 조선 청년들을 뒤쫓아 오던 일본 경찰들이 그만 선교사 일행을 동조자로 오해해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말았다. 이는 곧 국제문제로 비화됐고, 일본은 사과의 뜻에서 상당액을 배상금으로 내놓는다.

바로 이 배상금의 일부가 강경성결교회의 첫 예배당을 건축하는 기금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인범 전도사의 설계로 1923년 건축된 이 정방형의 한옥예배당은 남녀의 출입구를 구분하고 실내에도 가림막을 설치하는 등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독특한 양식을 띠고 있다. 6·25 당시에는 폭격으로 예배당 일부가 파손됐다.

1950년대 강경성결교회가 홍교동으로 이사하면서 이 예배당은 북옥감리교회 소유로 오랫동안 보존되어오다, 2012년 강경성결교회에서 다시 매입해 관리하는 중이다. 문화재청은 이 건물을 2002년 9월 등록문화재 제42호로 지정한 바 있다.

새로 건축된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에도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유산이 간직되어 있다. 바로 전국 최초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항거한 기록이다. 1924년 10월 11일 강경공립보통학교는 읍내 옥녀봉에 세워진 신사에 참배를 예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이에 끝까지 불응한 김복희 교사와 57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대한애국부인회 결사대장 출신인 강경성결교회 백신영 전도사의 지도를 받던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결국 이들 전원이 학교에서 면직과 퇴학 처분을 받지만, 당시 전국적으로 신사를 건립해 조선인들을 참배토록 하려던 일제의 정책은 이 사건을 계기로 10년 넘게 후퇴하고 만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이를 기념해 2006년 9월 21일 강경성결교회 앞마당에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와 조형물을 건립한다. 신앙을 위해, 겨레를 위해 불의한 권력과 대항한 이들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긍지가 되었다.
------------------------------------------------------------------
‘조선예수교장감협의회’ 창립

1918년 2월 26일 서울YMCA회관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대표들이 모였다. 이들은 이틀 동안 진행된 총회를 통해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朝鮮耶蘇敎長監聯合協議會)를 창립하고, 장로교 소속 김필수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틀간 계속된 이 총회에서는 총 17개 조로 된 헌법이 통과되었는데, 전문에는 협의회의 목적을 ‘①두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는 정신을 증진케 하며 친목하는 정의(情誼)를 돈독케 함 ②양 교회가 단행하기 어려운 일이 있는 경우에는 합력진행하기를 힘써 도모함 ③두 교회가 교역상 경력과 지식을 서로 교환하여 그리스도 사업을 확장함에 도움을 줌’ 등으로 규정했다. 또한 서로의 신경과 정치와 예배모범 등에는 간섭치 못하도록 제한하기도 했다.

앞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간에는 1905년 결성된 재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가 결성되었으나 이는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고, 한국인들과 교회까지 참여한 것으로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가 교파를 초월한 최초의 연합조직이라 할 수 있다. 두 교파는 이미 1915년부터 연합기관지인 <기독신보>를 발간하며 활발한 교류를 벌여온 차였다.

협의회 창립 배경에는 일본 총독부가 기독교의 복음 확장에 제동을 거는 사회분위기가 심화되고, 이로 인해 한창 달아오르던 교회들의 성장세가 주춤한 시점에서 당시 한국교회의 양대 세력인 장로교와 감리교가 자구적인 대응책을 찾은 점이 작용했다고 교회사학자들은 분석한다. 이 무렵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초교파세계교회운동도 협의회 탄생에 자극이 된 것으로 보인다.

협의회는 6년 후인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확대 재편성되며, 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 한국교회 연합기관의 모태가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기관 중 하나인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은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결성을 교회사의 중대 사건 중 하나로 간주하고, 여러 해전부터 100주년 기념사업을 제안하고 추진해 왔다.
----------------------------------------------------------------
원주 ‘모리스 선교사 사택’ 건립

원주 일산동은 강원도 남부의 기독교 선교 발상지이자, 서구의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였다. 그 언덕 위에 여전히 서있는 모리스 선교사 사택은 이 지역 선교역사를 입증하는 유일한 현존 자료이다.

▲ 지난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원주시 일산동 소재 모리스 선교사 사택.

1918년 건립된 이 서양식 주택은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169.19㎡ 크기의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1월 모리스 선교사 사택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기독교 선교활동의 역사와 서구식 건축양식을 담고 있으며,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1900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찰스 D. 모리스(한국명 모리시) 선교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1917년 원주지역 감리사로 부임해 강원도 일대 선교사역을 지휘했다. 한국 사람을 만나면 늘 ‘선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며 전도했다는 그는 1927년 이 땅에서 생을 다했다. 시신은 양화진 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원주제일감리교회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