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창세기 1장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고 선포한다. 그 누구라도 능력과 실력, 성품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인간다움을 훼손하지 않는 기본적 삶을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 생겨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을 종종 사회 복지 제도의 확산을 반대하는 논리로 사용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라면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이 먹는 것을 당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신 은혜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내가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 하지 않고 은혜로 받았다 고백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부족하고 무능해 보인다 할지라도, 사람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거저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저 받은 은혜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으로 최저 이상의 삶을 누리게 하는 정책, 최저 임금을 보장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찬성하게 한다.

이점이 잘 드러난 예로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있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들 수 있다. 이른 아침에 고용된 품꾼은 더위를 견디며 온종일 수고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을 못하고 놀고 있던(마 20:6) 품꾼은 겨우 한 시간만 일을 했다. 그런데도 포도원의 주인은 하루의 모든 일을 마치고, 일찍 고용된 이들과 가장 늦게 고용된 이들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그 한 데나리온으로 음식을 구하고 밤에 쉬며 다음 날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포도원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일한 시간과 개인적 능력은 큰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노동자들에게 하루를 살아갈 비용은 큰 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한 데나리온이다. 어떻게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아침 일찍 고용된 이들이 하루 종일 수고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다해 일해서 가장 늦게 들어와 한 시간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게 만든 셈이다.

그래서 이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천국,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연봉을 받는 세상과 다르다. 능력에 따라 일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조금 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하루를 살아갈 품삯을 받게 하는 세상,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사실, 그 능력이라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기억하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그에 합당한 연봉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그래서 왜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느냐고 불평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천국’에 안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갔는데,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런 시간이 영원한 천국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그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천국은 이처럼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에게 최소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품삯이 보장되는 곳이다. 내 능력이 다른 이의 하루 품삯을 보장하게 하는 곳이다. 이것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일 것이며, 이러할 때 우리가 믿는 복음이 참으로 ‘공적’임을 깨닫게 된다.

최저임금은 능력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지급되는 한 데나리온을 명료하게 반영한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현재의 최저임금은 계속 인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서로 힘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재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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