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Since 1918] 100년 전 그 사람들
[신년특집 Since 1918] 100년 전 그 사람들
  • 정재영 기자
  • 승인 2018.01.21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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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은 5년간에 걸쳐 1000여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해입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던 제국주의의 야욕이 첫 좌절을 맛보던 순간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베르사이유조약을 통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선포합니다.

‘한 민족이 자신들의 국가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뜻을 가진 이 원칙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던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독립의 꿈을 품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씨앗은 이듬해 기미년 삼일만세운동으로, 더 멀게는 1945년 조국 해방으로 꽃을 피웁니다. 바로 그 시대를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8년 그 해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천안 출신의 16세 소녀는 에스더와 드보라처럼 구국의 선봉에 서는 인물이 됐고, 건강이 좋지 않아 벼슬과 사회활동을 접고 강원도 홍천으로 낙향한 55세의 사내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일하러 가세’라는 희망의 노래를 겨레에게 들려줍니다. 그 해 머나먼 중국 땅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한 아기는 훗날 한반도로 건너와 성숙한 기독교정신을 실현하는 지도자로 자라납니다.
이제 시절을 거슬러 명과 암이 긴박하게 교차했던 100년 전, 그 시대의 현장으로 떠나봅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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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정신 일깨우며 애국신앙 다지다

 이화여고에 입학한 유관순

▲ 애국신앙의 꽃으로 산화한 유관순 열사.

솜씨 좋은 뜨개질 실력을 가진 열여섯 꽃다운 소녀였다. 자신의 사촌 유경석의 아들 재경이 돌을 맞자, 그는 직접 고운 문양의 뜨개 모자를 만들어 조카에게 선물한다. 고향을 떠나 멀리 서울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중에도 유관순은 이처럼 가족들을 살뜰히 챙기곤 했다.

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에서 유중권과 이소제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개신교 집안이 된 가문에서 출생해, 그는 일찍부터 기독교적 배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일가에서 이끌던 지령리교회는 대한제국시절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다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전력이 있었고, 아버지 유중권은 흥화학교를 세워 민족독립의 인재들을 양성한 인물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린 유관순은 자연스럽게 조국과 동포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는 애국신앙을 체득하게 됐고, 감리교 선교사였던 엘리샤 샤프(한국명 사에리시)의 눈에 띄어 공주영명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그 정신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1918년 4월 1일은 사에리시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으로 학적을 옮겼던 유관순이 드디어 이화학교 고등과에 진학한 날이었다.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립교육기관인 동시에, 이 땅의 젊은 처자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운 산실이었다.
특히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조국 해방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강연회, 시국토론회 등이 학교에서 열리곤 했는데, 유관순은 바로 이 모임을 주도하던 이문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현장에 세워진 유관순열사기념관.

마침내 이듬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갈 때 유관순 역시 학우들과 함께 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었으며, 풀려난 후에는 고향인 천안으로 달려가 다시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다.

현장에서 일제의 총칼에 부모를 다 여의고, 그 자신도 수감자 신세가 된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1년 넘게 모진 옥고를 치르다가 18세의 나이로 숨진다. 사인은 방광파열이었다. 어린 소녀를 향해 일제가 온갖 고문을 자행하며 얼마나 잔혹한 패악을 부렸는지는 근래에야 밝혀진 당시 선교사의 보고서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사람의 한마디: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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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 후반기 사역 시작하다

 보리울로 낙향한 남궁억

▲ 무궁화 삼천리 강산을 소망하며 평생을 바친 남궁억.

학생들 실습용으로 뽕나무 묘목 주문이 오면 그는 비슷하게 생긴 무궁화 묘목을 끼워 보냈다. 그렇게 해서라도 겨레의 상징인 이 꽃을 온 누리에 퍼뜨리며. 삼천리 방방곡곡을 무궁화 천지로 만들고자 했다. 일제가 밝혀낸 무궁화동산 사건, 일명 십자가당 사건의 실체였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남궁억은 18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강원도 홍천에서 보냈던 그는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고종의 통역관이 되어 관직에 나선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독립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창간에 앞장선다.
이후 관직과 애국계몽운동 쪽을 오가며 50대 중반까지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활동하던 남궁억은 결국 몸에 심각한 이상을 느낀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가족 친지들의 설득으로 1918년 서울을 떠난 남궁억이 정착한 곳은 바로 유년기의 터전 홍천 보리울이었다.

사그라진 줄 알았던 민족의 기개가 부활하여 타올라가던 그 무렵, 남궁억의 지친 심신도 비로소 보리울에서 회복된다. 낙향한 이듬해 세운 모곡교회와 모곡학교는 그의 인생 후반기를 힘차게 열어준 사역 무대였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마을 지도자로, 주일에는 교역자로 활동하면서 다시 신앙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에 나선 것이다.

▲ 남궁억의 마지막 활동무대였던 강원도 홍천에 세워진 무궁화공원.

특히 우리 꽃 무궁화의 전국적인 보급을 위해 학교에 묘포를 만들고, ‘무궁화 지도’를 작성하며 ‘무궁화 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는 일장기와 벚꽃을 우리 민족에 장려하려던 일제에 맞선 은밀한 항거였다.

남궁억은 시대에 헌신하는 노래 작가이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기러기 노래’를 비롯해 애국심을 일깨우는 수많은 찬송과 창가들이 그를 통해 만들어졌다.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라는 후렴으로 잘 알려진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지금도 찬송가 580장으로 수록되어 널리 애창되고 있다.

결국 남궁억의 동태를 마뜩찮게 여긴 일제는 1933년 무궁화동산 사건을 빌미로 그를 체포해 서대문형무소로 보낸다. 결국 옥중에서 생긴 병으로 풀려나지만, 석방된 지 4년 만에 그는 숨을 거둔다.

감리교단은 그를 지난해부터 매년 4월 첫째 주일을 무궁화주일로 지킨다.
▲그 사람의 한마디: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라도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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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뿌리둔 영성·사회개혁 추구하다

 선교사 아들로 태어난 대천덕

▲ 성경에 뿌리를 둔 깊은 영성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추구한 대천덕 신부.

“그리스도의 선하심이 저를 통해 나타나게 해주셔서 예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로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 같이 저도 당신의 청지기로서 저의 가진 것을 기쁨으로 나누게 하시고, 제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도 그들의 좋은 것을 서로 나누게 하옵소서. 억울한 사람과 눌려있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하소서. 결코 저의 영광을 구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당신의 영광을 구하게 하소서.”

깊은 영성과 신실함이 담긴 대천덕 신부의 기도문은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6년이 지났지만 그가 평생토록 일구었던 예수원을 통해, 수많은 저서와 강의들을 통해 여전히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1918년은 대천덕(본명 루벤 아처 토레이 3세)이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태어난 해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국에도 널리 소개된 <어떻게 기도할까> <기도와 영력> <성령세례> 등의 명저를 남기고 무디성경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R. A. 토레이, 아버지는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 6·25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대전에서 고아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역한 토레이 2세였다.

▲ 대천덕 신부가 1965년 설립해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태백의 예수원.

대천덕은 평양의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며 한국과 첫 번째 연을 맺는다. 조부의 영성과 부친의 사역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의 신앙적 지점은 매우 독특하다. 오순절의 신앙적 전통을 따르면서도, 사회참여에 대한 적극성 또한 겸비했다. 중국에서는 비참한 사회현실을 타개해보고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한국에 돌아와서는 성경적 토지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운동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처럼 복잡한 신앙적 스펙트럼을 하나로 녹여낸 존재가 바로 대천덕 현재인 부부가 신앙의 동역자들과 함께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설립한 신앙공동체 ‘예수원’이다. 수도원처럼 기도와 노동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동체이면서도, 현실적인 교회개혁·사회개혁 운동에도 앞장서온 예수원의 53년 세월은 이를 똑똑히 보여준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성도와 성도 간의 관계’ ‘기독교공동체와 비기독교적 사회와의 관계’ 모두를 중요하게 여겼던 예수원의 철학은 수많은 구도자들의 발걸음을 태백으로 이끌었고, 훈련을 통해 그들을 기도의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로 세웠다.
▲그 사람의 한마디: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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