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 이웃 ②이웃입니까?

고립과 단절, 불신과 배척의 1인가구에게 성경의 이웃개념으로 먼저 손 내밀어야

지난 기획 1편에서 1인가구 증가 속에서 ‘이웃’의 의미마저 약화되는 사회 현실을 살펴보았다. 가족과 공동체에 기반을 둔 교회들이 이런 사회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목회와 사역을 고민하는 목소리도 들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1인가구는 왜 증가했을까? 앞으로도 1인가구는 더욱 증가할까? 외롭게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지는데 왜 서로 보듬지 못하고 이웃이 원수가 될까? 외로운 사람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크리스천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신앙 공동체를 일궈가야 하는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테마기획 2, 3편은 이 질문에 답을 찾아가보겠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다고?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서 최대 이슈는 ‘1인가구 증가’였다. 모든 언론과 학자들은 지난 2010년 조사에 비해 1인가구 비중이 25.6%나 증가해 520만3000가구(전체 가구의 27.2%)에 이르렀다는 현상에 주목했다.

원인으로 ‘다원화한 현대 사회 속에서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을 중시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제일로 꼽았다. 그 증거로 미래를 위한 투자나 타인과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현재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욜로족’의 등장을 제시하기도 했다.

<표1>에서 2015년 1인가구 구성비를 보면. 미혼이 43,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미혼은 대부분 20~30대 젊은 세대이다. 2014년 ‘1인가구의 형성과 현황’을 조사한 이명진 교수(고려대)는 “젊은 세대에서 1인가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교육이나 취업 같은 경제적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설명했다. 유명 대학과 좋은 일자리가 서울에 있기에, 청년들은 고등교육과 취업을 위해 혼자 상경을 한다. 하지만 경쟁이 심화하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결혼을 미룬 채 1인가구로  살아야 하는 기간이 점점 늘어난다는 지적이다. 

다시 <표1>을 보면, 배우자와 사별해서 1인가구가 된 이들도 27.9%에 달한다. 이혼을 하면서 1인가구가 된 사람들(16.2%) 결혼했지만 사실상 혼자 사는 사람들(11.9%)도 상당히 많다. 사별과 이혼과 별거 때문에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29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은 개인을 중시하는 가치관에 따라 1인가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명진 교수는 “1인가구는 외로움을 느낀다는 응답이 다인가구에 비해 4배가 높았고, 우울감 고립감 슬픔을 느끼는 경향도 강했다. 식생활까지 부실했다”고 조사결과를 설명했다.

미디어와 기업들은 ‘혼자 사는 자유로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케팅에 이용한다. 하지만 1인가구의 현실은 불안과 외로움에 처해 있으며, 대부분 이웃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 불안하고 위태로운 이름

1인가구 대부분은 화려한 싱글라이프와 거리가 멀었다. 구체적으로 2015년 서울연구원이 서울시에 거주하는 1인가구주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가장 큰 고민거리가 경제적 어려움(61.4%)이라고 답했다. 건강에 대한 걱정(26.2%) 노후 생활 문제(25.8%)가 그 뒤를 이었다. 1인가구의 위태롭고 불안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표2>

이런 상황에서도 전문가들은 향후 1인가구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고령화로 사별한 1인가구도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개인’은 크게 2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첫째는 고립과 단절이다.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청년, 고독사하는 노인 등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둘째는 불신과 배척이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잃고 개인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살인을 하고, 이웃 아파트 주민에게 놀이터 사용을 금지하고, 옆집 사람을 죽은 지 2주 만에 발견하는 일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사회 속에서 발현한 이기주의의 결과”이다.

1인가구는 앞으로 증가할 것이다. 특히 대도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농어촌은 노년층을 중심으로 1인가구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이들이 고립과 단절에서 벗어나는 방법, 배척과 혐오의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우리 사회는 마련해야 한다.

▲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 그 경쟁을 견디지 못한 1인가구가 증가하고 있다. 젊은이는 고시원으로 장년과 노인들은 쪽방으로 내몰리고 있다. 오늘 한국 사회는 삶이 위태로운 그들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줄 것인지 묻고 있다. 영등포 노숙인과 쪽방촌 사람들을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왼쪽 맨위)가 심방하고 있다.(사진제공=광야교회)

미래 사회를 위한 성경의 이웃사랑

전통적으로 ‘이웃’은 생존을 위한 공존 관계였다. 개인의 능력만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실존 속에서, 나(가족)의 삶과 생활 속에서 공존하는 이웃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사회가 다원화하고 개별화하면서, 공존의 의미가 달라졌다. 아파트 위층 가정과 공존하고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전통적인 의미의 ‘이웃’이 사라진 현실 속에서, 한수환 교수(광신대)는 성경의 이웃 개념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이웃의 개념은 그 근저에 ‘나의 유익’이 깔려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보듯, 성경의 이웃 개념은 ‘생명을 주는 자’이다. 나의 유익과 혈연과 학연 등의 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불안에 떨고 위태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의 이웃사랑은 공간의 한계와 관계의 제한을 초월한다. 그렇기에 성경의 이웃사랑은 다원화하고 파편화한 사회 속에서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성경의 이웃사랑은 미래 사회에 꼭 필요한 가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1인가구 증가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개인이 늘어나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고 공동체와 단절하거나, 각자도생하며 극단적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전통적인 이웃은 의미와 필요성을 상실했다. 한국 사회는 앞으로 이런 1인가구가 계속 증가할 것이다.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이웃사랑’의 철학이 미래 사회에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사회는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묻고 있다. “우리의 이웃입니까?”

▲ 한수환 교수
(광신대학교·윤리학)

1.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이웃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을 묻게 한다. 혼밥족과 고독사, 층간소음 문제로 인한 이웃 간 충동적인 살인, 이웃 주민의 애완견에 물려 사람이 죽는 사건, 가난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의 출입을 꺼리는 고급아파트 주민들의 강한 배타심 등등. 이런 문제들을 보면 새삼 ‘우리 한국사회에 이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절로 든다. 이웃개념은 자연인들에게도 있으며, 성경에서도 당연히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참된 이웃의 이해는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2. 자연인들은 이웃을 혈통, 지연, 학연, 목적 등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이웃을 이해하지 않는다. 자연인의 이웃이해는 소위 물화된 ‘나-의식’에서 나온 이해인데 부패한 나에게 얼마나 이익과 유익을 주는가에 따라 상대를 이웃으로 이해한다. 그로인해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학연 등과 같이 부패한 나의 인생관에 일치하는 어떤 특정인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3. 우선 이웃은 나와 상대의 관계가 세상 안에서 구체화되면서 일어난다. 이웃은 나-의식으로 ‘나’가 ‘상대’로부터 생명의 의미를 부여받을 때 나에게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타자의식이다. 말하자면 이웃은 세상의 핵으로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인해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인 지평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는 이웃이 ‘도움을 주는 자’로 묘사된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자에게는 생명을 공급한 자였다. 그가 아니면 강도만난 자는 사망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웃은 나에게 생명 혹은 생명의 의미를 수여하는 존재이며 그로인해 ‘나’는 참된 ‘나-의식’, 즉 ‘너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3. 친구와 원수는 이웃개념과 아주 유사하지만 의미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부패한 ‘나’의 유익이라는 기준에 의해 나온 개념들이 친구와 원수이다. 이런 개념들은 나-의식이 유익성을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는데서 기인한다. 나에게 유익을 주면 친구이고 반대가 되면 원수가 된다. 그리고 이런 나-의식은 세상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는 이웃은 친구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며 더구나 형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에게 특히 잘하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친구도 사라지고 원수도 사라지며 형제도 사라지고 이방인도 사라지는 나-의식에서 비로소 새롭게 일어나는 영적인 존재이다.

친구와 원수는 내가 스스로 판단의 주인이 되면서 상대에 대해 가지는 나-의식의 산물인데 만약 내가 세상적으로 나를 집착하지 않으면 친구도 생기지 않고 원수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미워하면 상대를 친구나 원수로 여겼던 나-의식을 미워할 것이다. 나에게 못하는 사람을 원수로 여기는 나의 판단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한다면 내가 원수로 여겼던 그 사람은 나의 소중한 이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4. 우리 자신을 사랑하면 우리의 유익에 따라 상대를 판단하게 되고 이런 자신을 중심으로 상대를 구분하게 된다. 우리에게 세상적인 이익을 주는 자를 친구로 여기고 우리에게 세상적인 해를 주는 자를 원수로 여긴다. 이런 나-의식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적인 나-의식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처럼 살 때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마5:48)”는 말씀이 이해될 것이다. 예수처럼 살고 싶다면 그분처럼 상대를 이웃으로 믿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나에게 못하는 자를 원수로 여기거나 나에게 잘 하는 자를 친구로 여기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상대를 친구 혹은 원수로 여기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라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존재는 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친구 혹은 원수로 여기는 우리 판단에 집착하는 사악한 우리 자신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가 친구와 원수로 분리되어 피차 서로가 많이 외로워져 있다. 예수의 이웃이해가 지금만큼 절실하게 다가온 때가 있었는가? 한국사회의 문제들은 친구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만나지 못해 생긴 증상들로 보인다. 기독교인만이라도 세상을 강도만난 자로 보며 그들에게 예수의 아가페를 실천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죄인인 우리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셨듯이, 예수를 구주로 신앙하는 우리도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을 강도만난 자로 여기고 아가페를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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