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이 세워진지 42년째 되던 해인 1141년,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와 아랄해 사이의 카트완 평원에서는 이슬람 셀주크 군대와 중국에서 건너온 카라 키타이족의 전투가 벌어졌다. 카라 키타이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국 북쪽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일파였다. 요나라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멸망하자, 황족 야율대석은 몽골로 옮겨가 군주가 되어 구르칸(Gur Khan)에 오른다. 야율대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서진하여 키르기즈스탄에 근거하고 있던 카라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키르기즈스탄 제국, 즉 서요를 세운다.

자신들의 속국인 카라한 왕국이 무너지는 것을 본 동부 셀주크 투르크의 슐탄 마호메트 산자르는 야율대석을 응징하러 출정한다. 당시 산자르의 군대는 10만이었는데 야율대석의 20만 대군에 대패하여 궤멸된다. 이란 북부와 오늘의 아프카니스탄에 걸쳐있던 산자르의 호라산 왕국은 카라 키타이의 속국이 되었고 야율대석은 이곳에서 3개월을 머물다 돌아간다. 이때 이슬람의 패배 소식을 듣고 시리아 항구 자발라의 주교였던 위그는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 충격적 사건을 교황과 유럽인들에게 보고하였다. 그 보고는 아주 환상적으로 미화된 보고였다.

“페르시아 너머 동방에는 사제이며 왕인 요한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는데 모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입니다. 수년 전 이 나라는 페르시아와 메데 왕인 사미아르디와 전쟁을 벌여 페르시아의 수도 액바타나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사제왕 요한은 동방박사의 후손입니다.”

위그가 전한 소식 즉 동방에 강력하고 신비한 기독교 왕국과 사제 왕(prester)이 존재한다는 이 잘못된 보고는 부정확한 오류와 분명한 사실이 얽혀있었다. 당시 유럽은 더 많은 나라와 인구가 살고 있던 동양에 대하여 너무 몰랐고 그저 신비한 땅으로 여기고 있던 때였다. 이럴 때 이슬람 제국을 무너뜨린 카라키타이에 대하여 유럽을 이슬람 반대세력으로 이해하거나 혼동할 소지가 충분했다. 호기심 많은 유럽인들 중 한 사람 마르크 폴로는 사제 왕을 찾으러 동방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실제로 중앙아시아 부족들 중에 기독교 왕국과 사제 왕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유럽에 전한 사제 왕은 중앙아시아 유목민 케레이트 족의 군주 옹칸(Wang Khan, 1203)이었다. 그는 군주이면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였다. 1190년경 작은 몽골의 부족 청년이 아내도 잃은 채 쫓기는 신세가 되어 옹칸에게 일신을 의탁하러 왔는데 그가 바로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칭키즈칸(1162~122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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