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목사(춘천 주향교회)

하나님의 요새로 돌아와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에게는 놀라운 약속과 축복이 임해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들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슥 9:12)

▲ 이병철 목사(춘천 주향교회)

지금 우리는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틀이 깨지고 균열이 생기는 불안하고 분요한 시대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틀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변혁(Mega Change)은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상태를 그 뿌리로부터 바꾸어 놓은 것이므로 우리는 좀처럼 느낄 수 없기에 그것을 꿰뚫어 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비연속적인 대변혁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커다란 흐름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통찰력(insight) 혹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견력(foresight)이 절실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은 10분 후도 생각해야 하지만 10년 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측면에서도 두 종류의 부정을 잘 극복해야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진보적인 입장의 대안과 그 저변에 깔린 사상을 극복해야 합니다. 진보적인 입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영성의 요소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던지는 자본주의 논리나 사회과학적인 방법에 대한 과신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는 세상을 구시대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농후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상을 결국 인간에게 진정한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는 보수적인 입장은 지나친 개(個)교회 중심주의로 인해 사회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공동체성의 상실로 인한 역사를 선도해 나가는 영향력의 한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성경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주목하여 살펴봄으로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스가랴 9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 성전을 재건하고 난 후 40년이 지난 시점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 70년의 기간을 보내고 고토에 돌아와서 어렵게 성전을 세우고도 주변 열국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인해서 여전히 불안함과 두려운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도록 고생하며 살 때에 주변의 열국들은 호황을 누리며 잘 먹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번영과 호화로운 삶을 누리던 열국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들은 뜨거운 환란 가운데서 건짐을 받고 돌아와서 비록 당시는 초라한 모습이지만 다시 한 번 세계사의 중심에 우뚝 서는 위대한 민족이 됩니다.

“내가 내 집을 둘로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서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악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슥 9:8) 여기서 내 집이란 진리가 선포되어지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곳입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B.C 336년에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를 정복하고 더 나아가 세계정복을 꿈을 꿉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나라마다 헬라문화를 심습니다.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의 북부와 남부를 정복했는데 오직 유일하게 한 곳 예루살렘만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애굽을 정복하려다가 그만 33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알렉산더를 통해서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바로 그곳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치열한 인간의 죄악의 극치를 경험한 사람들이 평화의 왕을 고대할 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시온의 딸에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9~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부르십니다. 딸은 아들처럼 힘은 없지만 부모의 사랑의 대상이요 존귀하게 여기는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돌아왔을 때에 자녀의 직위와 존귀함을 회복하게 됩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시리니”라는 말씀은 지금 오고 계시다는 의미로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왕은 어떤 왕입니까?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겸손한 분이십니다. 바로 겸손하게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메시야가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또 너로 말할진대 내 언약의 피로 내가 너의 갇힌 장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 9:11)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 없는 구덩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메마르고 목마른 삶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물 없는 웅덩이는 얼마나 답답한 곳입니까! 이 연단의 기간은 세상의 모든 소망을 다 끊어버리고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명령과 약속이 주어집니다.

1. 갇혔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은 요새로 돌아오라고 촉구합니다.

이 요새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결국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대로 돌아오려면 몸만 아니라 마음이 돌아와야 합니다. 마음이 돌아오려면 제대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회개하려면 성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포로 귀환 후에 가장 먼저 성전을 건축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정치적인 안정이나, 경제적인 안정, 군사적인 안정이 아니라 영적인 안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에서 무엇을 합니까? 살아 움직이는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에바 속에 감추어진 여인(슥 5:7)을 옮겨야만 합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있는 ‘탐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입니다(골 3:5).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에 끝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2. 돌아오는 자에게 갑절의 복이 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빼앗긴 이유는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면 갑절이나 받습니다. 갑절이란 두 배를 의미하는 정도가 아니라 빼앗긴 모든 것을 보상받아서 나도 넉넉하고, 다른 사람도 넉넉하게 베풀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약속합니다.

첫 번째는 자녀들을 일으켜 세워주시는 축복입니다. 당시에는 유다와 에브라임은 적대적인 두 세력 군을 형성하며 갈등과 대립이 컸습니다. 그런데 함께 협력하여 동반자가 될 것이며, 시온을 중심으로 통일된 나라를 이룰 것을 말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하나가 되고, 남북이 하나가 되고, 피폐한 북한의 자녀들과 부패한 남한의 자녀들이 하나가 되어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데,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 이런 복이 임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나라의 경제가 회복되는 축복입니다.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리라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슥 9:16~17)

포도주는 기쁨이 상징이고, 곡식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성전을 짓고 말씀이 임하게 되자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심령이 회복되고, 신앙이 회복되자 생활 전체가 회복되며 나라 전체의 경제가 회복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정도의 복으로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더 놀라운 축복이 이뤄집니다. 정치적인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맛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해방을 맛보게 됩니다. 가난에서 해방, 질병에서 해방, 생활고에서 해방 등 외적인 해방도 중요하지만 더 근원적인 해방은 바로 죄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풍요를 누리는 길은 바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진정한 풍요를 누리게 하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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