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총신 정관 변경이라는 전대미문의 몰지각한 상황에 전국교회 300만명 성도와 1만2000여 교회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일찍이 1959년 WCC문제로 연동측이 이탈한 상황에서 총회신학교는 용산 시대를 지나야 했다. 5년이 지난 후 제법 큰 규모의 사당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총신의 사당동 시대가 열렸다.

1965년 총회는 다음과 같은 계획을 수립한다. 1차 연도에 신학교를 건립하고 2차 연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제3차 연도에 총회회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전국교회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당시 백남조 장로는 사당동 캠퍼스 부지기금을 헌금하여 신학교 재건에 큰 힘이 되었다. 이에 용기백배한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 재건에 혼신을 기울였고 박윤선 박사가 총신 교수로 부임하면서 신학교육이 더욱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럴 즈음 명신홍 교수는 1963년 8월 직장암 4차 수술을 받고 투병 중에서 모금을 위해 태평양을 건넌다. 개혁교회 세계대회에 맞추어 헌신적인 모금 활동으로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기금인 5만 달러를 약속 받는다.

1964년 9월 명신홍 교수는 또 한 번의 모금을 위해 도미하여 4만 달러의 헌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투병하면서 9만 달러의 헌금을 모금한 명신홍 교수는 앞으로 진행될 총회신학교 재건을 꿈꾸며 모금 전액을 총신에 바친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병약한 중에도 항공요금을 아끼기 위해 미첼호에 몸을 실었음이 그의 1965년 2월 27일 토요일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직장암 수술 이후 투병하는 환자였던 명신홍 박사는 한 푼이라도 아껴 총신을 건축하려고 육체적 피로가 가중되는 배편으로 귀국했던 것이다. 그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고 그는 1965년 3월 16일 화요일 17일의 항해 끝에 인천항에 도착한다. 생명을 담보로 한 명신홍 박사의 4만 달러 헌금이 없었다면 사당동 캠퍼스 조성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가운데 또 한 번의 헌신이 백남조 장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당시 사당동 부지 마련 헌금을 한 백남조 장로는 자기 집을 건축하려던 2000만원을 신학교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 그의 헌신은 신학교 재건에 대단한 힘과 격려가 되었고 양재열 장로를 중심한 실업인들로 구성된 사랑의 동산 모금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모금 캠페인이 1966년 1월 31일 방명록 헌금자만 20만명에 달했다. 총신은 말 그대로 전국교회의 정성으로 지어진 신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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