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우 목사의 사진에세이/순례자의 길] (13)순례자의 길은 끝이 있다

사진1  주어진 시간동안 충실히 살아온 보리가 생애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있는데, 바로 앞에는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이 준비되어 있다. 황금색과 연녹색의 대비, 가는 세대와 오는 세대의 대비가 선명하다.

사진2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태양은 하루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린다. 하루의 마지막은 한 해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하고, 한 해의 마지막은 한 생애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한다.

사진3  노고초(老姑草) 혹은 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하는 할미꽃이다. 이미 예쁜 꽃잎은 다 떨어지고 열매에서부터 길게 자란 털이 노인네의 백발을 닮아 있다. 젊은 시절 한 때 가지고 있었던 꽃잎은 아니지만 헝클어진 백발이 이슬을 달고 있으니 꽃 못지않게 아름답다.

사진4  하얀 눈이 내려 왕릉을 덮었다.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왕의 무덤이라 하니 적잖은 부귀영화를 누린 자였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도 역시 주어진 생애를 살고 그 삶을 마감했을 뿐이다. 인생은 누구나 올 때가 있고 갈 때가 있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 바로 앞에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판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재미있는 대비를 본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황금색과 연녹색의 대비는 주어진 시간 동안 충실히 살아온 가는 세대와 이제 막 그 삶의 출발선상에 서있는 오는 세대의 대비다. 그동안 자기의 소임을 다한 보리는 곧 베어지고, 그 자리에는 모판에서 자란 벼가 옮겨 심어져서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이렇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가을에 뿌려진 씨앗에서 싹이 나고, 어린 시절 내내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견디며 살아낸 보리가 봄을 맞아 쑥쑥 자라서 충실한 열매를 맺었다. 잘 익은 열매를 달고 자신을 거두어들일 낫을 기다리는 황금빛 보리가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고운 흙 위에 뿌려져서 극진한 보살핌 속에 싹이 트고 자라서 모내기하기에 적당한 크기가 된 모판 위의 벼들도 참으로 예쁘다. 그 연녹색 싱그러움 속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땅에 오고 가는 순례자들도 이와 같으리라.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태양을 본다. 아직도 못다한 사명이 남아서일까?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굳은 결의 때문일까? 그 뜨거운 열정을 최후의 순간까지 불태우는 낙조는 아름답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붉은 저녁노을을 남기고 떨어지는 태양은 한 생애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나 예외 없이 맞이하게 될 생애의 마지막인데, 순례자는 그 최후의 순간까지 사명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힘이 넘치는 젊은 날에는 그 나름의 사명이 있고, 힘이 좀 약해지긴 했으나 지혜가 더욱 풍부해진 노년에는 또 그때에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저녁노을과 같이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적인 사명자로 살아내는 순례자가 아름답다.

‘노고초(老姑草)’ 혹은 ‘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하는 ‘할미꽃’이라는 이름은 꽃이 핀 모습을 보고 지은 것이 아니라 꽃잎이 지고 난 후의 모습을 묘사한 이름인 것 같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붉은 자줏빛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는데 거기에는 털이 길게 달려있다. 그 털들의 모습은 마치 노인네의 헝클어진 백발과 같아 보인다. 또 어떻게 보면 꽃잎이 떨어지고 난 후에 다시 피어난 또 하나의 꽃과 같다. 젊은 시절 한 때 가지고 있었던 예쁜 꽃은 아니지만 성성한 백발이 이슬을 달고 있으니 그 꽃 못지않게 아름답다.

경주 배동에 가면 삼릉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왕의 무덤 셋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어느 추운 겨울에 하얀 눈이 내려 무덤을 포근히 덮고 있는 모습이 마치 눈 이불을 덮고 고요히 잠을 자는 듯 하다. 여기 잠든 이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자세히 모르겠으나, 왕릉이라 하니 적잖은 부귀영화를 누린 자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무덤 셋의 주인들도 역시 주어진 생애를 살고 그 삶을 마감하여 이제는 흙무더기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누구나 다 가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지내는 동안에 흔히 천년이고 만년이고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착각은 자유이지만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어진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버리거나 엉뚱한 일들에 빠지게 된다. 삶의 지혜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례자는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길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라고 했던 시인처럼 우리도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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