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에 말한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 무렵,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33살의 젊은 사제 마틴 루터가 <95개조 논제>(Ninety-Five Theses)를 붙였다. 이 행동은 세계사에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새겨졌다. 2017년 10월 31일, 한국교회는 역사적인 사건과 마주했다.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한국교회는 로마가톨릭과 닮았다’는 진단까지 내리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지 치열하게 검증하고 비판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우리는 이제 새로운 500년을 시작하며 “어떻게 종교개혁의 정신을 후대에 올바로 전해줄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그 대답 역시 성경과 종교개혁 500년 역사와 개혁신학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개혁과 부흥, 사회의 변혁을 열망하는 한국교회에 어떤 조언을 해줄까.

▲ 저출산, 고령화, 자살1위, 북핵위기 등등 한국 사회의 미래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사회에 희망을 주고 변혁의 주체가 돼야 할 한국교회 역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는 자기개혁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아직 열매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한다면, 어둔 밤의 밝힌 십자가 불빛처럼 이 시대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개혁을 일궈낼 것이다.

“우리도 200년 걸렸다. 지치지 말라”

한국교회는 1990년대 이후 침체와 하락으로 들어갔다. 100년 동안 성장만 경험했던 교회는 충격을 받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은 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극적으로 표출됐다. ‘철저한 회개를 통해 다시 부흥’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수년 전부터 ‘본질을 회복해서 다시 부흥’하길 기도했다. 침체는 계속 되고 있다.

개혁과 부흥의 열망이 연이어 깨지는 상황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말을 해줄까.

“낙심하지 마세요. 우리도 위클리프가 1353년 로마가톨릭을 비판한 이래, 후스와 루터와 칼빈과 1559년 장로교회를 세운 녹스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까지 200년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개혁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지치지 말고 매일 개혁을 향해 나아가세요.”

위클리프 이전에도 프랑스의 왈도(왈도파)는 4복음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1177년 복음의 본질을 추구했다. 체코의 후스(1337년 탄생)는 교회개혁을 외치다가 1417년 화형으로 순교했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짧게 200년, 길게 400년 동안 진리를 향한 긴 여정이었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오직 성경 외에 다른 기준은 없다”

개혁은 인내와 함께 올바른 방향이 중요하다. 다행히 교회는 변치 않을 방향타, 성경이 있다.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가 ‘오직 성경’을 주일에 교회 안에서만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직 성경’ 속에서 도출한 만인제사장론을 거부하고, 오직 믿음과 은혜의 구원론이 흔들리고,  믿음의 열매인 선행을 무시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한국의 유교 사상, 기복 전통, 자본주의 속에서 체득한 물질만능주의 등이 신앙(성경)과 함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오직 성경’이 아니다. 개혁이 이루어질 수도 없다.

“‘오직 성경만이 영적 권위의 토대’(얀 후스)이고 그 토대 위에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세웠습니다. 성경과 함께 권위를 갖고 있던 교황과 교회의 전통과 수많은 성물 성상(우상)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개혁 이전으로 회귀입니다.”(총신대 문병호 교수, 합신대 이승구 교수)

‘오직 성경’은 구호가 아니다. ‘오직’을 빠뜨리고 성경이 우리 신앙과 삶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키고 후대에 물려줘야 할 ‘오직’의 의미이다.  

 

“진리는 세상을 덮을 만큼 광대하다”

로마가톨릭은 중세 유럽인들의 영혼과 사상과 정치와 사회와 문화,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곧 종교개혁이 ‘사회 전반의 개혁’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원론적 신앙으로 신앙과 생활을,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있다. 신앙의 개혁, 교회의 개혁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킨 종교개혁과 너무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개혁을 통해 정치(의회와 정부)를 변혁시키고, 문화와 예술과 과학에 자유를 부여하고, 자유와 평등의 개념으로 사회와 사람들의 일상을 바꿨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으로, 칼빈의 ‘모든 진리는 성령의 역사’라는 주장으로, 모든 학문은 얽매여 있던 로마가톨릭에서 벗어났습니다.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칼빈의 개혁은 ‘성경적인 총체적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교회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진리는 강하고 광대합니다.”(고신대 손봉호 석좌교수, 서울대 우종학 교수, 성인경 목사)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절대주권을 믿는다면, 성속 이원론과 교회와 세상의 구별은 비신앙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총체성을 회복해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

 

“연대 못한 우리 실수 극복하라”

문화체육관광부의 <2011 한국의 종교현황 조사연구> 자료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는 등록한 교단만 232개다. 교회의 분열은 오늘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의 분열 문제는 종교개혁시대에도 있었다. 성례 문제로 대립하며 결국 분열했던 루터와 츠빙글리는 한 예에 불과하다. 각 지역별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고 가톨릭의 박해가 극심할 때,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서로를 핍박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결국 이런 분열 때문에 유럽의 개혁교회는 연대하지 못했고 불과 100여 년 만에 힘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성례론 그리고 세속권력에 대한 이해차이 등으로 갈등하고 결국 손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 갈등 속에서 칼빈과 부써만이 대화하며 화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개혁교회가 힘을 합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실수를 기억하고 진리 안에서 힘써 연합하세요.”(총신대 라은성 안인섭 교수)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의 문제로 분열했지만, 한국교회는 신학의 차이보다 정치와 권력 문제로 더 극심하게 분열했다. 이제 한국교회가 후대에 물려줘야 할 유산은 연대이고 통합이다.       

 

“개혁신학은 시대와 일상에서 꽃 핀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는 부흥과 침체를 반복했다. 16세기 유럽의 개혁 교회들을 시작으로 청교도를 통한 미국 개혁교회도, 카이퍼를 통한 신칼빈주의도, 그리고 한국교회 역시 그렇다. 왜 침체했는지 살펴보려면, 어떻게 부흥했는지를 이해하면 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의 시대정신과 부합했고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했다. 청교도의 신앙 역시 그 시대 미국의 상황 속에서 생활 규범이었다. 카이퍼는 근대 시대 속에서 칼빈주의를 재해석해 영역주권으로 정부와 사회를 이끌었다. 한국교회 역시 선교 초기와 부흥기에 교육 의료 사회사상 등 새로운 시대와 삶을 제시했다. 개혁신학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칠 때, 영향력이 있었고 부흥했다. 

“칼빈은 신학이 교회와 목회를 위한 것임을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했습니다. 성도들의 삶과 개혁신학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카이퍼는 진화론과 정신분석과 사회주의 이념이 편만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때 카이퍼는 사회주의의 유물론을 적극 반대하면서도,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와 빈부의 격차를 비판하는 주장이 성경에 비춰 옳다고 여겼습니다. 성경과 기독교 가치관으로 시대와 사회를 이해하고, 일상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침체는 세속의 이념(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고 국가의 성장주의에 동조할 때 이미 시작됐다. 세속의 가치로 성경을 대체하면서 교회다움을 조금씩 상실했다. 한국교회가 후대에 물려줘야 할 유산은 성경으로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과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신앙고백> 문서는 김재성 교수(한국개혁신학회장)가 작성한 초안을 바탕으로 수정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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