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3- ② 개혁신학 위에 굳건한가

종교개혁 핵심진리조차 잘못 이해, ‘믿음과 행위’ ‘복음과 율법’ 등 극단적 대치로 심각한 오류 범해

“내 생각에 복음의 가장 큰 적들은 로마의 교황도, 이단도, 유혹하는 자들도, 독재자도 아닌 바로 ‘나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이 무슨 쓸 데가 있겠습니까? 사악한 삶이 도처에 깔리고, 행하는 것이 말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면, 나를 두 번째로 이 도시에서 내치셔서 새로운 망명지에서 고통의 쓰라림을 다스리게 하소서.”

이 말은 제네바에서 쫓겨났던 칼빈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제네바시는 1538년 칼빈이 추진한 개혁에 반발하며 그를 추방했지만, 가톨릭교회에 맞서기 위해 1541년 다시 칼빈을 불러왔다. 제네바시로 돌아오면서 칼빈은 여전히 ‘개혁의 의지’가 식지 않았음을 베자에게 분명히 한 것이다.

칼빈의 말에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복음의 가장 큰 적을 ‘나쁜 그리스도인’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나쁜 그리스도인은 바로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의 그리스도인, ‘말한대로 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다.

이신칭의마저 흔들리는 한국교회

칼빈이 제네바시 개혁을 위해 비판했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나쁜 그리스도인’은 오늘 한국교회에도 존재한다. 일반 비기독교 시민들이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할 때 항상 나오는 것이 ‘신행불일치’이다. 한국 신학계는 오래전부터 그 원인을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핵심 진리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한국교회의 오해는 로마가톨릭의 ‘행위구원’을 비판하면서 시작했다.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면서, 모든 행위는 구원의 여정에 절대 개입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반드시 믿음의 열매인 선한 행위가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조차, “선행이 구원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냐?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냐?”고 공격을 받았다.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극단적인 대립은 비성경적인 주장으로 발전했다. 성경에서 ‘행위’에 대한 내용은 율법 곧 구약의 말씀에 상당히 많이 나온다. 신약의 말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서 구약무용론, 율법폐기론 등 심각한 신학오류까지 나왔다.
반대의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선행이 최종적인 구원에 필요하다’는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 주장은 몇년 전부터 한국신학계에 ‘바울신학의 새로운 관점’으로 불어닥쳤다. 이를 지지하는 성도와 신학자들도 확산되고 있다. ‘바울신학의 새로운 관점’은 영국 신학자 톰 라이트의 주장으로, 마지막 때에 성도를 포함해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기초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는 것이다. 결국 최종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위’가 기준이 된다는 설명이다. 톰 라이트는 그 근거를 고린도후서 5장 10절의 말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를 들고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이신칭의’마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선행은 칭의의 결과로서 필수적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어떻게 교정해 나가야 할까.

먼저 ‘바울신학의 새로운 관점’에 대한 입장은 지지할 수 없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한국신학계와 교회에 톰 라이트의 주장이 확산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고, 이 주장을 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역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좋은 의도인 것을 안다고 말했다. 신행불일치로 비판을 받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톰 라이트의 주장만큼 강력한 신학적 충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잘못된 사상을 수용할 수는 없다. 이승구 교수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믿음 외에 다른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순간, 중세 로마가톨릭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이신칭의’는 루터의 종교개혁 핵심사상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선포로 공고하게 보였던 로마가톨릭의 구원론은 일시에 무너졌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잘못된 ‘이신칭의’ 이해로 신행불일치에 빠지고 말았다. 사진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에 95개조 논제를 붙이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

두 번째로 믿음과 행위를 극단적으로 대치시키는 주장 역시 바로잡아야 한다. 앞서 베자를 통해 전해지는 칼빈의 발언과 같이, 종교개혁자들은 절대 믿음과 행위를 구원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초기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작성한 우르시누스도, 오늘날 모든 개혁교회가 핵심 신앙고백서로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도 믿음과 선행은 대립이 아닌 협력이었다.

이경직 교수(백석대)는 “우르시누스는 선행이 칭의를 가져오는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칭의의 결과로서 선행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분명히 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우르시누스는 선행이 구원에 기여하는 공적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할 열매이며 이를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고 여겼다”고 강조했다.

결국 믿음과 선행은 구원에서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면서, ‘구원에 선행은 아무 역할도 못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반개혁신학적인 주장이다.

율법폐기론의 시대, 무너지는 도덕법

믿음과 행위의 잘못된 대립처럼 한국교회는 대립할 수 없는 것들을 대립시키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믿음과 행위만큼 잘못 대립시킨 것이 복음과 율법이다. 율법을 복음에 대립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율법폐기론’을 주장하고, 나아가 예수님의 복음이 담긴 신약성경만 유효하고 구약성경은 필요없다는 ‘구약폐기’까지 주장하고 있다.

신현우 교수(총신대)는 “현재 율법이 폐지됐고 규범적 효력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율법을 유대인의 도덕법 정도로 여기고 복음의 반대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율법폐지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등을 근거로 내세운다. 혹자는 율법을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구분하고 “모세의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이미 고 정훈택 교수가 <열매로 알리라>란 저서를 통해 오류를 지적한 것들이다. 정 교수는 평생 마태복음과 산상수훈의 말씀에 천착해 연구를 했다. 그는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의미가 절대 ‘율법폐지’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정훈택 교수는 율법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며, 율법보다 더욱 강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 것이지 폐지시킨 것이 아님을 증거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개혁교회가 공통 신앙고백서로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도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제93번부터 무려 153번까지 도덕법(율법)에 대한 의미와 효용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신앙고백서에서 율법(도덕법)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덕법은 인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뜻)이다. 즉 인류에게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개인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전 인격을 다하여, 완전히, 항상 복종하고 순종하도록 지시하시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선포이다.”

‘경건’을 버리고 ‘영성’을 택한 개혁교회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개혁교회로서 회복해야 할 신학사상은 ‘경건’이다. 경건이란 용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순종함으로 이루어가는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경건을 신앙생활의 엄격함 나아가 외식하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반대되는 용어로 영성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대비 역시 오류이다.

‘영성’이란 용어는 2000년을 즈음해 한국교회에 널리 퍼졌다.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가 갖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도 검증하지 않은 채, 그렇게 퍼져나갔다. 일찍이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최홍석 교수는 역사적으로 영성이란 말이 5세기 수도원에서 사용한 단어로, 로마가톨릭을 거쳐 오순절 계통을 통해 한국교회에 유입됐음을 밝혔다. 또한 ‘영성’이란 단어를 강조해서 사용하는 배경에 다른 교회와 차별성을 보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의식이 내재해 있음을 지적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한국교회에 ‘영성’은 더욱 뜨겁다. 영성은 바르고 깊은 신앙을 대변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그 사이 경건은 더욱 설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영성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바로 지나치게 ‘신앙의 내면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개혁신학은 신앙의 내면화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은 경건을 외쳤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로부터 나와 너, 나와 세상의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 모든 것이다. 이 전 과정 속에 나타나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경건이다.”(최홍석 교수 <21세기 교회의 방향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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