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을 시작으로, 평생을 예수를 닮아가고자 가난한 사람들과 온 몸을 부대끼며 함께 울고 웃던 사람 정일우 신부는 지난 2014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보다 앞서 우리나라 도시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 의원이 1999년 별세했다. 이 둘은 청계천 판자촌에서 만나 영적인 스승과 제자이자 신앙의 동반자로,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자 평생의 동지로 함께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이 나라에 경제적 성취를, 각자에게는 부를 가져다줄 거란 자본의 꿈에서 소외됐던 상계동 철거민들도 이들은 함께했다. 또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하던 감독 지망생 김동원이 그들과 함께 <상계동올림픽>을 연출했는데, 훗날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송환> (2004년 선댄스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수상)을 연출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영화 <내 친구 정일우>는 정일우 신부와 함께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생명 운동에 동참한 동지들, 故 제정구 의원과 그의 아내 신명자 씨, 예수회 전주희 수사, 괴산 농민 김의열 씨, 그리고 김동원 감독 본인이 정일우 신부를 기억하는 다큐멘터리다.

존 빈센트 데일리(John Vincent Daly)가 본명인 정일우 신부는 1935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0년에 신학생 신분으로서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한창 군부독재 시절이라 학생들이 데모하다 경찰에 연행되면 그들의 석방을 위해 단식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 적이었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1인 시위에 참여도 했다.

1972년 본격적으로 유신시대가 도래하자 더 이상 학교 안에서만 입바른 소리로 가르치는 게 무의미하다 여겨 학교 밖으로 나갔다. 가진 자들과 위정자들이 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하지만 정반대인 현실을 보면서 가난한 자들에게서 희망을 찾아 나섰다. 사람이 가난해지고 가장 낮아져야지만 하나님에게로 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낮은 자들을 찾아 나선 곳이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찾아온 이의 상처 입은 이야기와 고민을 ‘발끝’으로 들어주곤 하였다. 발끝을 세우리만치 온 몸으로 듣고 본인도 그 상처에 동화되어 펑펑 울곤 하였던 것이다.

평소 놀기를 좋아하고 장난기 넘쳤던 정일우 신부는 청계천 판자촌 쪽방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아이들과 놀기를 즐겼다. 말 그대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 속에서 평생을 함께할 동지 故 제정구 의원을 만났다. 판자촌이 철거되자 그들은 다시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양평동마저 철거되자, 정일우 신부 일행은 본격적으로 철거민을 위한 이주 대책에 나선다.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융자를 얻어 경기도 시흥에 땅을 마련하고 ‘복음자리’ 공동체를 철거민들과 직접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은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 의원에게 집 지어 팔아먹으려는 건설‘업자’가 아니냐는 의심의 화살을 돌렸다. 여기에 정일우 신부는 때론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를 붙든 것은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믿음이었다. 이후 상계동 철거민 운동을 거친 후 농촌으로 돌아가 사람을 살리는 생명 운동을 전개한 정일우 신부는 죽기 전까지 사람의 가장 낮은 모습인 치매를 본인 스스로 나타내면서 까지 예수 닮기를 실천했다.

영화 <내 친구 정일우>에선 내레이터나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자막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관객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정일우 신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따라가고 싶은 연출자 김동원 감독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필름포럼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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