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오직 주만 영광받으심 Soli Deo Gloria

 

힘써 하나님을 알자(창 1:1-5)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마 24:1-2)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 계십니까?(요 3:28-30)

계속되어야 할 종교개혁(롬 1:16-17)

역사의 교훈(고전 10:6-11)

 

 

힘써 하나님을 알자

심욱섭 목사(해운대제일교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1-5) | 찬송가: 440장, 585장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문제들은 ‘바르지 못함과 미성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바른 믿음,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명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과 삶의 모습을 결정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른 믿음이요, 그 믿음만큼 삶이 변화됩니다. 왜 사람들이 잘못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누구 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과 삶의 모습을 결정 합니다.

 

언약의 하나님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라함이 부족 연합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승리를 거두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밤에 급 습하여 승리했지만, 대적들이 다시 연합하여 쳐들어온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고, 나와 함께 거하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되나?” 이렇게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나님은 장차 있을지 모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전쟁을 피하여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과 삶의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문제를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묵상하십시오.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들 중 하나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적과 기사들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너무 쉽게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면, 평생 동안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쉽게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습니다. 믿음의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신이신데 하나님을 신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잘못된 믿음과 삶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과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시편 46편에 보면 기막힌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 시편 기자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1-3).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풍랑이 몰아치는 환난과 역경이 찾아온다 해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시편 기자로 하여금 그러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한 것입니까? 시편 46편 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과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변화되는 복을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어떠한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가십시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찾아 알아가십시오. 인생에 찾아오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삶이 변화됩니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절). 하나님은 낮과 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십니다. 모든 영역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질문합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시며 모든 영역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십시오.”

오늘날 심각한 문제는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교회 혹은 종교라는 영역 안에 제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는 참 좋은 교인인데, 가정이나 직장, 사회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서는 참 좋은 교인으로 다른 교인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돌아가면 배우자에게 폭언을 합니다. 자녀들에게 함부로 함으로 상처를 줍니다. 교회 안에서는 겸손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할 때는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갑질을 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충성됩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상사의 눈치나 보며, 대충 시간을 때우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할 때에는 이중장부를 기록합니다. 임금을 체불하고 직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임금을 떼먹기도 합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언약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을 교회와 종교 영역 안에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교회 안의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 교회와 가정과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과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종교 영역에만 제한시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정치, 경제, 예술, 과학, 문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어진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하는 모든 일, 가정의 일, 직장의 일, 사업장의 일, 시민으로서의 역할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업장에서도, 그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거반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반이라는 말의 뜻은 ‘거의 절반’입니다. 거의 절반은 그리스도인이고 거의 절반은 비그리스도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인데 교회 밖에서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종교 영역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종교 영역 밖에서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입니다. 주일에도 평일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제직 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통의 전화가 제게 걸려왔습니다. “저는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입니다. 섬기시는 교회에서 제직 선거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개 씨가 후보로 정해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직장동료인데 그 사람 직장에서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를 생각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내가 혹시 교회 안에서만 좋은 교인을 만들어내는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직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 좋은 교인이었지만, 세상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나누어지지 않은 사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모습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나누어지지 않은 사람,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금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단과 교회에서 여러 가지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본받자고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 지역을 탐방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기리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올려드리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는 것입니까? 교단과 교회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진행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종교행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재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까? 은사가 부족하고 훈련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너무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와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십니다. 모든 영역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로렌스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로렌스는 신학자도 아니고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도 아닙니다. 1666년 55세가 되던 해에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칼멜 수도원에 평신도 수도사로 입회하여 수도원 부속병원의 부엌 취사장에서 일하며 25년을 보내고 80세에 세상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로렌스를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 후반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일하는 때나 기도하는 때나 차이가 없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부엌일을 하면서도 나는 마치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일을 감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취사장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거룩한 일임을 알고 기뻐하며 그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이것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가정에서의 가사일, 직장에서 주어진 일, 사업장의 일, 사회에서 시민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감당하는 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일을 주님의 일로 알고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직장과 그렇지 않은 직장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월급을 많이 주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직장은 좋은 직장으로, 그렇지 않은 직장은 좋지 않은 직장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소위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하고, 상대적으로 알아주지 않는 직장에 들어가면 복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죄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모든 일이 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직장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일로 알고 기쁨과 최선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른 새벽마다 길거리를 청소하는 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왜 새벽마다 거리를 청소하는 것입니까?” 첫 번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좀 더 나은 직업을 얻기까지 기반을 닦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주어진 일을 하고 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로 알고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이요,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알고 영광 올려드리기

호세아서 6장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당시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각종 종교의식에 참여했고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니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님께 돌아가자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럼에도 호세아 선지자가 이렇게 외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상도 섬겼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을 떠난 자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여기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해 볼 때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인데 세상에서는 비그리스도인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핑계를 대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손해를 보고 멸시를 당하게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 적당히 타협하여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겨야지.” 하나님의 자녀임을 포기하고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 패배감 속에서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동일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믿음과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1-2) | 찬송가: 351장, 585장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전기요금이 엄청나게 싼 이유는 원자력을 이용해서 발전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원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이 유는 만일 우리나라에 지진 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원전이 파괴 되어 방사능이 흘러나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전보다 훨씬 더 엄청 나게 위험한 시설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태양보다 몇백만 배 더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성전에 모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말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능력으로 광야 40년을 살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했으며 요단강을 마르게 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나 도덕적 타락으로 성전을 오염시켰을 때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저주가 흘러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다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같은 지도층 사람들은 성전을 이용해서 엄청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면서 “너희들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는 전부 소형화된 성전이며 원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를 돈이나 야망이나 욕심으로 더럽히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나오게 됩니다.

 

거짓된 종교의 위험성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건물이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초라했는데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해롯 대왕이 성전 공사를 얼마나 대대적으로 벌였던지 예수님 당시에 이미 46년에 걸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후에도 계속되어 총 82년에 걸쳐서 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성전이 웅장하게 설계가 되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님, 이 성전 정말 대단하지요. 아마 전 세계에서 이보다 더 웅장한 성전은 없을 겁니다. 정말 우리 민족의 신앙은 대단한 것 같아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이 성전의 외모를 보고 자랑하느냐? 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하게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몰려와 짐승을 사고 돈을 바꾸어서 제사를 드리고 헌금을 바쳤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대부흥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죄와 탐욕으로 오염이 되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짐승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노끈을 만들어서 소나 양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탁자를 엎으시면서 “이것들을 여기서 다 가지고 나가라! 성경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라는 말은 “너희는 지금 이 성전을 헐고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겁도 없이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오직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즉 죄인들이 와서 회개하여 죄 씻음 받고 새 인생을 받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종교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종교 이벤트를 하는 곳도 아니고 종교 쇼를 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죄 씻음 받고 병 나음을 받으며 새 인생을 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오직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위력이 있는 이유는 거기에는 원전의 백만 배도 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이 겁도 없이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오염되게 되면 거기서부터 강력한 저주가 나오게 되는데 결국 자신들도 죽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외모의 화려함이나 웅장함이 아니라 얼마나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자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7).

어떤 성전이 참된 성전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덩치만 거대하고 거짓된 만족감을 주는 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잃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바로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우상은 돈이었습니다. 즉 성전에서 대제사장이나 모든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서 돈을 벌거나 권력을 가지려고 하고, 종교가 세상적인 성공 신화에 미치려고 할 때 이것은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멸망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교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원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교회가 대형화되고 기독교인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교회가 엄청나게 돈을 가지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 강대상에서 버젓이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를 듣게 되고, 예배당을 아주 화려하게 짓고 난 후에 예배가 쇼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하고 새 인생을 받는 곳이 되어야 하며 사람이 변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공이 강대상 위에 올라가 서 있고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며 종교인이 권력까지 가지려고 할 때 그 신앙은 거짓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신앙은 우리를 위기에서 지켜주지 못합니다.

 

영적인 분별력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예수님,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고 하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군요.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저희들이 알 수 있는 징조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예수님은 그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의 징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4-5절). 가장 무서운 것이 많은 설교자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 또는 주님의 종이라 하면서 엉터리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이야기하고 능력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추종합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보면 갈릴리 출신의 무식한 제자들도 얼마든지 미혹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선지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사가 강대상에서 성공을 이야기하고 교인들이 모두 성공에 도취되려고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절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징조는 불법이 만연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이기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성공하면 할수록 더 이기적이 되어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로만 좋은 것을 다 포장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금만 사랑하면 사고를 막을 수 있고 죽는 것을 막을 수 있는데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의 말도 쉽게 믿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6, 7절에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소요가 터지며 전쟁이 터지려고 하는 것으로 너무 겁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히려 우리를 깨우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들어서 세상에 빠져 들어갈 때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난리나 재앙들입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에 취해서 졸다가 번쩍 정신이 들어야 합니다. ‘아, 내가 세상에 빠져서 잠이 들었구나! 정신을 차려야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지금 우리는 자주 지진과 같은 재난 소식과 테러의 소식을 들으며 전쟁의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우리가 잠에서 깨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생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17절).

지진이 일어날 때 집 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을 챙기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이 뒤로 물러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진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내가 있는 곳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18절)라고 했습니다. 일분일초가 급할 때 겉옷을 찾으러 집에 갔다가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오직 목숨만 건지면 되는 것입니다. 위험할 때는 목숨만 건질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 중에서는 자존심이나 체면 같은 것을 다 버리고 결단을 내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라는 타이틀, 권사라는 타이틀 다 버리고 자기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19절에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부인과 젖먹이가 있는 부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실까요? 물론 임신을 해서 빨리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고 젖먹이가 있어서 우는 바람에 도망치다가 들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처녀가 가장 좋고 할머니가 더 낫다는 뜻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으면 안 된다는 말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을 버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롯의 처는 도망을 치다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지 않았습니까? 돈이 있어도 난리가 나면 아무 소용이 없고 차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이 내가 의지할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격려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믿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난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2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체가 있으면 독수리가 덮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고 깨어 있다면 독수리는 빙빙 돌면서 덤벼들지 못합니다. 이 독수리가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독수리는 덮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위하여 그날을 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를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2절).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이 깨어 있으면 얼마든지 그날을 감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어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그 복음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만민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증거되고 있고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동안 독수리는 덮치지 못합니다. 지금도 계속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직 살아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도 없고 복음이 듣기 싫어서 귀를 틀어막고 욕을 한다면 그는 죽은 것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즉시 심판의 독수리가 덮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고 하셨습니다. 우리 구원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구원이 다 끝난 것처럼 느긋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할 시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끝까지 깨어서 잘 견디어 사탄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 계십니까?

김대훈 목사(초량교회)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한복음 3:28-30) | 찬송가: 314장, 94장

미술대 교수가 한 학생을 꾸중합니다. “너의 그림을 봐. 악센트(강조점)가 어딘지 알 수 없잖아. 다시 그려!” 학생은 교수의 불같은 꾸중에 다시 도화지를 펼치고 ‘어디에’ 혹은 ‘무엇에’ 악센트를 줄지 고민을 하고선 마침내 칭찬을 들을 만한 훌륭한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디에 악센트를 찍어라.”는 말을 들을 때 가 있습니다. 가끔 듣지만 참 중요한 말입니다. ‘악센트’란 옷, 건축, 도안 등의 디자인에서 전체 중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악센트를 둔다는 말은 그 부분을 강조한다는 말이 됩니다. 악센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모양과 느낌과 본질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과거 중고등학교 시절의 영어 시험에는 악센트를 묻는 문제가 꼭 나왔습니다. 악센트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지요. 악센트의 위치에 따라서 뜻이 달라지는 단어도 많이 있고 또 악센트 위치가 틀리면 다른 사람이 아예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출제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찍혀진 악센트를 따라 발음을 하면서 단어를 외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영어단어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악센트가 있어야 합니다.

 

낙타털 옷을 입은 사람

본문의 주인공은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도 한 사람의 인간일진대 그의 삶에 악센트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디에 삶의 악센트를 찍고 살았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 례 요한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과 사역의 악센트는 예수님께 찍혀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4-7). 이 말씀에는 엘리야를 연상하게 만드는 복장, 과감하고 용맹한 회개 촉구, 종교 지도자의 부정에 대한 신랄한 책망이 그려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생겨났으니 요즘으로 치자면 엄청난 ‘팔로워’(follower)들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몰려온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요 1:19)라고 물었습니다. 몰라서 물었다기보다는 이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 명성, 풍기는 포스, 사역의 성공, 수많은 팔로워들 같은 모든 증거들이 이 사람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요 1:20). 세례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악센트가 분명했으니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말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했을 때 따라오는 그 수많은 영광과 성공을 상상해보면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악센트를 분명히 찍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요한복음 3장에 이릅니다. 세례 요한의 인기와 명성은 사그라지지 않고 여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회개, 죄 사함,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야말로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세례 요한을 따랐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장면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고서 다급하게 그리고 조금은 못마땅한 마음으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즉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에게로 간다고 보고했습니다. 한 둘이 아니라, 몇 퍼센트가 아니라, 전부 다 예수께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두 가지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충격입니다. 얼마 전까지 그들의 스승을 찾아오던 사람들이 어떻게 모두 예수님께로 갈 수 있는가? 충격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스승인 세례 요한에 대한 불만 아닌 불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가만히 계십니까? 모두가 예수님을 찾고 따르는데 대책은 안 세우십니까?” 이런 뉘앙스의 보고였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이 한 말이 걸작입니다.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8절). 세례 요한은 또 한 번 악센트를 분명하게 찍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걸작이요 감동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말과 태도와 행동의 모든 악센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찍혀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악센트가 예수님께 찍히도록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자기와 예수님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

 

누가 주인공입니까?

예수님은 신랑입니다. 주인공입니다. 이 광야의 주인공이요, 역사의 주인공이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의 주인공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신부는 예수님을 찾아 모여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취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나’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라고 표현합니다. 신랑의 친구는 단순한 친구나 들러리 정도가 아니라 신랑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기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참으로 놀랍고 훌륭하지 않습니까? “나는 신랑(주인공)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입니다.”라는 그의 말이 얼마나 신선하고 멋집니까? 세례 요한은 인생과 사역의 악센트가 분명하였습니다. 영광과 존귀는 신랑이 차지하고 신랑 친구인 자기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절).

‘쇠하다’는 말의 원어는 ‘줄다, 감소하다, 열등하다’는 의미입니다. ‘흥하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자라다, 성장하다, 증가하다’입니다. 즉 내가 비록 줄고, 감소하고, 못해진다고 할지라도 신랑이신 그분 예수님이 자라고 증가한다면 그것이 나의 기쁨이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악센트는 분명했습니다.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분의 종이며, 자기는 주인공 신랑이 아니요 신랑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내가 쇠할지라도 그분 예수께서 흥한다면 그것이 세례 요한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세례 요한이 악센트 찍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악센트를 주님께, 신랑에게 두고 찍는 것을 보십시오. 살아가면서, 직분을 맡으면서,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우리는 어디에 악센트를 찍습니까? 예수보다는 다른 단어에 찍을 때가 참 많았습니다. 만약 예수보다 ‘나’와 ‘내가’에 악센트가 늘 있다면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나의 영과 믿음도 건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 영이 살려면 악센트 찍기를 바로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려면 악센트 찍기를 바로 배워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바로 배워야 합니다. 수많은 유혹들이 펼쳐지겠지만 바로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악센트 찍기가 예수의 십자가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인간으로 오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창조자이시요, 모든 것이신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악센트를 성부 하나님께 찍으셨고 자신에게는 어떤 악센트도 없도록 비우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라는 자리와 위치를 절대로 넘지 않았습니다. 비결은 “나는 아닙니다. 내가 아니요 저분 예수십니다.”라고 악센트를 분명하게 찍는 것입니다.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청탁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막으시고 또 막으십니다. 그래도 발람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를 막아서십니다. 발람의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선 것을 보고 멈춥니다. 발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귀를 때립니다. 그러자 두렵게도 나귀가 말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민 22:28). 발람은 그제야 어리석은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조금은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지자면 나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의 구전에 의하면 발람의 그 나귀는 바로 죽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자가 바로 죽입니다. 이유가 충격입니다. 나귀가 “나는 말하는 나귀요”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했답니다. 악센트가 ‘나는 말하는 나귀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말하게 하신 ‘하나님’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요, 우리가 주의 백성이라면 평생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 금지를 명령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 하나님께서는 왜 우상 숭배를 그렇게 싫어하시고 미워하실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대답은 종교적 측면이 아닌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 한 분만이 받으실 수 있습니다. 결국 우상 숭배라는 것은 그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궁극의 이유입니다. 오늘 주제로 말하자면 하나님께 찍혀져야 할 악센트가 절대로 다른 것에 찍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찍혀져야 할 악센트가 다른 어떤 것에 찍혀진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얻어 주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우리의 말과 태도와 삶에서의 모든 악센트가 주님께 찍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로 살고 십자가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주님이 살고, 내가 낮아질 때 주님이 높아지시고,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주님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세례 요한처럼 삶과 일에서 악센트를 분명히 찍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명예에 악센트를 힘주어 찍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크게 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 7:28)

우리 모두 세상 보기에 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람이 됩시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세례 요한이 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과 사역과 직분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나는 줄어들고 작아지더라도 주님의 이름에 모든 악센트를 찍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며 큰 사람입니다.

 

 

계속되어야 할 종교개혁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7) | 찬송가: 585장, 357장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이후부터 세계는 기독교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비잔틴 시대가 열렸습니다. 비잔틴 시대가 열렸다는 말은 콘스탄 티노플을 중심으로 기독교 중심의 세계와 문화가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전 소아시아와 헬라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인도, 스페인, 게르만족,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기독교 복음의 황금시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교회는 점점 이상한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권 전쟁의 대두였습니다. 온 천지에 복음이 편만하고 교회가 가득하게 됨으로써 교회의 감독 제도는 자연히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농촌보다는 도시에서 또 도시보다는 대도시에서 더 치열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총감독권은 로마교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

이것이 결국 로마 교황 전권 시대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 천년에 가깝도록 로마 총감독은 교황이 되어서 종교와 교육,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천년의 역사 동안 교황청은 가공할 만한 역사적 오류와 죄악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로마가톨릭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은 사실상 땅에서 하늘까지 사무쳤습니다. 먼저 신론에 있어서 유일신인 하나님을 범신론적인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분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 말고도 수많은 구세주의 구원을 기다렸습니 다. 예컨대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로부터의 구원과 보살핌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또한 오직 믿음으로써의 구원이 아니라 사람의 공덕을 축적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신득의가 아니라 이행득의를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의 완전주의를 내세울 뿐만 아니라 성경과 종교회의를 동등시했습니다. 아니 성경보다 교회의 결의를 더 앞세우고 우선시했습니다. 잘못된 내세관은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도 생존자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여러 번의 구원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66권의 정경 외에 외경과 가경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뿐입니까? 교황 무오설, 마리아 무죄 승천설과 경배 사상을 가르쳤고 성상 숭배, 성화 숭배, 성골 숭배, 천사 숭배 등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미신과 우상, 유물 숭배 사상이 판치게 했습니다.

물론 거짓 유품들이겠지만,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뽑아 왔다는 볏짚,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나무 파편,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 면류관,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등과 같은 유물을 숭배하는 행위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소유하면 병도 고침 받고 하나님의 은혜가 저절로 임한다는 미신적인 행위가 난무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성인의 날이 있었는데 각처에서 온 순례객들은 성인들의 유골과 그들이 입었던 의복에 입을 맞추려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갖가지 유골들과 의복 앞에 입을 맞추고 거기에 기도를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가톨릭교회는 그렇게 미신화되고 미신 종교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성베드로 성당의 완공을 위한 막대한 공사비 충당을 위해 속죄권을 판매하고 있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백 년 동안 이끌어왔던 막대한 공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로마가톨릭에서는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원들을 모집하여 판매하도록 했는데 당시에 면죄부 판매를 가장 잘했던 사람이 테젤이라는 수도사였습니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웅변가요 학자로 유명하던 그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여기 면죄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이 거룩한 속죄부가 보이지 않습니까? 이 한 장이면 당신은 물론 당신 부모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옥에서 절규하고 있는 부모님의 고통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속죄부를 사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즉시 용서를 받을 것이요, 지옥에 있는 부모님 역시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똑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바로 천국에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속죄권을 사십시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그렇게 말씀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때 로마 교회의 타락과 부패의 모습을 보면서 갈등하며 괴로워하던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마틴 루터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제들은 로마가톨릭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말없이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죽은 제도와 전통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더구나 교황청이 사치를 일삼고 음란에 빠지고 부패해 가는 데 대해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의 그릇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들은 “성경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너무나 많다”라고 교만에 떠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가톨릭은 은과 금은 많지만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고 하면서 교황청을 비난하고 공격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돈이 많았습니까? 당시에는 성직 매매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성직을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당시에 신부들 중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돈으로 대주교직을 샀지만 어떤 사람은 죽어서야 성당에 들어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타락상과 부패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그래서 루터는 밤마다 성경의 책장을 넘기며 분노와 통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로마 가톨릭이 행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너무도 다른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침묵하고만 있는가? 로마가톨릭은 왜 이렇게 타락해 가고만 있는가?” 그가 성경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로마 교황청이 성경과 믿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부패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들은 사치하고 방탕하고 음란에 빠져 갖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거룩한 분개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루터가 어느 날 스칼리 산타라는 계단을 올라가는 중에 갑자기 로마서의 말씀이 섬광처럼 그의 심장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루터는 “의인은 속죄부나 마리아 숭배 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 이 계단을 오른다고 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을 결심하고 속죄부 판매를 비롯한 로마가톨릭의 모든 잘못된 악행과 관습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있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골자는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솔라 피데’,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둘째, ‘솔라 그라티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입니다. 넷째, ‘솔리 데오 글로리아’,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평범한 신부에 불과한 루터가 이런 주장을 하면서 절대 권력이었던 교황청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자 로마가톨릭은 루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하고 달래 보기도 했습니다. “너의 주장을 취소해라. 그러면 너를 승진시켜 주겠다.” 그러나 루터는 그런 것에 회유당하지 않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오히려 더 교황청의 잘못을 지적하며 오직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무섭게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너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추방해버리겠다. 일개 수도사에 불과한 네가 감히 로마 교황청에 도전을 하다니! 너는 완전히 파면이고 추방이다! 너는 이제 발붙일 곳도 없으리라.” 교황청에서는 독일의 국왕과 보름스 국회에까지 압력을 넣어 거기서도 루터를 파면시키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절대로 굴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교황청은 최후로 루터가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정말로 파면할 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교황이 직접 칙령을 써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수들과 학생들 앞에서 교황의 훈령과 칙령을 불로 태워 버리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지 당신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인다고 하여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목숨은 로마 교황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하여 평상시에 즐겨 불렀다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우렁차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자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일급 지명수배자가 되어 언제든지 잡히면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루터도 사람인지라 너무 현실이 암담하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로마 교황청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어느 날 상심하여 큰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는 루터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가 캄캄한 밤에 검은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왜 이렇게 늦은 밤에 상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오?” 그러자 카타리나가 “우리 하나님이 죽어 버렸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루터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돌아가실 수 있단 말이오. 누가 감히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하는 거요!” 그러자 카타리나가 말하길 “여보, 만일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던 당신이 이렇게 한숨만 푹푹 쉬고 있겠어요?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절망에 빠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당신이 그렇게 실망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루터가 이렇게 말하며 힘을 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죽긴 왜 죽어요? 내가 잠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을 바라봤소. 이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나겠소.” 이런 지혜로운 아내의 격려와 영적인 지지로 루터는 다시 일어나 담대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이렇게 루터는 아주 외롭게 싸웠습니다. 홀로 고독였지만 당당하게 싸웠습니다. 그 후에 칼빈이 등장하고 녹스와 츠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그의 뒤를 이으며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화산같이 타올라 오늘의 개신교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계속 진행되어야 할 개혁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그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우리 개신교인들은 가장 말씀 중심적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본질적인 믿음을 잘 고집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루터가 외쳤던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계속되어야 할 종교개혁은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신학과 제도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오직 복음의 본질을 붙잡았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복음을 선포하면 무조건 엎드려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심령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제도화되어 있고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화석화된 제도가 본질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이나 교권, 제도권 안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루터가 외쳤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왕 되시는 성경적 교회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을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라는 말은 교회는 항상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서로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하고 왕 노릇을 하려고 하니 다투고 분열하며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의 개혁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의 흐름은 이상하게 믿음보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본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성도들일수록 선행을 해야 하고 교회도 세상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도 무언가 선한 행위를 세상에 보여주는 압박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교회는 높은 도덕성을 갖추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인하여 공덕주의와 선행주의가 복음보다 앞서고 믿음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로마가톨릭도 타락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도 선행이나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기독교와 일반 종교와의 차별성이 없어집니다. 기독교 외에 모든 종교들은 선행을 강조하고 공덕을 강조하지만 우리는 오직 믿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오직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 3:30).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고 주님이 왕 되시는 교회론을 회복하고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새로운 희망이 있고 다시 한 번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500년 전, 한 젊은 사제를 부르셔서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를 개혁하게 하신 하나님!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기독교 아래서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우상을 섬기고 성상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솔라 피데(오직 믿음),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솔리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 기독교는 많은 세인들로부터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국민의 51%가 한국교회를 믿지 않는다는 참혹한 현실을 맞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과 말씀의 본질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이바지를 하고 정신적・영적 동력이 되었지만, 어느새 물량주의, 세속주의에 함몰되어 귀족의 옷을 입고 부패하였으니 어찌 가슴을 치고 옷을 찢으며 주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제 한국교회가 다시 개혁의 첫 새벽을 깨우게 하옵소서. 종교개혁자들이 아드 폰테스를 외치며 신앙의 근원과 본질로 돌아가자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과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개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을 높이는 제2, 제3의 루터와 칼빈이 되게 하옵소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경의 거울에 비추며 이 시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는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타오르는 불씨가 되고 향기로운 꽃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역사의 교훈

조병우 목사(김천제일교회)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 라(고린도전서 10:6-11) | 찬송가: 377장, 335장

사도 바울은 지상교회를 향해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광야의 이스라엘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는 교회를 향해서 주는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6절 말씀에 이스라엘 역사는 교회에 주는 본보기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본보기’를 ‘거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교회 역사와 구조적으로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과거 번역에는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경고하기 위해서 기록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일에서 교훈을 받지 못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그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처럼 과거의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중요한 교과서이자 경고입니다. 성경이 주는 역사의 두 가지 교훈은 바로 본보기와 경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귀한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너무도 불행한 역사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범하는 잘못 가운데 가장 무서운 잘못은 바로 자기가 살아가는 그 세대와 역사에 대 해서 죄를 남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살아가는 세대 속에 자기 죄를 심어놓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사람이 자기 세대에 심어놓은 그 사람의 삶과 죄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

첫째는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고전 10:1)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구름 아래 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광야를 행진할 때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보내 신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이 그 들의 행진을 매일매일 보호했습니다. 뜨거운 사막의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약 이 구름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은 사실이 이스라엘 찬송 가운데 있습니다. 시편 105편 39절은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 로 밝히셨으며”라고 찬송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 구름의 역할을 덮개라고 했습니다. 즉 지붕과 같은 역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 햇볕의 강렬한 더위로부터 지키는 천막 역할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사막은 일교차가 가장 심한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은 여름처럼 덥고 밤은 겨울처럼 춥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매일 반복됩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보호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느끼는 자기 삶에 대한 가장 직접적 신앙에 대한 고백은 매일매일 나의 삶에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는 이 구름 덮 개에 대한 감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감사를 잘하면서도 매일의 삶에 대해서는 별 생각 없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적인 기쁨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일반적인 은총에 대 해서는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 운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사실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은혜라는 것은 자녀의 가장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져 있습니다. 착한 자녀일수록 그것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시간을 부 모가 다 자신을 위해 애쓰고 희생하는 시간이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녀는 일상적인 것은 아예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교회의 일상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교회 입니다. 교회가 누리는 가장 큰 은혜는 매일매일의 일상에 대한 성도들의 감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일에 실패한 교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 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최대의 난관은 홍해 바다였습니다. 바다를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 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시고 그 바다를 열어 주심으로 그들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생의 행진에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돌파할 수 없 는 홍해 바다가 있습니다. 이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을 바울 사 도는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홍해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 아난 세례적 의미가 있고, 이 세례를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홍해 사건이 세례로 해석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은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 소속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례 는 두 가지 연합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과의 연 합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과의 연합입니다. 이 말씀이 아주 중 요한 것은 세례 받은 사건을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홍해를 건넌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인생이 하나님 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가운데는 홍해를 건넌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찬송하고 있는 시가 있습니다. 시편 136편 13~15절에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 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은혜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 넌 그 사건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면 다시 애굽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1~22절에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구원의 사건은 한 번 이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면 광야를 건너갈 수 없습니다. 광야 교회는 바로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셋째,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고전 10:3-4)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는 양식도 없고 물도 없습니 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양식과 물로 광야를 지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과 음료를 마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이었습니다. 이 은혜 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낮추 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 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사람들은 보통 애굽으로 인하여 감사 를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먹었던 것만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 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에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말씀과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는 세상에서 내가 누렸던 것으로만 감사하려고 합니다. 애굽에서 누렸던 것을 주시면 너무도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마음 아픈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로부터 받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고, 끊임없이 세상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실패하는 사람의 변명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실 은 애굽에 대한 그리움에 있습니다. 애굽을 포기하지 못하는 변명인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면 결국 세상의 것들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애굽에 서의 삶 가운데 둘을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를 마시면서 그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애굽의 것을 그리워하다가 망한 이야기가 교회에 주는 교훈이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한 인생의 삶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고 자신의 욕심에만 집착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운동선수의 삶으로 혹은 군인이나 농부의 삶으로 비유한 이유는 그 삶의 공통점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육신은 그 것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강할수록 그 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유혹이 강한 것들입니다. 사람에게 불행한 일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은 그 일로 인하여 행복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사람은 그 일로 인하여 오히려 해야 할 일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학생에게는 공부가 해야 할 일이고 노는 것은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 나면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포기해도 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 듣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의 말씀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 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충동하여 해 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성경에 성령의 사람과 육신에 속 한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따라 사느냐 아니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할 것

6절 말씀에 “이러한 일은 우리들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 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 이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 여금 그들의 악을 보면서 그것을 피하라고 역사를 주셨다는 말 씀입니다. 역사는 본보기입니다. 이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 다. 역사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배워야 하지만 죄를 보면서 그것 의 두려움을 또한 배워야 합니다. 조상들의 죄를 보면서 우리는 죄의 교훈을 배웁니다.

사람들이 죄악을 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성경은 죄에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범하면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광야 교회가 빠진 시험이 바로 이러한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이 죄악에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우리 가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고 큰 복을 받아도 죄악에 빠지게 되면 내가 받은 은혜는 잃어버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병든 것과 같습니다. 사고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가장 깊은 상관관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것이 죄의 권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죄를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 숭배입니다. 바울은 출애굽기 32장을 배경으로 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 우상 숭배의 죄를 교회가 빠지기 쉬운 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지도자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아론은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로 인하여 깨어지게 됩니다. 모든 교회의 지도자는 내가 모세와 같은 지도자인가 아니면 아론 같은 지도자인가를 항상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음행입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의 말씀을 두고 하시는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음행하다가 하루 에 이만삼천 명이 죽은 사건은 발람 선지자의 술수에 빠져서 음 행에 빠졌다가 죽은 사건을 두고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죽은 이유는 모압 여인들과 집단 음행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무너뜨리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군중화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군중에 끌려가지 않고 그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도시 문명이나 이 세대의 개방성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타락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왔습니다. 죄는 집단에 의해서 쉽게 물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만삼천 명이라는 것은 공론화된 범죄의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언제나 군중이라는 숫자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음행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한 사람의 죄악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풍속과 문화 가운데 있는 죄악임을 보여주기 위함 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민수기 21장의 사건을 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가 싫어졌습니다. 박한 식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 인도했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것 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주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시 78:17-18). 우리가 삶의 문제를 통해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필요한 양식과 일용할 것을 주시지만 어떤 경우에도 탐욕을 채워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넷째는 원망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항상 두 가지만 있습니다. 원망하고 싶은 자들에게는 원망할 수 있는 환경이고 찬송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찬송할 수 있는 환경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원망하기 좋은 이유도, 찬송하기 좋은 이유도 됩니다. 신앙인에게는 항상 어떤 환경인가의 문제보다 그 환경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환경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환경보다 자신의 자세를 언제나 먼저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충분한 본보기를 갖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우상 숭배로, 타락으로, 불신앙과 세속주의로 기울어져 있었으며 그로 인해 세 상은 함께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중심주의에 서 떠나 인간중심적인 사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잘못을 직시하고 교회는 돌이켜 위대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우리 역시 역사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끊임없는 개혁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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