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오직 믿음 Sola Fide
4장 오직 믿음 Sola Fide
  •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 승인 2017.10.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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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오직 믿음 Sola Fide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왕상 6:14-22)

오직 믿음으로(요 5:37-47)

솔라 피데 크리스천(행 20:26-35)

위대한 편지(롬 1:8-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갈 2:11-21)

믿음의 본질(갈 2:16)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중략)...솔로몬이 정금으로 외소 안에 입히고 내소 앞에 금사슬로 건너지르고 내소를 금으로 입히고 온 성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열왕기상 6:14-22) | 찬송가: 208장, 552장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중요한 재료가 금입니다. 빛과 불변 그리고 순수함을 상징하는 금이 매우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금으로 곳곳을 입혔습니다. 이 금을 입힌 성전의 의미를 성경에 근 거하여 살펴봅시다.

 

금을 입힌 성전

언약궤를 두기 위한 내소 즉 지성소는 금으로 입혔습니다. 이 지성소에 사용된 금이 육백 달란트입니다. “또 지성소를 지었으니 성전 넓이대로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도 이십 규빗이라 순금 육백 달란트로 입혔으니”(대하 3:8). 금의 양은 약 2만kg으로 추정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금을 사용하여 성전 곳곳을 금으로 입히고 금으로 많은 기구들을 장식하였습니다. 22절은 “온 성 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 금장식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30절에서 “내외 성전 마루에는 금으로 입혔으며”라고 하였고, 35절에서 “그 문짝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그 새긴 데에 맞게 하였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뒤에 가도 계속 이어집니다. 성전의 기구도 금을 사용하고 문의 돌쩌귀까지 금이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7장 48-50절에서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모 든 기구를 만들었으니 곧 금단과 진설병의 금상과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씩 둘 정금 등잔대며 또 금꽃과 등잔과 불집게며 또 정 금 대접과 불집게와 주발과 숟가락과 불을 옮기는 그릇이며 또 내소 곧 지성소 문의 금 돌쩌귀와 성전 곧 외소 문의 금 돌쩌귀 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금은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귀한 것을 하나님의 성전에 사용하였습니다. 귀한 금으로 성전을 치장하여 성전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한 의도였을 것 입니다. 그렇게 건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금보다 귀하게, 성전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기에 금을 드리고 금으로 치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가장 귀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성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주님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예배입니다. 그분이 그리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가 우리에게 가장 귀 한 것입니까? 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집니까? 그런 가치관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예배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주님보다 더 귀한 것 이 없다면 우리는 금으로 장식된 성전을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금을 드리는 마음

그런데 이 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금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한 금으로 성전을 치장할 수는 없습니다. 금을 사랑하는 사람은 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이 죽기 전에 드린 금을 살펴봅시다. 역대상 29장 3-5절에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성전 벽에 입히며 금, 은 그릇을 만들며 장인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하는지라”라고 나옵니다. 왜 이렇게 금을 드렸을까요? 성전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29장 3절에는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이 이렇게 많은 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엄청난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이런 고난과 재난, 역경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그 고백이 시편에 남겨져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였기에 그는 하나님의 전을 지을 생각을 했고 그것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난 후 아들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재료를 드리는 중에 특히 그 많은 금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이 금과 은은 너무 많아 성전을 다 짓고 난 후에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성전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사용한 후 남은 것들은 솔로몬 왕이 성전 곳간에 따로 보관했습니다.

열왕기상 7장 51절에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드린 것을 아들 솔로몬이 다른 곳에 사용하거나 자기를 위해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전에 드렸습니다. 이 성전이 세워진 곳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린 곳으로 보입니다.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다윗이 만납니다. 1천 년 전에 가장 소중한 아들을 드린 아브라함과 자기의 가장 귀한 물질을 드린 다윗이 모리아에서 이렇게 만난 후 구약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지닌 이름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전의 가치는 금으로 치장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에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기에 자신이 지닌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 자세 속에 성전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금으로 덮으면 속의 재료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이런 것을 생각하고 갑시다. 금을 입히는 순간 그 속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금을 입히면 그 속에 무엇이 있든 금만 보입니다. 나무도 돌도 금으로 싸면 금빛으로 빛납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금보다 귀한 보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의인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덮어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십니다. 금보다 귀한 주님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를 다 덮으셨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닌 우리를 구원하신 보혈이 우리를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금보다 귀한 가치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된 교회는 과연 무엇으로 장식해야 그 가치가 드러날까요? 두 가지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우선 믿음은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교회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믿음은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아울러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 시대에 진정한 성전으로 만들기 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금같이 세상의 값나가는 것으로 장식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금이 아닌 믿음이고 금이 아닌 주님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세상의 건축 재료가 아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그 삶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죽는 자리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교회가 진정 금보다 귀한 교회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금으로 입히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미얀마와 같이 전깃불도 제대로 켤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나라에서 금으로 입힌 사원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지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금으로 입힌다고 성전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화려하게 지으면 지을수록 세상은 교회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고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금처럼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예배당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금은 무엇일까요? 그 금과 같은 교회의 가치를 찾아갑시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금으로 입힙시다. 우리 교회를 금보다 귀한 가치를 지닌 교회로 만듭시다. 우리의 삶도 금을 지닌 몸이 아닌 금보다 귀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가꿉시다. 초라한 예배당에서 힘들게 예배드리면서도 세상에 희망이 되는 교회가 정말 귀한 교회입니다. 그것이 금빛 나는 성전입니다.

우리 교회를 섬기다 순교의 제물로 드려지신 주기철 목사님은 금보다 귀한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산정현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보물입니다. 그분은 금 같은 믿음을 지킨 분입니다. 순결한 99.9%의 순금 같은 믿음으로 성전 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1995년 성탄절에 천국에 가신 장기려 장로님 역시 우리 교회 장로님으로서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금을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삶 자체가 금이었습니다. 물질적인 부나 어떤 상도 그는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는 삶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금같이 순결한 믿음이라면 장기려 장로님은 금 같은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주님을 향한 순결한 믿음으로 생명도 아끼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다면 장기려 장로님은 금처럼 빛나는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믿음을 그렇게 구체화한 분입니다. 1922년 우리 교회 장로님으로 임직되신 조만식 장로님 역시 그렇습니다. 그분 역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민족과 나라를 위해 십자가 지는 삶을 통해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에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금칠을 하신 귀한 분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금을 입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모이는 사람의 수는 놀랍도록 많은데, 교회에 금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금을 벗겨내어 흉측한 모습으로 전락시키는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저런 중요한 자리에 있는 분들이라는 것이 더욱 마음 아픈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 밖에 버려져 밟히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밟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빛을 잃어버린 등불이 쓸모없지 않습니까? 환하게 비춰야 합니다. 그것이 금입니다. 금이 빛납니다.

산상설교의 말씀 한 구절을 볼까요?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빛은 착한 행실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도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예배당이 아닙니다. 오늘날 금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전을 덮은 금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금을 입힙시다.

세상 속에서 교회는 이런저런 부끄러운 일들로 금보다 귀한 교회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부끄럽게 하는지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을 빛내야 합니다. 거룩하고 아름답고 착한 삶을 통해 교회를 빛내고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빛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성경적 의미의 교회를 세우고 성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의 깨우침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금처럼 귀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비성경적 삶으로 인하여 진정한 성전을 욕되게 하지 맙시다.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아름답게 섬기고 우리 공동체가 금보다 더 찬란한 삶을 통해 참된 성전으로 서게 합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른 성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랜 전통이 아닌 진정한 성전 개념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화려한 예배당이 과연 성경적인 성전일까요?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도 결코 진정한 성전이 아니었기에 그곳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에 얽매인 교회에 대항하여 새로운 성전을 이루기 위해 개혁의 횃불을 든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그렇게 성경적인 성전을 이루어야 할 우리 한국교회가 이제 성경 앞에서 바른 교회로 서가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성택 목사(울산서현교회)

...(중략)...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 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 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중략)...(요한복음 5:37-47) | 찬송가: 344장, 544장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지, 믿게, 믿을 수 있겠느냐?” 등 믿음에 관하여 여섯 번이나 언급을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따라 오늘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영생 얻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를 상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은 줄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가 ‘오직 성경으로’, 두 번째는 ‘오직 은혜로’, 세 번째는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지혜나 돈이 나 인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독일에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는 죄를 면하게 해주는 증서로서 이 증서를 산 헌금이 헌 금 주머니에 땡그랑 떨어지는 순간에 부모, 형제,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혼이 연옥에 있다가 천국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성당을 건축하고 있었는데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면죄부를 팔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틴 루터는 회개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도 없이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가지고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내용이 나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많은 환자가 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와 있는가 하면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익 한 번 휘저을 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왔는데 천사가 와서 물을 흔들어 놓을 때에 중한 병자는 뛰어들어가지 못해 고침 받지 못하고 덜 아픈 병자가 먼저 뛰어들어가서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베데스다 못가에 와서 38년을 기다렸는데 먼저 들어가지 못해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 오셔서 이 38년 된 환자를 보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니 “예, 낫고 싶은데 다 른 사람이 먼저 뛰어들어가서 못 고쳤습니다. 나를 아무도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 사람이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못마땅히 여기고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자요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심판을 받지 아니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바로 믿으면 행복한 자가 되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생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참 만족함과 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줄 믿습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

오직 성경

첫째,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성경만이 세상을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38절 말씀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즉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거하는 자는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지만 말씀 없이는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데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님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았지만 그들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39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성경을 상고했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아무리 줄줄 외우고 많이 알지라도 성경 속 핵심인 예수님을 빼버리면 참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모르몬교도들도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르몬교도들은 예수님 자리에 모르몬이 들어가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통일교도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리에 문선명이 들어가서 문제이고, 천부교에는 박태선이, 신천지에는 이만희가,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리에 모세가 들어가니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에 성경 속 보배인 예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보배인 예수를 빼버리면 그 성경은 참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누구에 대해여 말씀합니까?

39절 하반절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2: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씨가 이삭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그 씨는 솔로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신약이 전개될 때에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 씨요 다윗과 약속하신 그 씨이며, 그 씨가 바로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은 과학이나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 속에는 역사도 있고 철학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도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경을 통해서 영생을 얻으며, 성경을 통해서 믿음의 싹이 나고,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바로 알고 영생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신구약 성경의 핵심 요절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습니다.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 국회의원이 낮에는 바쁘고 사람들의 눈치도 있고 해서 낮에는 오지 못하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러고는 “선한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줄 내가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답변하지 않으시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어서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영적인 것으로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 예수님이 믿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로 믿어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둘째,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구하는 것입니다.

44절에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오는 예수님 을 믿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 수 없고 또 참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라틴어로 ‘솔리 데오 글로리아’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 받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고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를 지나치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믿고, 돈을 믿고, 지식을 믿고, 자기 의를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천국 가는 길인 줄 믿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참된 영생자가 되십니다. 인간이 죄인임을 알고 겸손할 때에 구원자 예수님을 찾게 되고, 죄를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줄 믿습니다.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이신득구’ 즉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의행득상’ 즉 의를 행하면 상급을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구제와 헌금을 하고 충성 봉사한 것은 하늘나라 상급과 관계된 것이지 구원에는 이런 행위나 다른 어떤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서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며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고, 그것을 믿음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그 순간 붓기가 빠지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순간에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영적으로 죽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고 믿으면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544장에 보면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그런데 믿으면 되겠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영원한 삶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에 유명한 부흥사 박재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일제 말엽 금강산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 젊은이가 관광차 금강산에 들어왔기에 그 청년을 붙잡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젊은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야지”라고 전도를 했더니 씨도 안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지식과 돈과 과학이면 만능입니다. 세상에는 돈과 지식과 과학만 있으면 다 됩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목사님, 오셔서 기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그 청년을 따라가 봤더니 몇 달 전 전도하려고 했던 그 사람이 피를 많이 흘려서

창백한 얼굴로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기도는 무슨 기도? 하나님이 있어야 기도하지” 하시고는 사각모를 씌워 주면서 “지식이면 되잖아?”, 돈을 손에 쥐어주며 “돈이 만능이라며?”, 또 약병을 주며 “과학이면 다 되지?”라고 하였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아닙니다, 목사님. 지금 내 앞에는 지옥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세상 떠날 때 사각모가 필요합니까? 돈, 지식, 과학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가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예배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충성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셋째,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40절 말씀에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가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가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287장에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 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수가 성 여인이 물을 길러 나갔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 수님과 대화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한 남자 로 알았다가 다음엔 선지자로 그리고 마지막에 메시아를 발견하고서 동네에 들어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와보라”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물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 중에서 첫째가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을 교회로 부르십니다. 교회라는 것은 건물이 아니고 에클레시아, 즉 부름 받은 성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임금이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 초청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가볍게 여기다가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길가에 있 던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잔치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 한 것은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정 택한 백성을 교회로 부르시기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갖고 구원을 얻으려면 교회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영생함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절). 석가모니를 영접해도 구원받지 못하고, 이만희, 박태선을 영접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했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원래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다.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매국노,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세금을 배로 거두고 그런 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순간에 참된 구원, 영적인 구원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구원을 받을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영접기도를 시킬 때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오셔서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주세요”라고 기도를 시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내가 믿습니다.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의 왕이 되어 주세요”라고 예수님을 마음에 초청하고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 구원자를 외면하고 저버리면 아무리 많은 헌금과 교회에서 봉사를 했다 할지라도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야 됩니다.

셋째로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하며 행동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 고백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배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입으로도 고백해야 하지만 삶으로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는데 나중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닭의 울음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글썽글썽하면서 ‘내가 그때 왜 예수님을 부인했던가. 내가 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가’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시인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도신경이 무엇입니까? 내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은혜 받고 처음 한 고백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입니다. 두 번째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라는 사랑고백을 합니다. 이 3대 고백을 우리는 자주자주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의 사랑과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얻는데 먼저는 예수님께 나와야 하고, 다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고백해야 하는데, 입술로 고백하고 삶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면 서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은 첫째는 오 직 성경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책 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영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서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 다. 입술로 삶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라 피데 크리스천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중략)...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중략)...(사도행전 20:26-35) | 찬송가: 267장, 288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올해 종교개혁(교회개혁, Reformation) 500주년(1517-2017)의 뜻깊은 해를 맞았습니다. 개혁 자 마틴 루터(1483-1546)가 독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문에 면죄부를 파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95개조의 논제(M. Luther’s 95 Theses)를 게시한 사건으로 종교개혁은 점화되었습니다. 다섯 가지의 솔라 (Five Solas)는 종교개혁의 핵심가치와 그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의 뿌리가 없는 성 도 역시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종교개혁 전에는 안개 속을 거니 는 것처럼 진리가 희미하고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로 소 종교개혁을 통해 신실한 성도들이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 한 확실한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죄인을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과연 누가 우리를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이 문제에 관한 유효하고 확실한 답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종교개혁은 구원론에 대한 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 사상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Faith Alone)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더하여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이신득의(以信得義) 구원교리를 재발견하고 정립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이 선행이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인간 중심, 공덕 중심의 잘못된 사상을 격파하고 바울 사도는 “오직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획득됨”을 확신 있게 전파하였습니다. 로마서도 동일하게 이신칭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사도는 자신이 땀 흘려 생명의 복음을 전함으로 유럽에 세워진 첫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자서전적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개혁자 루터의 신학을 ‘칭의’ 신학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존 칼빈의 평생 신학의 주제였던 ‘오직 하나님께 영광’ 신학을 계승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계획을 가졌던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핵심 멤버였던 장로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17절). 장로들은 감독자로 불리기도 합니다(28절). 에베소 교회와 사도 바울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현재 터키 서해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그 당시 아시아에 있는 로마제국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자 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상에 걸맞게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였습니다(행 18:18-21). 연이어 제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2년간 머물며 회당과 두란노서원에서 복음을 외쳤습니다(행 19:8-6). 바울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행 19장).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때 믿음의 아들이며 사역자인 디모데를 남겨두어 목회를 계승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이렇듯 에베소 교회는 이방 선교의 거점교회였으며 우상과의 진리 싸움의 전쟁터였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한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숭배한 아데미 여신의 전각 은 그 크기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압도하였습니다. 아데미 우상전각은 가로가 무려 120m, 세로가 65m, 높이가 18m나 되는 127개의 대리석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건축 기간만 220년으로 추정됩니다. 아데미 신전은 그 당시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거대한 신전을 찾아오는 순례자들과 방문객들이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업자들이 만든 아데미 신전 기념상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습니다(행 19장). 이러한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 에베소 교회가 놓여 있었으니 그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각별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외친 메시지

바울은 에베소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였습니다(21절). 또한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내용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헬라어로 표현되는 ‘카리스’는 우리말로 ‘은혜’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 뜻은 ‘전혀 받거나 누릴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받고 누리게 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도 살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죄 사함의 복과 영생의 선물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죄인들에게 임하였다는 소식이야말로 복음입니다. 영원히 멸망 받을 처지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은혜의 복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귀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견해나 가치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다고 거듭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의 생각에 에베소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전사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배경 가운데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미래를 열어갈 핵심 멤버인 장로들을 초청하여 다시 한 번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각성과 사명에 대한 재발견을 강력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영적 지도자의 책무

장로의 임무는 삼가는 것과 경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교회의 영적 생명을 보존하고 이어갈 장로들에게 부탁합니다. “삼가시오.” 그리고 “경계하시오.” 사도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면합니다. 강력한 명령으로 삼갈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미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영적 직분자는 스스로 자신을 다스림으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성도들의 믿음을 진작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현하 한국교회에 발생하는 많은 어려움은 교회의 중직자들이 직분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삼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또한 ‘주의하다, 경계하다’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곧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어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상과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현장에 있었기에 진리에 대해 도전하는 무리와 호시탐탐 노리는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결코 늦추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그가 속한 지역교회의 믿음의 파수꾼입니다. 복음의 불침번입니다. 십자가의 전사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집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누구로부터 직분을 부여받았는지, 어떤 가치를 지닌 공동체에서 책무를 감당해야 할지 다시 한 번 확정해야 했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절). 성령께서 그 장로들을 감독자로 세운 뜻은 본문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살피다’라는 단어는 이전에 ‘치게 하셨느니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양육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이 보여주는 선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영혼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십니다(벧전 2:25). 주님의 심정으로 지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돌아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의미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직분인지요. 장로나 감독자를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교회 됨을 위하여, 교회의 건강함을 위하여 사역자가 존재한다는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에서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31절).

눈물의 목자가 부재한 양 떼는 그대로 위험에 노출됩니다. 사나운 이리에 의하여 지리멸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집니까? 지난 1992년 10월 28일 한국의 이단 다미선교회에서 휴거론을 들고 나올 때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 중직자들이 미혹을 당하여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때뿐입니까? 지금도 사나운 이리처럼 달려드는 교묘하고 악랄한 이단들이 지역교회를 노립니다. 대표적으로 신천지(교주 이만희), 구원파(교주 박옥수), 하나님의 교회 일명 안상홍증인회(교주 장길자), 젊은이 그룹을 유혹하고 교주가 성 추문을 일으켜서 감옥에 가 있는 JMS(교주 정명석) 등이 순전한 성도를 위협하고 있는 사나운 이리 떼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발호하는 거짓 사상과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미혹되면 주 예수님의 구주 되심과 유일성을 부인하고 그들 자신을 따르게 합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30절).

이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까? ‘사나운 이리’라는 말은 ‘잔인한, 흉포한’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이리로 비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교회를 세우는 선한 목자가 있는 것처럼, 교회를 허무는 잔악한 이리 같은 거짓 교사들도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대로 후에 에베소교회는 악한 자들과 자칭 사도라는 자들을 가려내어 그들의 악한 정체를 드러내는 일이 있었습니다(계 2:2).

 

사역자의 능력의 원천

바울은 눈물의 훈계를 마치면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은 육체로는 떠나가지만, 그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사역자의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각인시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교회 직분자들인 대표 성도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장로들에게 맡기면서 또한 그 장로들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동시에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였습니다. 여기 언급되는 ‘은혜의 말씀’은 24절의 ‘은혜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특이한 것은 사도는 은혜의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여 말씀, 즉 복음에 대한 존중함과 친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복음을 신뢰하며, 은혜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오직 주님과 은혜의 말씀만이 사역자들을 능히 든든히 세웁니다. 든든히 ‘세운다’는 말은 건축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치 견고하게 집이 세워지듯, 사역자의 삶을 힘 있게 세워나가는 원리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는 믿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시는 단순한 은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미래에 확실한 소망의 기업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역자들의 급선무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고 자신을 말씀으로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성전인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에서 찾습니다.

우리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입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The Diet of Worms)에서 카를 5세(Karl V) 황제의 위협에 직면한 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역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의롭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루터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매여 있는 성도만이 자신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진정 우리는 무엇에 매여 살기를 원합니까? 성경은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의 믿음의 출발은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보증도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말씀과 더불어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동적인 사역이 우리의 정체성을 보증해 줍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면 거룩한 정체감을 상실합니다. 영력을 잃어버립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영적 암흑기(Spiritual Dark Age)를 맞습니다. 얼마전 우리나라 복음주의 역사신학회, 한국장로교 신학회, 한국교회사학회 공동 주최로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공동학술대회’에 초청되어 주제 강연을 한 기독교 사상가이자 교회사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우드브리지(John D. Woodbridge) 교수는 성도와 교회의 신앙의 유일한 기초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진실성, 무오성, 충분성, 신뢰성, 명료성을 주목하였습니다.

첫째, 성경은 완전히 믿을 수 있으며 그 무오성은 그 사상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에까지 미친다.

둘째, 성경은 신앙과 실천을 위한 완전히 충분한 규범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삼위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바른 삶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공급한다.

셋째, 성경은 성령 하나님에 의해 영감되었다. 성경은 그 권위를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 초점으로 가지고 있다.

넷째, 성경은 신앙과 실천에 관한 가르침이 분명하여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성경은 영적으로 생명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기에 실용적이고 유익하다.

처음의 세 가지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무엇이 죄인을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모든 죄인은 예외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합니까? 오직 예 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 문제에 관한 유효하고 확실한 답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직 성경을 통하 여서만 우리는 확신을 가집니다(Michael. A. G. Haykin 교수 글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개혁자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로 우뚝 서도록 일꾼답게 쓰임 받읍시다. 우리의 가정에서 믿음이 실천될 수 있도록 결단합시다. 우리의 일 터가 예배 생활의 연장이 되어 일상의 예배자로 드려지도록 믿음 의 건축자가 됩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승리자는 삶의 승리자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우리 모두 초보적인 믿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위대한 편지

김성천 목사(여수제일교회)

…(중략)…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중략)…(로마서 1:8-17) | 찬송가: 488장, 305장

요즘은 국제화 시대가 되어서 해외여행을 보릿고개 시절의 국 내 여행보다도 더욱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국가에서도 자신의 국가의 대도시나 관광지를 가보 지 않는 국민들이 70% 이상 된다고 합니다. 이미 출가하여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큰딸의 유학시절 이야기입니다. 기숙사 친구 인 미국인 여대생 졸업반 학생이 자신은 동부의 뉴욕은 가보았 지만 서부에는 가보지 못해 서부의 최대 도시인 LA나 샌프란시스코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소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평생소원은 2000년 전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를 지배하였던 로마 제국의 방문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로마 여행을 소망했는지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고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고 있습니 다. 로마서 1장 13절에서도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 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 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여행 을 한두 번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하여 여러 번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길이 막혀서 로마를 방문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처럼 로마 여행을 애타게 갈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8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 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로마 교회는 바울 사도가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학자는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만 하더라도 공식적인 교회는 설립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 든 자에게”(롬 1:7)라고 기록했을 뿐 “로마에 있는 교회”라고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로마의 성도들이 열심히 주님 을 섬기는 소식이 온 세상에 알려지자 가장 기쁘게 생각하면서 감사했던 지도자는 바울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자들 중 상당수가 바울 사도의 영향력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마친 신랑이 달콤했던 신혼기간을 보내던 중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즐거운 소식 을 접하게 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사랑의 열매가 탄생되었어요. 아들이 자라면서 그 모습이 어찌나 아빠를 닮았는지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당신을 보는 듯해요.” 그 병사의 간절한 소망은 하루빨리 종전이 되어서 그리운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들의 모습을 빨리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 역시 자신이 직접 로마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영적 자녀들인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편지를 기록하게 된 이유

그러면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의 모습이 왜 그토록 보고 싶었을까요? 그 구체적인 이유를 본문에서 몇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11절). 은혜와 은사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공로나 대가 없이 하나님께서 그냥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누구든지 자신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다릅니다. 은사는 기능적인 재능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 잘하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또 기도 잘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봉사하고 헌신하는 은사가 있는 반면에 병 고치는 은사도 있고 부흥회를 잘 인도하는 은사도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잘 가르치고 말씀을 잘 증거하는 은사도 있으며, 초신자들에게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잘 인도하는 은사도 있습니다. 또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체계 있게 교육시키는 은사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잠이 많아서 새벽 기도는 못하지만 사업 잘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은 새벽 기도는 못하는 대신에 열심히 사업하여서 물질로 헌신하시면 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은사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내게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서로 나눌 때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서로 교환하고 공유하므로 피차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12절).

바울은 자신이 지닌 신령한 은사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1절). 바울이 가진 신령한 은사는 사도적 은사입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우는 진리의 스승 역할입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지 바울 사도는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사도로서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올바르고 건강한 믿음의 길로 인도하고 싶은 갈망이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살면서 복음을 어떻게 적용하며 사느냐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로마에는 예루살렘의 복음이 그대로 직수입되었기 때문에 로마 문화권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학을 확립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그 분야에 전문가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이 지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줌으로 그들 공동체가 견고해지길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위대한 편지를 기록하게 된 또 다른 동기는 채무 의식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가리켜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롬 1:14)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가리켜 그레코로만(Greco Roman) 시대라고 합니다. 정치나 문화적으로 로마 시대이지만 지식과 정신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헬라 철학이 이끌어 가는 시대였습니다.

헬라 문화와 말에 익숙한 사람은 헬라인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반면에 헬라 문화나 언어를 모르는 자들은 야만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누구를 만나도 그 모두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격상 남에게 빚을 지고는 마음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목사 임직을 받고서 공부를 마치고 보니 저희 가족이 거주할 장소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에 자리를 잡게 되어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전셋집을 마련하는데, 주택 자금이 부족하여 처갓집 큰형님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가댁에 놀러 가게 되면 형님 얼굴을 뵐 때마다 빚진 것이 마음에 걸려서 한번은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다가 빚을 갚았습니다. 빚을 갚고 나니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했는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으로 로마서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바울 사도는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복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16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 기독교는 로마의 상류계층으로부터 심각한 냉대와 무시를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의 종교라는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서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 그 진리를 깨닫게 된 후 복음을 자랑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왜 기독교의 복음을 자랑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가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1994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범인들은 1993년 4월경 포커 판에서 대학 입시 부정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 데 뜻을 같이 하여 ‘지존파’라는 범죄 집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돈 있고 권세 있는 자의 것을 빼앗고 죽인다는 행동 강령을 만들어서 10억 원의 돈을 모은다는 목표 아래 1,200명에 달하는 백화점의 고액 고객 명단을 입수하여 범행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존파의 살인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자신들이 살해한 자들의 인육까지 먹었기 때문입니다. 1995년 11월 2일 이날은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였던 지존파 6명의 사형 집행이 있던 날입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그들은 목사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린 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지존파의 두목인 김기환은 다음과 같이 유언했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나이 어린 동생들에게 사형만은 면제해 주십시오. 그리고 범죄 장소로 사용되었던 영광군 불갑면 막사가 있던 장소에 교회를 지어 주십시오.”

그들 지존파에게 복음을 전했던 분은 서울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님이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을 기다리던 그들에게 끈질기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여 구원받는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지존파 살인범 김현양은 이재명 집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집사님, 생각하면 제가 왜 그처럼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이 세상에서는 저희들의 끔찍한 죄야말로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알게 되어 믿게 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생각해 봅시다. 끔찍한 살인마들인 지존파를 누가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사도의 믿음과 심정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의 심정을 배워 동일하게 살아야 합니다.

첫째, 이 복음이 나의 복음의 되어야 합니다(롬 1:16).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와 ‘복음’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킨 복음이며 지금도 내 속에서 역사하는 복음입니다. 남의 구원을 듣는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죄 사함 얻어서 천국을 소망케 된 내 자신과 가족과 교회 공동체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기독교의 복음은 내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힘써서 노력하고 봉사하며 헌신하여서 얻게되는 의가 아닙니다. 수영을 배우는 초보자들에게 코치는 말합니다. “여러분, 몸에 힘을 주면 물속에 가라앉게 됩니다. 물의 부력을 의지하여 뜨기 위해서는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취해 주신 구원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루터는 ‘수동적 의’라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경건한 노력만 강조하면 바리새주의 즉 공로주의자가 됩니다. 성령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셋째, 복음을 증거하며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롬 1:14). 과거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의 문제점은 가난한 자들의 복음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복음은 빈부귀천이나 지식 유무를 떠나서 누구에게든지 필요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생활태도가 불량한 사람들을 복음전도의 대상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한국 초기교회 때 유명한 복음전도자였던 김익두 목사님도 예수 믿기 전에는 평양 시내에서 유명한 주먹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영접하고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임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님이 되셨고 한국 초기 장로교회의 베드로 사도 같은 열정적인 복음의 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하며 전도하는 일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살아 매 순간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박재신 목사(양정교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 마서 1:17) | 찬송가: 269장, 399장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부친의 소원대로 법학도의 길을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떨어진 낙뢰로 친구가 죽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루터는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1505년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교회의 교리와 계명과 수도의 규칙들을 철저히 배워서 1507년에 신부가 되었고, 1510년 그의 나이 30세 때에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루터는 신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영혼을 괴롭히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여행이 자기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4주간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의 여러 곳을 둘러봅니다. 그러다가 라테란 성당을 방문합니다. 거기에는 ‘거룩한 계단’이라고도 불리는 28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 계단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 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던 계단이라고 하여 빌라도의 계단이라고도 하는 데, 당시 교황청은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져 왔으며, 누구든지 맨 무릎으로 그 계단을 기어오르는 수행을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자신의 죄가 사하여지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답답함은 여전했습니다. 그렇게 엄격한 규율 을 지키고 선행을 행하고 심지어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고통스런 수행을 해도 영혼의 답답함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8번째의 마지막 계단에 섰을 때 오히려 “이것이 정말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한 진실한 진리인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자신의 수행이 부족하여 그런 줄 알고 더 욱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며 수도에 정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내면의 죄성만 드러나고 영적인 갈증은 더욱 심해지며 영혼의 만족이 없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자신의 죄뿐 아 니라 부모, 형제 등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 임무를 도미닉 교단 수도 사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에게 맡겼는데, 그는 당대의 웅변가요 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사는 사람 은 죄를 용서받는다.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면죄부를 사면 돈이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며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이런 면죄부가 팔리고 있을 때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서를 읽던 중에 1장 17절의 말씀이 그의 영혼을 흔들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말씀은 그의 영혼에 생수와 같았고 영혼의 찬란한 햇빛과도 같이 비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자유하게 되었고 말할 수 없는 큰 평안과 기쁨이 임하였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오직 믿음의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경험한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교황청 교리의 오류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게 되었고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종교개혁은 행위 구원을 강조하였던 로마가톨릭에 반발하여 루터의 95개 조항의 반박문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행위 부분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였던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할 정도로 구원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개혁자들은 가톨릭의 행위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해 다섯 가지 명제를 외쳤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구원론적 입장에서 오직 믿음

‘오직 믿음’이란 성도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바울 사도가 언급한 것처럼 율법을 지키기 위한 고행이나 종교적 선행으로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의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요 1:12).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의 어떤 행위가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치는 행위 종교이며 사람의 노력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수도 종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한 선행을 가르치고 교훈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같이 다 부패하고 범죄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12절에서 하나님은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을 만큼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서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로 살다가 영원한 심판을 당하고 형벌 받을 존재들입니다.

모두가 다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만큼 선해질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선행으로 공덕을 쌓는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만큼 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나 공로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의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고 영접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어 구원에 이르는 구속의 종교, 은혜의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 핵심 진리를 가르치면서 인간의 행위, 즉 공로의 반대 개념으로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호가 ‘오직 믿음’(Sola Fide)이었습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9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하여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만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스스로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게 해주셔야 알 수 있고(마 16:17) 믿게 해주셔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은 영혼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고 따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절에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믿음이 부어집니다. 이렇게 구원 얻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구원이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인 것입니다.

 

행위론적 관점에서의 오직 믿음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행위론적 관점에서의 오직 믿음입니다. 본문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구원이 믿음에 의한 은혜의 선물이라면 구원받은 이후에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이나 대가 없이 무엇을 받았을 때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놀랍고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 사함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요 1:12)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속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구원받은 이후에 요구되는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간과하고 지나쳤던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소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장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별개로 보지 않았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 구원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그에 따른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그 믿음의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을 보면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행함을 통해 온전하여진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 우리의 삶에서 행실을 등한히 하면 그것은 반쪽 구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의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행위, 즉 믿음의 실천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행위 구원을 가르쳤던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에 반발하여 ‘오직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의 결과로 드러나는 신앙의 행위에 대해서는 소홀하였던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믿음에 따른 행위입니다. 그런데 행위 구원을 강조했던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야고보서가 강력하게 말씀하는 믿음에 따른 행위에 대해서 간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개혁교회들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음에 따른 행위가 약하여서 말뿐인 신앙인들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없고 말뿐인 사람을 이를 때 ‘나토족’(NATO)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No Action, Talking Only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우리는 믿음은 있는데 행위가 없는 영적인 나토족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서가 행위를 강조하지만 그 행위는 어디까지나 믿음 안에서의 행위이지 믿음 없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란 행동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실천을 포함하는 믿음이 오직 믿음입니다. 고백은 풍성하지만 행함은 빈약한 우리의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는 가장 큰 이유는 신앙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은 신앙적으로 하는데 행동은 여전히 비신앙적입니다.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인데, 행동하는 것은 신자답지 못한 데서 한국교회가 권위를 잃었습니다. 세상을 가르치고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도리어 비난받고 훈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루터를 비롯한 초기 개혁자들은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위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신앙과 행위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했고 2장 24절에서“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바를 실천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행함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 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으며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말뿐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한다면 사랑의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기업의 슬로건은 “Stop talking, Start Doing”이라고 합니다. “말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을 행동화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4천 번 이상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져서 몇 달 동안 설교를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다고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 Bonhoeffer)는 독일 교회가 값싼 은혜를 나누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행함과 믿음,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있다. 믿음만 중시하게 되면 자칫 값싼 은혜에 빠지게 된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에서 오는 고난이 없는 은혜, 성육신의 실천이 없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없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본회퍼의 지적처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따른 실천이 없는 싸구려 신앙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값싼 은혜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면서도 은혜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이 살다 보면 그처럼 귀한 은혜가 싸구려가 되고 맙니다.

교회에 행함이 없는 신앙인이 많아질수록 기독교는 싸구려 종교로 변질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지닌 문제점입니다. 교인들은 은혜만 좋아하고 감동만 원할 뿐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나 주를 위해 헌신하는 행동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이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회피하고 가능하면 편하고 쉽게 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점점 선데이 크리스천이 많아지고 심지어 교회에 출석을 거부하는 가나안 교인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급속하게 싸구려 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씀을 실천하는 삶 을 살아야 합니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진리지만, 행함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 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 음 12장 33절에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란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는가, 신앙고백을 어떻게 행동화하는가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머리로만 동의하거나 마음으로 감동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깨닫고 믿어진 믿음을 삶의 장에 적용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은 그의 책에서 “믿음은 행동으로만 증명된다”고 했습니다. 믿음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구원받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 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삶

조영래 목사(칠암교회)

...(중략)...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 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11-21) | 찬송가: 310장, 449장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교리에 대한 95개 조의 반박문을 써 붙였습니다. 그 반박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오직 믿음’입니다. 루터가 이 강령을 붙잡았던 이유는 당시 로마가톨릭의 구원관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그것에다 추가로 인간의 노력과 공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자연 상태에 서 그분께 최선을 다한 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공로(meritum de congruo)로 은혜를 주입해 주시고, 그 은혜를 받은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에 정당한 공로(meritum de condigno)로 구원을 주신다 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구원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항상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고, 아무리 선을 행해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하고 자신도 언젠가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항상 ‘어떻게 사람이 의로우시고 준엄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엄격한 수도생활을 했고, 동료 수사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조그만 죄도 감시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거룩해지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양심이 괴로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죄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버림을 받고 십계명의 율법에 갇혀서 모든 종류의 고난들로 짓이겨지는 것에도 만족하지 않으시는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에다가 복음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시고 또한 그 복음에 의하여 당신의 의와 진노로 우리를 위협하시다니!”

그렇게 생각하던 그가 대학교수로서 로마서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의가 새롭게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로마를 방문하여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심판석까지 밟고 올라가셨다고 전해지는 계단(Scala santa)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갈 때 그의 마음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의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

루터는 중세의 암흑기 동안 묻혀 있었던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의 광맥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가르침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가르침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주 오래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중세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초대교회에서도 아주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책망하는 일도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게바를 책망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먼저 사도 된 게바를 바울이 책망하는 것은 아주 무례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바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게바일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게바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게바의 잘못을 살펴보기 전에 당시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최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통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관습을 따라서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당시에 그렇게 주장하던 정통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세력이 막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던지 게바도 그들을 두려워하여 흔들렸습니다.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하다가 정통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잘못된 가르침과 차별을 철폐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도의 리더가 이런 외식을 한다는 것은 아주 큰일입니다. 리더가 이처럼 외식을 하니 함께 식탁 교제를 하던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자연스럽게 외식하고, 심지어는 착한 사람이라고 불렸던 바나바까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지위를 뛰어넘어서 게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지금 게바가 책망을 듣는 것은 그의 잘못된 행동이 진리의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이 진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게바가 사람들의 세력과 눈을 의식해서 외식하는 것은 책망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게바와 같이 외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힘에 영향을 받아서 외식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신앙생활에 익숙해지면 율법의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도 게바와 같이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유가 아닌 저주 아래 놓인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에서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선한 일을 합니다. 심지어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기

그러나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쉽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패역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로 가득한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셨으니 우리는 그분을 굳게 믿고, 그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망각하면 어느 순간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 믿음을 잃어버리고 행위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의를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다시 행위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어느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율법의 모든 조항을 다 지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모든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흠과 티가 없고 더러움과 거짓이 없으십니다. 이처럼 깨끗하시기에 그분께서는 중보자의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바로 그분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인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 완전하심과 그분의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인생

이처럼 놀라운 복을 받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 20절에 그 해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이 읽어 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아는 죽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자아가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령을 좇아서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믿음 위에 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지독한 자아숭배 때문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고, 자기가 영광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주장, 자기 고집, 자기 뜻은 모두 죽여야 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믿고 그분을 붙드는 삶이고, 말씀의 지배를 받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실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행위와 믿음은 기독교 안에서 아주 오래된 문제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게바조차도 시험을 받았을 만큼 커다란 유혹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대단한 성과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율법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모두 메말라버리고, 어떤 행위를 통해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과거의 행위를 버리고, 주님을 철저히 믿음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믿음으로 주님을 굳게 붙들고 성령을 따라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본질

박성규 목사(부전교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 찬송가: 260장, 251장

종교개혁은 어떤 새로운 사상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의 신앙을 되찾는 운동이었습니다.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중 세 로마 천주교회의 변질을 안타까워하여 본질로 돌아가고자 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슬로건 중에 하나는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교부들의 신학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부들은 사도들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들 을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회를 지키며, 교리와 신학을 정립한 분들입니다. 이들은 교회가 내적 갈등이나 이단과의 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바른 가르침으로 교리와 신학을 정립했고, 외적으로 박해가 임할 때에는 순교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의 생생한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세 천주교회는 이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있었습니다. 마리아 숭배, 성자 숭배, 성물 숭배 등 온갖 미신 덩어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10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중세교회 는 점차 부패하여 성경의 권위는 상실되고, 사람이 만든 전통에 집착하였으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 대신에 면죄부를 발행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고 교부들의 신학에도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이지 중세교회의 전통이 아닙니다. 칼빈도 그래서 성경을 원어로 많이 연구했고, 교부들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으며 특히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본질로 돌아가는 것 중에 하나가 ‘오직 믿음’(sola fide) 이었습니다. 왜 ‘오직 믿음’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중세의 로마 천주교회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오직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질을 왜곡시킨 변질이었습니다. 이런 공로주의는 비성 경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강요』에 보면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의(義)가 믿음과 행위의 협력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수많은 증거들은 거짓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중세 로마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인간의 행위적 공로가 더해져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비성경적 생각을 가르친 것입니다. 오직 믿음입니까? 아니면 믿음에 우리의 인간적 공로가 첨가되어야 합니까?

 

무엇이 복음인가

이것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같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은 율법주의적인 이단이었습니다. 그 이단에 대해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 ‘복음의 변질’이라고 하며,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갈 1:6-8).

그 율법주의적인 이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믿음에 율법 준수를 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인데 여기에 율법 준수를 더하는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불의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는 말씀은 율법을 지켜서 즉 우리 자신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기록된 의를 다 행할 수 없는 근본적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은 이 사실을 이렇게 웅변적으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뼛속까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한 선행을 할 수 없습니다. 도르트 신조에는 “모든 사람이 죄악 중에 잉태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구원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죄의 노예다.”라고 했습니다. 또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고, 누구보다 성화를 많이 이루었던 바울 사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의 인생 후반기에 기록한 디모데전서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습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현재형 동사가 쓰였습니다.

그렇게 평생 거룩한 삶을 추구한 바울 사도조차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서도 생각과 행위가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습니다. 대사도인 바울이 그러했다면 평범한 우리야 얼마나 더 깊은 죄성을 가진 존재들입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의 마음도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죄인 중에 괴수요, 괴수 중에 괴수임을 고백합니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유아기 젖 먹던 시절의 죄까지 회개합니다. 유모가 아이들 젖을 먹일 때 보면, 먼저 먹고 배부른 아이를 내려놓으면 이미 배부른 아이가 다른 아이가 젖 무는 것을 보면서 째려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탐욕이라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앞에는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사오니 이 세상에서 하루를 살았던 어린아이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죗값을 치르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얻습니다. 오직 믿음 외에는 구원의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이단은 십자가 전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도 필요하지만 율법준수를 통한 공로도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반율법주의(半律法主義, 구원의 조건의 절반은 율법준수라는 주장, semi-legalism)라고 부릅니다. 또 갈라디아 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일어났기에 갈라디아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공로를 덧붙이는 것은 누더기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다 이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이단의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것이 ‘다른 복음’이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보다 연장자이며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와 자기 멘토인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성도와 식사를 하다가 유대주의자들(할례파들)이 오니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떠나자 베드로와 바나바를 책망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복음이 변질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장을 쓴 바울 사도가 이 부분만큼은 아주 단호하였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사랑할 것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사탄의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율법주의가 중세시대 로마 천주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즉 그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공로까지 포함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복음이고 거짓 복음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sola fide)은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다섯 가지 솔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칼빈은 이 믿음이 인간의 결단으로 보이지만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주된 역사는 바로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합니다. “신실한 성경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를 믿는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고 또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두 사람이 듣는데 한 사람은 멸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으킴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멸시하는 사람은 그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일으킴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의 말씀처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복음을 깨닫고 믿게 도와주셔서 우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넓게는 성경 그리고 좁게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므로 구약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절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을 믿을 때 누구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구원받은 자의 확신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하게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인간이 감관(感官)으로 아는 이해나 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감관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엡 3:18-19) 능력으로 멋지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그분의 뜻을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골 1:26, 2:2). 즉 믿음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참된 신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친절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시라는 든든한 확신을 갖고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약속들을 의지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고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의지하고 사망을 확실하게 이기는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신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여부를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기준을 둔다면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약속에 둔다면, 즉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믿으면 확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것을 다시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 솔라 피데’(sola fide)입니다.

둘째,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셋째, 이 은혜가 너무나도 크기에 우리 생애를 그분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C. T. 스터드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분을 위한 어떤 희생도 결코 위대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와 헌신을 하고 난 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자기 헌신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아는 ‘오직 믿음’의 사람은 ‘나의 헌신은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넷째, 현대판 반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인 안식교와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 등 십자가를 믿는 것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배격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제1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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