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오직 은혜 Sola Gratia
3장 오직 은혜 Sola Gratia
  •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 승인 2017.10.1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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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오직 은혜 Sola Gratia

 

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창 32:21-32)

주의 은혜의 해(눅 4:16-19)

용서하시는 은혜의 풍성함(행 9:1-9)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롬 9:6-18)

성도가 누리는 은혜(고후 12:7-10)

새 언약의 은혜(히 8:10-13)

 

 

 

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장영일 목사(범어교회)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 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 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 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 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 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 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중략)… (창세 기 32:21-32) | 찬송가: 288장, 310장

한반도가 세계의 화약고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그 발사체인 미사일의 시험 발사는 미국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반도 의 정세는 극도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국내적 정치상황은 대통령을 탄핵으로 면직시키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 되어 새 정부를 꾸리고 있는 중에 국내 정치권이 다당제가 되어 국론을 결집시키기에 힘겨운 모습입니다. 출산율은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청년 실업률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어 나라의 미래가 어두워 보입니다. 이와 같이 나라 안팎으로 혼란과 공허함이 가득한 이때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피할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 성도들이 취할 행동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주께로 나아가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하면 무조건 될까요?

야곱이 외갓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얍복 강변에서 드린 기도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당시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못지않은 개인적인 위기였습니다. 금의환향하는 길이 었지만 자기를 맞서 기다리는 에서 형님이 문제였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친 야곱이었기에 돌아오는 자기를 형이 어떻게 맞이 해 줄지 불안했습니다. 20년 동안 이룬 가족과 재산을 몽땅 빼 앗길지 그리고 자기의 목숨은 어떻게 될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 다. 이때 야곱은 얍복 강변에서 천사를 만나 씨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 교인들이 다급하고 힘든 환란에서 드리는 최고의 기도 모델로 기억하는 사건입니다.

 

간절한 기도에 대한 오해

우리는 이 천사와의 씨름 사건을 보통 기도의 간절함으로 해석합 니다. 그러면 그처럼 지금도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 리의 요구대로 들어주시는가?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기도 때문입니까? 기도는 하나님도 움직이는 만능 열쇄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응답은 은 혜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기도에 대한 보답인가요?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억울한 과부의 하소연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하시며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8장).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고 찾는 이는 찾아 낼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8). 구약에서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말씀들에서 기도의 주도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서 주도성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면 그것은 은혜라기보다는 요구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그 응답은 은혜가 아닙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의 씨름 사건을 곰곰이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보인 그의 태도를 주목해 봅니다. 그는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 성공하여 돌아온 것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다녀온 사신의 전갈이 에서가 병사 사백 명을 데리고 자기를 맞으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두려워졌습니다. 답답한 나머지 자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혹이나 에서가 공격해오면 도망치려고 준비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창 32:11). 솔직하고 진솔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야곱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준비시켰습니다. 그 예물 가운데 야곱의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창 32:20하).

야곱이 기도한 것은 그냥 두려워한 것일 뿐 사실은 예물로 형의 마음을 사서 문제를 풀려고 한 것입니다. 전혀 간절함과 주밖에 없다는 애절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양다리 걸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러고도 바로 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가족을 먼저 건너 보낸 후 홀로 남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라고 서술된 천사가 야곱을 찾아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씨름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사람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기도의 고전인 오 할레스비의 책 『기도』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기도의 영이 오시어 우리의 영을 건드리고 그에 대한 반응이 곧 기도가 시작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신비이고 기도의 은혜입니다. 종교의 기도 행위는 사람이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도는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을 찾아오시어 부르심으로 기도는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기도는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인간의 간절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흔들 작정을 하시고 다가오시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그래서 다윗은 이미 이렇게 시편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하나님의 본심이 이러하니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이미 기도에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용사 혹은 기도의 대장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입니다. 물론 기도에 많은 시간을 드리고 기도에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의 첫 번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재적인 경험은 기도로 문제를 풀고 기도로 능력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주시려고 찾아오시고 씨름을 걸고는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이 씨름 사건을 통하여 야곱은 개명됩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바뀝니다. 아시는 대로 그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란 뜻입니다. 그 부모가 쌍둥이의 출생 과정에서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야곱이라 불렀는데, 태어날 때 형도 이기지 못했던 자가 이제 하나님을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씨름에서 이기고 진 것은 판정자가 판단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이겼다”고 선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져주시고 붙여준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도라 불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져주신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찾지도 구하지도 스스로 돌이켜 의의 길을 걷지도 않는데, 찾아오시고 나타내시고 우리를 불러 의롭다 해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져주시는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져주시는 은혜입니다. 내려놓으신 은혜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조력도 협조도 들어가지 않은 하나님의 행위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져주시고 내려놓으시는 데 인간이 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집회 중에 자주 부르며 은혜를 깊이 느끼는 찬송이 있습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우리 성도가 혼란과 공허함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일어날 힘 전혀 없는 우리에게 다가와 손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면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일어나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론 어떻게 해도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마약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은혜면 족하다는 그 믿음이 우리의 희망이 되고 꿈을 키워 나가는 능력입니다. 더구나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는 만유의 주재이시며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일어나 세상으로 갑시다. 하나님의 은혜면 됩니다!

 

 

주의 은혜의 해

이상복 목사(광주동명교회)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 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6-19) | 찬송가: 304장, 305장

성경의 주인공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첫 메시지를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첫 선포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 느니라”라고 기록합니다(마 4:17). 저자 마태는 유대인 동족을 향해 서 예수가 바로 다윗 왕의 후손이며 성경이 예언한 그 메시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저자로서 헬라인이며 역사가요 의사인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전합니다(18~19절).

누가는 가난한 자를 어떤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눈먼 자, 병든 자, 눌린 자 혹은 마음이 아픈 자, 귀신에 매인 자들이며, 예수는 이들을 자유케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를 통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19절에 ‘전파’라는 단어는 ‘선포’라고 해야 훨씬 더 의미가 분명합니다. 전파는 더 널리 알리는 반복성이 강조되지만 선포는 선포자의 권위와 내용이 더 강조됩니다.

 

은혜의 의미

‘은혜’라고 하는 것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사랑의 조치 또는 베푸신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사탕을 주면 최고입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이런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은혜 받았다 하고 감동을 받으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나 기쁨을 주는 정도의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는 아주 강력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셨는데, 원래의 말씀인 이사야 61장을 보겠습니다. 1-2절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문장이 한 번 끊어집니다. 그러고 나서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 하면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즉 이 모든 자들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보복’,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는 애굽 땅에 열 번의 재앙을 쏟으셔서 온 애굽을 초토화시키고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그 이면에는 애굽에게 무서운 심판을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후에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지 70년 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시는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통해서 그 막강한 바벨론을 졸지에 무너뜨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조금 더 주는 복이나 적절한 배려 정도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자에게는 엄중한 심판이 함께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고자 하시는 자에게는 아주 강력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은혜는 ‘해’라고 기간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보복에 있어서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복, 하나님의 심판은 날처럼 짧은 순간인 것입니다. 소돔성에 유황불을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강력하지만 짧다는 것이며,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길다는 표현입니다.

 

은혜의 역사

창세기 6장 5-7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사람과 함께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엄중하게 심판하시지만, 정반대로 노아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조치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까지 함께 구원받고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정도가 아닙니다. 악한 온 세상을 궁창 위의 물과 땅 아래 있는 물로 완전히 다 쓸어 없애며 심판하실 때, 정반대로 노아에게는 하나님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임하지만 노아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엄청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의 표현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봅시다. 야곱은 속이는 자, 뒤에서 붙잡는 자, 간사한 자 그렇게 비굴하게 산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사랑하셨고, 벧엘에서 친히 은혜의 사닥다리를 보이시며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나타나시고, 약속하시고 친히 믿음의 훈련을 시키셔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모든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반대로 에서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결국 에서는 자기 식으로 살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에서를 버렸다고 했지만, 실제는 에서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가 함께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면 비굴한 자가 나중에는 존귀한 자가 됩니다. 속이던 자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나아가는 자가 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능력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20장 6절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하며 일방적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조건을 뛰어넘는 강력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 은혜를 베푸셔서 초라한 목동인 그를 지휘관으로 세워주시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는 보호하셨으며 나중에는 그를 왕으로 세워 끝까지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던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거부했던 사울 왕의 결말은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온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는 초대교회 공회의 선언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은혜는 그냥 더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로마서 5장 20-21절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은혜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이 강력한 은혜를 베푸시면 그 누구도 변화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수만 도의 강력한 불이 마침내 돌과 철을 녹여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임하면 흉악한 강도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가장 천한 자도 존귀하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와 인간의 모든 약점을 이기고 반드시 승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바꿔 놓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입니다. 왕의 사면권과 같습니다.교회에서 조금 감동받고 몇 푼 도움 받는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구원과 영원한 축복과 모든 것을 이기는 승리의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나님의 큰 사랑의 결단,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 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함

19절을 다시 보면 “주의 은혜를 선포한다”라고 하지 않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가 아닌 특별한 단어 ‘덱토스’(dektov")를 사용했습니다. NIV에는 ‘하나님의 호의, 자비의 해’(the year of the Lord's favor)라고만 표현했고, 또 원어 조금 더 가깝게 번역한 성경에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시는 해’(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어 간체 성경에는 정확하게 ‘희년’(禧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희년’을 선포하시는데 이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안식일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안식일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구별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곱째 날 내게 와서 이날을 동참하게 하라” 하십니다. “일곱째 날에는 일하지 말고 너와 네 가족, 네 종들도 쉬게 하고 짐승들도 쉬게 하라” 하시고, 그날 하나님은 우리를 품으시고 치유하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안식일은 모두에게 이러한 기쁨과 축복이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 단계로 일곱째 해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그해에는 농사를 짓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해에 나온 소출은 네가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 나그네, 고아들로 하여금 거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해에는 땅도 쉬게 하고 주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기쁘고 배부르게 먹는 해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안식년이 일곱 번째 되는 해, 즉 50년째 해를 하나님이 특별한 해로 정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 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8-10)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안식년에는 이스라엘의 종 된 자들이 자유를 입어 돌아갑니다. 그런데 50년째인 희년에는 모든 종들, 빼앗긴 사람들, 빼앗긴 기업들이 다 원래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이날에는 하나님이 온 백성과 모든 지역에서 뿔 나팔을 불게 하셔서 “하나님의 희년이라. 하나님이 자유를 선포하노라. 기업의 회복을 선포하노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쇄나트 하요벨’(수양 뿔의 해)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희년이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는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영원한 자유, 빼앗기고, 눌리고, 깨졌던 모든 것들이 다 회복되고 자기 기업이 회복되어 온전한 축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고, 이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선포는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반드시 그리고 신속히 전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 자유와 회복과 축복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사명입니다.

다시 레위기 25장 9절을 보면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 수장 절입니다. 하나님은 농사의 절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신약에 성취된 것을 보면,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유월절이 성취됩니다. 초실절, 즉 칠칠절은 성령이 오셔서 첫 번째 추수로 초대교회가 생겨나면서 오순절에 성취됩니다. 수장절은 모든 나라 백성, 구원받은 백성들을 다 불러 모으는 미래에 최후의 영적 추수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두 가지 절기가 추가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팔절과 속죄일입니다.

나팔절은 전국에 크게 나팔을 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대속죄일, 즉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깨끗한 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 위에 피를 붓는 속죄일이 옵니다. 이날은 두 짐승이 희생됩니다. 하나는 그 피가 지성소에 들어가서 뿌려지는 속죄의 어린 양이고 또 하나의 양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아론이 안수함으로 전가시키고 그 양을 아주 먼 광야로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2-13절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의 죄과를 멀리 버리셨다.”

왜 원치 않는 종이 되고 불행이 오고 문제가 생깁니까? 빚을 지고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빚과 죄는 원래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속죄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깨끗한 그 피, 그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너희에게 자유를 선포하노라. 너희에게 회복을 선포하노라.” 그것이 희년의 원리인 것입니다.

6.25 동란 끝에 있었던 반공포로 석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휴전이 몇 년을 끌었습니다. 문제는 북한 측에서 제 시한 포로 명단이 정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한 측에서 제시 한 명단은 12만 명인데 북한 측은 2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유는 포로들이 북한에 와서 전향을 하여 북한군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포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협상이 늦어져서 결국은 ‘포로들의 자유의사로 선택하게 하자’고 최종합의를 하여 중립국에 데려다가 포로 교환을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바로 그 직전인 1953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이 밤중에 헌 병사령관을 부릅니다. “특별조치를 시행하라. 반공포로를 유엔 군 모르게 석방하라.” 그리하여 며칠 사이에 비상작전이 펼쳐지는데 유엔군이 모르게 감쪽같이 수만 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됩니다. 석방된 반공포로들에게는 대통령의 특별조치가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최고의 왕이신 하나님의 특별하고 강력한 사 랑의 결단이며 영원한 조치임을 기억합시다. 그 결단과 조치는 우 리의 영원한 구원이고 천대까지 이르는 영원한 축복이며 “내가 너 와 함께 하리라” 하신 영원한 약속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영원히 승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 의 은혜라”, 다윗처럼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 까”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완전하고 영원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심을 믿고 늘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용서하시는 은혜의 풍성함

정연철 목사(삼양교회)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 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 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중략)…(사도행전 9:1-9) | 찬송가: 288장, 304장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나에게 추가적으로 덧붙여진 마치 부적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 은 늘 흐리면서도 신앙생활을 잘하면 지금보다 더 큰 복을 현생 에서 누리게 될 것이라는 욕구에 호응하는 것이 목회의 초점이 되고 말았으며, 나아가 교회가 이러한 믿음의 당연성을 주도적 으로 양산해 내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렇 듯 종교개혁의 취지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 으로 돌아가자는 태도는 어찌 보면 교회가 종말을 인정하지 않 는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왜곡되고 변질 된 믿음의 태도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교회의 미래와 어떠 한 연관관계를 가지게 되는지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회심과 소명의 충격

먼저 사도 바울의 회심과 소명을 통하여 교회의 과거와 현재 와 미래를 조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울의 하나님에 대한 신 앙심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고, 이러한 열심이 자 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게 되 는 믿음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길이었고, 교회를 지켜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신 이 인정받고 살아가는 길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기회를 통하여 사울은 자신의 이러한 길이 전적으로 잘 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의 부르심 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울은 여기서 참 신앙을 만남으로 자신이 신앙해 왔던 하나님이 거짓된 하나님이었고, 나아가 참 하나님 은 바로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은 젊은 청 년,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전 생애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현실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의 하나님에 대한 앎이란 거짓된 신학이요, 거짓된 규범이요, 단지 자신의 주관적인 앎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사실은 언약의 본질이 훼손된 종교란 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없이는 늘 방치되고, 훼손되고, 더 나아가 참 하나님을 더 치밀 하고 더 계획적으로 박해하고 핍박할 수밖에 없는 당연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인생 전부가 허사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사울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다만 주님이 바울이라 불러주기 전까지는 바울이 아닌 사울일 뿐입니다. 주님이 만나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까지 사울은 자신이 무능자, 죄인, 파괴자, 핍박자임을 깨닫고 알아가는 처절함을 안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죄의 깊이와 넓이와 무게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죄가 있는 곳에 용서가 있음을 깨닫게 되며, 죄의 가리어짐을 입은 은혜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제도적 개혁을 넘어서서

오늘날 교회가 개혁을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언제나 제도적 개혁을 말할 뿐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개혁을 기존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추가하거나 또는 무언가 변화함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허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땅에 묻지 않고서는 한길조차 발을 뗄 수 없게 하시는 것이 바로 돌이킴이요, 회개요, 새 언약의 질서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소명과 회심을 통한 변화된 참 교회의 모습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이방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세속적 교회상을 허물어버리는 것으로 종말론적인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것으로 대체하는 방식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과감하게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고 오직 참 이스라엘을 가려내시는 하나님의 행위만을 믿고 의지해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지향해야할 미래요 개혁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참 하나님을 통하여 알게 된 진리를 율법적 규정과 장로의 법 전통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성경해석의 기초로 하여 생각하며, 누리며, 정죄와 미움보다는 관용과 하나됨을 지향하며, 법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법의 시행을 고민하고 적용하며,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교회입니다.

 

자기 부인의 삶은 용서받은 은혜로 가능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확고한 터전 위에 선 교회를 말합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의 성취성이 자신에게 미쳤음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당사자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 됨의 터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덤으로 얻는 은혜요 죄에서 가리어짐을 입은 교회의 모습입니다.

또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 되심의 표증이며, 나아가 성도의 힘의 원천이요, 정체성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이전 것에 대한 강한 애착, 자신의 것들의 포기와 무너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현실에서의 기도, 예배, 모임, 교인과의 교제 등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도출해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단지 자기라는 욕망의 한계만 도출될 따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파괴된 자아 위에 올려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주님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의 근거요 내용이요 결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가치, 즉 인간의 분별력, 이성, 행위, 경험, 윤리, 도덕 등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러한 가치기준으로 살다가 거짓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하고 참 하나님을 핍박하였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을 만남으로 바울에게 나타난 현상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이전에는 자신을 불러주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불림 받고 있다는 것이고, 이전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눈이 먼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의 하나님은 사울 자신이 부르며 순종이 강요되었다면, 지금 참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히 불러주시고 자신의 죄를 일깨워주시고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옮겨져 먹고 마시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는 이전의 자신의 관점이 철저히 배제되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울의 지난 삶이 장님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어두움 속에서 대면한 사울의 변화된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것은 죄인 됨의 토대 위에서 오직 주만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것을 기쁨과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되었음을 뜻합니다. 종교적 상상력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도 넘치는 은혜

그렇다면 과연 ‘자기’가 없는 오직 ‘신앙’만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러한 물음은 ‘사람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그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먼저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하나님을 시험하는 물음입니다. 교회 역사를 들여다보면 늘 사람이 중재자가 되어 구원을 중재했다는 내용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또한 그러한 범주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결론으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 홀로 행하시고 이루어 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언약궤를 가져오는 나라는 백전백승한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그로 인해 언약궤를 자기 나라로 가져오기 위해 전쟁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언약궤가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정신이 있어야만 전쟁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과연 언약궤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언약궤가 하는 일은 ‘분리’해 내는 일입니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언약의 정신을 담고 있는 나라를 참 이스라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전쟁에서 언약궤가 독단적으로 언약의 정신을 훼손한 자들을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 할 것 없이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따로 두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구약이란 옛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율법과 규범에 파묻혀 죽임을 당하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 언약을 반포하시고 모든 인류를 심판받을 죄인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곧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권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가 바로 새 언약의 선포이며, 참 믿음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 아래서 사울은 늘 자신의 민낯을 그대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신앙 흉내 내기와 모방하기란 모든 육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행한 일련의 종교적인 행동들이 이스라엘을 더욱 이방 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곧 ‘바울의 최후의 실상’을 미리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작업은 성령만이 해내십니다. 에스겔 11장 19절에 보면 자신의 행위와 업적과 상관없이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만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오게 되면 곧 우리의 자리가 ‘하나님마저 죽이고자 하는 자리’임을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자리로 만드신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자백하고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친히 자신의 몸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자기 몸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가치를 드러내는 데 활용되고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바로 그곳이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역대하 6장 36절에 보면, 그 어떤 인간이든 쉴 새 없이 주어지는 말씀의 요구 앞에서 “죄 없는 자가 없고, 심판받지 않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말씀에 입각한 저주가 있는 바로 그곳이 유일하게 천국의 문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비하신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교회란 바울이 사울로 있을 때의 율법의 잣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 새 언약의 기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몸을 두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직 주님만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두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 못하며 주의 용서와 상관없는 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높임이 전제되지 않은 높임이란 자기 위선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되다”고 토로한 솔로몬의 지혜의 찬양이 그러하며, 그리스도의 때를 소망하고 기뻐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러합니다. 이들에게 비로소 죄 가운데서 생명이 찾아왔기에 이러한 찬양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목숨을 다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저주의 몸에 거룩한 말씀을 담고 있게 된 특별한 은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만을 그들의 삶의 전부가 되게 하시는, 우리들의 생각 밖에 존재하는 믿음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통하여 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질서 가운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도 동일하게 일하고 계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란 의가 있는 곳에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는 곳에 바로 용서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알게 하심으로 신앙의 선진들이 먼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의 때를 기뻐하며 소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고난 속의 기쁨이요 죽음 속의 생명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혁하는 교회란 죄 가운데서 용서와 기쁨을 누리는 교회일 뿐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쉬지 않으시고 교회를 통하여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의가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추함을 내려놓사오니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금 주의 은혜를 덧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김기철 목사(정읍성광교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 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 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중략)…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로마서 9:6-18) | 찬송가: 320장, 204장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에 이런 일화가 나옵 니다. 영국에서 비교종교학회 회의가 열렸는데,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성육신의 교리’가 기독교의 독특성이 아니겠느냐고 말 하자 어떤 학자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 도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학자가 아무래 도 ‘부활 교리’가 기독교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하자 이 번에는 또 다른 학자가 죽은 자의 환생은 기독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20세기 영미권 최고의 기독교 지성이라고 칭송받는 영국의 루이스(C. S. Lewis) 교수가 일어나 “그 대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른 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기독교만이 제공하는 일관성 있는 메시지는 ‘은혜’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에 참석자 모두가 동의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늘 감사하며 살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매사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택 이 은혜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은 물론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까지 바뀝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자녀 삼지 않으심

본문 6-8절은 참 이스라엘의 조건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 사도의 규정은 6절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 이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6절). 혈통 을 이어받아 이스라엘 사람으로 불리고, 4-5절에 나열된 많은 특권(양자,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 이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분명히 대 단한 특권을 가졌습니다. 일찍이 말씀과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께 예배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받은 그들이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5절)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되지 않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원리를 설명하는데, 그 원리는 ‘은혜’입니다. A. W. 토저는 은혜는 “아무 자격도 없는 이들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하 나님의 선하심이다.”라고 했고, 저명한 교의신학자인 루이스 벌 코프는 “성령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서 값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이다.”라고 했습니다. 강해설교의 대가인 존 맥아더는 “자격 없는 죄인들의 삶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너그럽고 관대한 사역”이라고 했고, R. C. 스프로울은 “그리스도의 공로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일을 기꺼이 베풀어 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구원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실패에 의해 좌절되지도 않고,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노력에 종속되지도 않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의무에서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갚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베푸신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혈통이나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며,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녔다고 다 이스라엘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고 은혜입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세 가지 공로(적정공로, 재량공로, 여분의 공로)를 모두 부인하고, 구원은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약속을 통해 자녀를 삼으심

그러면 혈통 외에 또 다른 참 이스라엘의 조건이 있는가? 그 참 이스라엘의 조건을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는 이삭 외에도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있었고, 후처 그두라를 통해 낳은 여섯 명의 소생이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을 약속의 자녀로 간주하지 않고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절). 혈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혈통을 따른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됩니다. 이 말씀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자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원리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육신(혈통)을 따라서는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제 10-11절에서 약속의 자녀를 거쳐 하나님의 선택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성격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출생을 앞두고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은 야곱과 에서의 차서를 구분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장차 참 이스라엘을 규명하는 데도 기준이 되는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기라”(12절)는 말씀을 11절에서 신학적으로 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선택은 로마서 8장과 9장을 의미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선택의 중요한 원리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아무런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을 때 그들을 주권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점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간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작위적 선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입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사 41:14)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선택된 자의 연약함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속죄로 담보된 의로운 부르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12-13절에 리브가에게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선택받은 자인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받지 못한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13절). 하나님의 선택 속에는 선택한 자에 대한 사랑이 있으며, 반대로 선택하지 않은 자에 대한 미움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미워했다’는 말이 하나님이 미워해서는 안 될 사람을 까닭 없이 미워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에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야곱을 사랑하신 반면 에서는 사랑하지 않으셨고, 야곱은 불쌍히 여기셨지만 에서는 불쌍히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은 에서처럼 남자답고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고, 야곱처럼 사기꾼이요 거짓말 잘하고 문제 많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본보기입니다. 하나님은 왜 에서보다 야곱 쪽에 가까운 우리를 택하셨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을 만한 자격,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야곱 같은 사람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한 강도의 요청을 받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악자를 즉각 구원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진술은 읽는 사람에게 여전히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이 과연 정당한가? 그 정당성에 대한 변호가 14절부터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이르는 구원의 경륜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데에는 혈통의 순서도, 선악 간의 행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구속사에 쓰임 받을 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은혜로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가 가진 어떤 조건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합당한 대가를 받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를 심히 싫어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감옥에 잡아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인 방법으로 그를 부르셨고, 거기서 거꾸러진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교회에 오게 된 계기가 다양하겠지만 우리도 사도 바울의 구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건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은 은혜 입은 자로서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저 받은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에 감사하기에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어야

본문 13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을 바울은 14절에서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신가?”(14절)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판단할 때에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것은 분명한 차별입니다. 보통 정의는 공평과 평등을 구성요건으로 합니다. 정의는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양심의 소리이고 상식에 속하는 일반 규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만 이유 없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드러난다는 것인지 우리는 계속되는 바울의 논증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5-16절에서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사례를 출애굽기 33장 19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모세와 바로의 이야기로 연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모세의 선택을 야곱의 선택과 비교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자신의 긍휼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겨 선택하셨음을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망하거나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모세가 세워졌고,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입니다. 야곱의 선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또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에서 모두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어 마땅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긍휼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에서는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게 됩니다.

바울은 17-18절에서 바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에 대한 말씀은 15-16절에 나타난 모세를 향한 긍휼과 대조를 이룹니다. 바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언급은 ‘강퍅’이라는 말에서 정의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긍휼히 여기셨으나, 바로는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바로의 강퍅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대적했던 소위 10대 재앙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세에 대한 사랑과 에서에 대한 미움을 모세에 대한 긍휼과 바로에게 주어진 강퍅에 중첩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에게 주어진 강퍅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강퍅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전파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아마 바로가 강퍅하지 않고 순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냈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바로를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바로의 강퍅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을 좀 더 큰 그림 속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이 엄마와 나눈 대화 내용을 가사로 삼은 노래가 있습니다. 1974년 멜바 몽고메리(Melba Montgomery)가 불러서 인기를 얻은 ‘No Charge’라는 곡입니다. 한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들이 종잇조각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종이에는 잔디 깎은 대가 5달러, 침대 정리한 대가 1달러,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본 대가 등 여러 가지 심부름 가짓수를 나열한 후 총 청구액 14.75달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엄마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 뒤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홉 달 동안 뱃속에서 키운 값 무료, 아플 때마다 잠 못 자고 너를 위해 기도하고 간호해 준 값 무료, 너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눈물 흘렸던 일들, 네 장래를 위해 걱정하며 염려한 값 모두 무료.

“내 아들아, 이 모든 걸 다 더해도 나의 사랑의 값은 무료란다.” 엄마의 말씀을 다 들은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를 올려다보고는 “엄마, 정말 사랑해요.”라고 말하더니 다시 펜을 들어 종이 위에 아주 크게 썼습니다. “완불!”

여러분, 로마서 3장 24절 말씀 기억하시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불도저 앞에서 삽질한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판단이 더 정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 내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죄의 원인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판단을 믿고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옳고 그름을 자기 기준으로 정하려 하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 다른 이들이 받은 것과 비교하며 불평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의 일이 불합리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 된 인간이 전인적으로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절망적인 상태,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상태에 있을 때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조건이나 노력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선택하실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선택을 당연한 듯 요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를 때에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일생 동안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면서 진실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가 누리는 은혜

서한국 목사(광주남부교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7-10) | 찬송가: 298장, 304장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고 추구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성공’ 과 ‘행복’이란 단어입니다. 그런데 성공은 객관적입니다. 내가 제 아무리 성공했다고 우겨도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큼 소유와 능력과 위치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반대로 행복은 주관적입니다. 동일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 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이것처럼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 인류학자들, 문학가들, 예술가들, 종교가들이 나름대로 행복을 정의했지만 아직껏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사용되고, 반드시 알아야 할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나 행복이 아닌 ‘은혜’라는 말입니다.

사실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죄 와 사망에서 건짐 받은 것,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고 천국과 영생을 소유한 것, 내가 나 된 모든 것, 이 시간까지 생명을 유지 한 것, 적든 많든 소유한 것, 가정과 가족이 있음과 각기 소속된 교회가 있음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넘치는 은혜의 역사

은혜는 언제나 두 가지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받기에 부족한 분에 넘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코 스스로 얻거나 성취하거나 달성할 수 없는, 즉 어쩔 수 없는 인간 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강조되었습니다. 또 하나 는 미에 대한 개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다운 매력 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때 철저하게 공의로우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 죄에 대해서는 간과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으로만 보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다운 모습을 본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가 장 가까운 단어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선물은 그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을 자격과 가치와 공적이 있어서 받았다면 선물이 아니라 상급입니다. 값을 치르고 받았다면 선물이 아니라 구매한 것입니다. 빼앗은 것이라면 그것은 탈취이고 조건을 전제 로 한다면 뇌물입니다.

선물은 빌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 서 은혜를 정의하자면 ‘받을 자격(공적, 업적)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 랑에 근거해 그저 주시는 것’,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인간의 공로로 계산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 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은혜로 창조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의 역사에 나타나심에 감사합니다 (시 136편).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을 때에도 또 범죄하였을 때에 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 다(신 7:6-10).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이 요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영원 전에 존재하신 분(엡 1:4)으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요 1:3),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 을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전체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한 준비요, 야곱의 아들 중 유다가 며느리 다말 사이에서 아들 을 얻은 남사스런 이야기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의 비상 조치였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기생 라합에 대한 이야기, 모압 여인 룻을 등장시키고 보아스를 통해 후손을 얻게 하심도 개인 가정사를 기록함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한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이야기도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조와 역사를 열거함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입니다. 시편 132편 11-12절에서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성실히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을 폐위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왕조가 계속 바뀌지만 남방 유다는 다윗의 후손이 계속 왕위를 잇게 되고 그 왕권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심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심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내가 공적과 업적을 쌓아서, 선행을 베풀어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져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의 전 생애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말하면 부요와 높아짐, 승리와 형통, 건강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큰 감명과 감동을 받으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가난에도, 실패와 병고와 욱여쌈을 당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징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6)라고 합니다. 징계는 헬라어로 ‘파이데이아’라는 단어인데, ‘어린이’라는 뜻의 ‘파이디온’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징계의 뜻은 잘못하면 매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만드는 훈련’, ‘하나님의 합당한 자녀 만드는 교육’,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작업’입니다. 징계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위인 중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은혜의 사람

첫 번째는 요셉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쳐서, 또는 감옥생활을 성실히 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생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을 7년 흉년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실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하십니다(창 37:6-8). 그는 꿈의 내용을 잘 모르기에 형들에게 이야기함으로 미움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팔려가고, 종살이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총리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 교육하시는데,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게 하십니다. 고관인 그들을 섬기면서 애굽의 이인자로 바로를 섬기는 것을 배우고 정치가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후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와서 총리인 요셉에게 절할 때 비로소 어렸을 때 꾼 꿈을 생각합니다(창 42:9). 요셉이 총리가 된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총리의 자격을 갖추어 가는 것이 은혜요, 총리가 됨도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 번째 인물은 신약의 ‘바울’입니다. 바울의 삶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건강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지만 바울은 평생 지고 다니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지만 바울은 천막을 지어 생계를 유지하는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단지 궁핍한 중에도 자족할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은혜라고 여기지만 바울은 끊임없는 박해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지만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내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의와 명예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지만 바울은 믿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과 배척을 당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바울은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고 복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성도들이 바울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체험한 은혜에 대해 말씀하는데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떠나가도록 그가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낫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자랑하고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체험한 은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바울은 가시문제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상)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들음으로 자신의 환경과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것에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열린 귀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고민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환경과 상황과 사건과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영의 귀를 열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해결이 있습니다.

둘째, 겸손함을 유지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7절).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로마의 시민권자요, 당시의 최고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혼에 새기는 율법을 공부했습니다. 능력도 많아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했으며, 죽은 자를 살리고,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많은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바울은 교만해질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바울 같은 사람도 스스로 겸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도 역시 스스로 겸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겸손하게 하시는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업의 실패로 엄청난 고통을 체험하고 그것으로 겸손해졌다면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는 은혜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오해를 사고 누명을 쓰고 모함을 받아 큰 아픔을 겪고 그것으로 겸손해졌다면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은혜입니다(5, 9절). 사람은 누구나 열등의식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성장 과정에 대한 열등의식, 외모의 열등의식, 학력의 열등의식, 소유와 능력의 열등의식 등. 그래서 사람들은 열등의식이라는 감옥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열등의식을 감추고 싶어 하고 그것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약한 것을 간증하고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제 열등의식에서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이 열등의식이라는 병만 고쳐도 은혜입니다.

넷째, 덕을 세우는 복을 받았습니다(1-6절). 그는 14년 전에 경험했던 놀라운 신비적인 체험을 자랑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그만둔다고 했습니다. 덕은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연하고 합당하고 원리에 벗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중단하는 것이 덕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복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요,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성도는 모든 경우에 이 은혜를 고백하고 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말씀을 늘 들으므로 문제 해결을 체험하는 은혜, 교만할 수밖에 없지만 겸손을 체험하는 은혜, 감추고 싶은 약한 것을 자랑하는 은혜, 덕을 세우는 은혜를 우리 모두가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의 은혜

이규왕 목사(수원제일교회)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 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 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히브리서 8:10- 13) | 찬송가: 300장, 337장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실 때 제일 먼저 아담과 아담 안 에 있는 전 인류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행위 언약’이 라고 합니다.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 신 이 행위 언약을 위반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사망에 처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인류는 어떠한 선행이나 구제나 도덕 적인 행위로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없어졌 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 구제를 할지라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바쳐 선행을 할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행위 언약에 실패 하였고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입니 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행위 언약에 실패한 인류를 위한 세 가지 가능성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죄에 빠진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죄에 빠진 인간들을 단 한 명도 구원하지 않고 전부 다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두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가능성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에 전부를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이 전부 구원받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전부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이것을 지나온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멸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가능성은 현실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장 현실적이고 성경적인 사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 가운데 선택하신 일부만을 구원해 내신다는 것 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조금은 반감을 가지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부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분들은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의 가능성을 믿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훨씬 더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해 내실 때에 아무런 계획이나, 언약도 없이 그냥 그때그때 임시방편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을 하시든지 언약에 근거해서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를 구원하시는 언약을 가리켜 서 ‘은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옛날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아,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나는 정말 그럴 줄 몰랐다. 이렇게 나의 명령을 어겼으니 너와 네 후손은 이제 영생을 얻을 가능성이 없어졌다. 참으로 불쌍하구나!”라고 하나님께서 허둥지둥하시면서 이 뜻밖의 사태를 수습하시기 위해서 고심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허둥지둥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행위 언약을 맺기 훨씬 이전에 이미 영원 전에 구제책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행위 언약’을 어길 것을 뻔히 아시 면서도 행위 언약을 주셨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것 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국민이 법을 어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국가는 법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언약을 지키지 못한다 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언약을 주시지 말아야 한다는 법 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담에게 행위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행위를 부당하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모르신다면 그것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와 실패를 미리 다 예견하시고 대책을 세워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 언약’ 인 것입니다.

 

은혜 언약의 성경적 근거

웨스트민스터 7장 3절에서 은혜 언약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 하고 있습니까? “인류는 범죄하였으므로 행위 언약으로는 생명 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둘째 언약을 맺어주 기를 기뻐하셨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은혜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언약에서 그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과 구원을 거저 제공하셨고, 사람들이 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 도를 믿어야만 되도록 하셨고, 영생을 얻기로 예정된 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믿도록 해 주신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어리석게도 성경 어디에 은혜 언약이 있느냐고 부정합니다. 그러나 은혜 언약의 개념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인간 타락의 기사는 불과 두 장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나머지 모든 장은 하나님의 은혜 언약을 말씀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창세전부터 존재하였던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성경 전체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점진적으로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그림이 10km 밖에 떨어져 있을 때에 는 저것이 그림인지 떡인지 제대로 구별을 할 수 없지만 그 그림 이 점점 가까이 와서 눈앞에 왔을 때에는 그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는 영원 전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 언약을 점진적으로 계시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아무리 큰 그림이 자기 앞에 있어도 맹인은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시력이 아주 안 좋은 사람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맹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해서 아주 희미하게 아는 사람은 영적인 약시입니다. 우리는 성경 먼 곳에서부터 희미하 게 보이는 그림처럼 나타난 은혜 언약에 대해서 성경에서 확실 한 증거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3절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7장 26절에는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라고 하면서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질 그 언약에 대해서 그것이 영원한 언약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 13장 20절에서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언약의 피”라고 명백히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언약이 영원하려면, 그 기원이 영원해야만 하고 그 지속도 영원해야만 합니다. 만약에 2천 년 전에 그 언약이 시작되었지만 한 100년 뒤에 사라져 버렸다면 그 언약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갈 때에 그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1절을 보면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예정하신 영원한 목적과 뜻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시겠다는 은혜의 언약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기도 전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는 의논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고,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신 거룩한 존재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끝끝내 한 분이라고 우기지 마십시오. 반면에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끝끝내 주장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고,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 사이에는 의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타락하게 될 텐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들 중의 일부를 죄와 타락으로부터 구원할 것인가라는 은혜 언약에 대한 의논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더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궁한 감사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죄에 빠진 인간들을 다 버릴 수 없으셨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에 일부를 선택할 테니 성자 예수는 육신을 입고 내려가서 내가 택한 백성들의 죗 값을 갚아라. 그리고 성령은 때가 되면 내가 택했고 성자가 피 흘려서 죗값을 갚은 그 영혼들에게 역사해서 그들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여 예수를 믿게 만들어라”. 이것이 성부, 성자, 성령 간에 이루어진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 누구도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핵심은 성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성자 예수님이 피 흘려 속죄하시고 성령님이 그들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각자에게 구원의 주관적인 체험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계획이 영원 전부터 작정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 언약의 내용

그러면 이처럼 영원 전부터 작정된 은혜 언약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성부가 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행위 언약을 위반한 죄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 죄는 속죄되어야만 합니다.

은혜 언약은 택하신 백성들의 죄가 속죄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오직 ‘피 로써만 가능합니다. 행위 언약에 실패한 죄인이라도 피 뿌림을 받으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은혜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9장 18절에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고 했고 또 22절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피 흘림이 있어야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언약은 행위 언약에 실패한 죄인들이 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혜 언약에 대한 시행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은혜 언약의 두 가지 시행방식

하나는 구약 시대의 방식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시는데 그냥 주시지 않고 짐승의 피를 통해서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오직 유대인들만이 그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흠 없는 소나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 방법이 얼마나 복잡한지 이러한 방식은 일 년에 단 한 번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매년 제사를 지내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제사를 평생 동안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제사의 방식은 이방인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구원의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희미하고, 협소하고, 어렵고, 일시적이고, 너무나 불편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옛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 8장 7절에는 ‘첫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이 첫 언약의 핵심은 바로 짐승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제 죄인들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힘들고 불편하게 짐승을 잡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길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 모두에게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새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새 언약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은혜 언약이 구약 시대에는 희미하게 ‘옛 언약’으로 나타났고, 이제 신약 시대에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새 언약’으로 나타났습니다. 옛 언약도 은혜고 새 언약도 은혜입니다. 어떤 분은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성경을 잘못 보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아주 나쁜 것이요 신약의 은혜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율법과 은혜,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원수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의 옛날 방식이 옛 언약이고, 은혜 언약에 대한 새로운 방식이 바로 새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옛 언약은 좋은 언약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언약입니다. 둘 다 좋은 언약이지만 새 언약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도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히 8:6)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첫 언약이 좋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흠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8장 7절에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했습니다.

둘째, 첫 언약은 한 나라에만 국한되었지만, 새 언약은 모든 나라로 확장되었습니다.

셋째, 첫 언약에도 은혜가 주어졌지만 새 언약에는 풍성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구약 시대의 첫 언약의 복은 주로 물질적인 것입니다. 땅이 넓어지고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축복은 물질뿐만 아니라 영적인 복까지도 함께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에 더욱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넷째, 첫 언약은 그림자요 낡고 쇠하여 없어지는 것이지만 새 언약은 실체요 영원한 은혜입니다. 히브리서 8장 13절에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보더라도 첫 언약은 낡아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첫 언약의 은혜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때에 사람들이 무서워했지만, 새 언약의 은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저를 위해서 피 흘려주시고 저를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저에게 갖가지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여섯째, 첫 언약의 은혜는 일 년간만 지속되었지만 새 언약의 은혜는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청난 축복의 보따리를 우리에게 안겨 주신 줄로 믿습니다.

 

새 언약의 축복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법이 돌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과 친백성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자나 작은 자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박사 학위를 몇 개씩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게 놓고 알파벳 A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하나님과의 은혜 언약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지식을 얻게 됩니다. 또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과거를 들고 와서 자꾸만 시험을 합니다. “야, 너 과거에 이러한 죄를 지었지?”라고 계속해서 추궁합니다.

효과도 없는 죄의 복사판을 들고 와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귀야, 이미 원본은 없어졌느니라.”고 당당히 맞서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여, 저에게 이 언약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주시옵소서!”라고 믿음으로 담대히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언약의 축복을 받는 자

그러면 새 언약의 축복은 누가 받게 됩니까?

첫째, 나는 행위 언약에 실패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나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 영원히 사함 받는다고 고백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나는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의인이 오기보다는 자신이 행위 언약에 실패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간혹 회개와 믿음이 은혜 언약 안에 들어가는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영원 전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을 주신 그 축복의 결과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성령님이 창세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열매로 나타나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은 은혜 언약 안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 영원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열매요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하는 것과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감사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의 언약 가운데 영원 전부터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 깊이 깨닫고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새 언약의 축복을 저에게 무궁무진하게 쏟아 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담대히 간구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게 된 믿음의 은혜는 그들의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니, 통상으로 말씀의 사역에 의해 공작된다. 또한 말씀의 사역과, 성례의 시행과 기도에 의해 신앙은 자라고 강화된다. (신도게요 14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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