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2장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 승인 2017.10.1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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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막 1:1-4)

살리는 자, 죽이는 자(막 3:1-6)

지식을 넘어 온전한 믿음으로(요 6:41-46)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14:3-6)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는가?(요 10:22-27)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골 1:16)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

김찬곤 목사(안양석수교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마가복음 1:1-4) | 찬송가: 288장, 585장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복음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이심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새롭게 나아 가는 복된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방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보통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마태복음을 먼저 읽습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가운데 두 번째로 놓여 있어서 기록상 두 번째인 줄로 알고 있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적으로는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복음서이기에 예수님을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세주와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보를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복음의 기록 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의 곁에는 마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마가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로 마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로마 에서 기록되었고 또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예수님의 가계보(家系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종의 족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 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은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말씀보다는 행동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유대인들의 관습, 가령 음식을 먹기 전에 손 을 씻는 일이나 밖에 나갔다 오면 물을 뿌리는 일 또는 유월절이 면 양을 잡는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마에 사는 이들은 유대인들의 언어나 관습에 생소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복음에는 로마의 화폐인 ‘고드란트’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또한 로마의 직명인 ‘시위병’이라는 단 어도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가복음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은 이방인인 로마인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에 비유대인들을 위한 배려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비유대인인 우리들이 이해하기 좋은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게다 가 복음서 중에서 분량도 제일 적기 때문에 복음서를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필의 동기

마가 요한이 본서를 집필할 당시 교회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베드로 나 바울 같은 지도자들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순교하였으며(A.D. 67년경) 기독교인들은 카타콤에 갇혀 순교에 직면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는 고난과 순교의 맥락에서 기독 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을 해야 할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 순교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와 격려를 해주어야 했기에 본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과 특별 히 고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면서 동시에 마가복음의 주제를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 첫 구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마가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 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문 1절은 복음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앙겔리온

이 복음이라는 말은 어떤 추상적인 내용을 기쁨으로 와 닿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한 내용의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이는 ‘좋다’를 뜻 하는 ‘유’와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온’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복된 소식’, 말하자면 영어의 ‘good news’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 이 이미 복음이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특별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마가는 우선 여기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사실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도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의 문학작품이나 이방인들의 비문에서도 사 용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다른 자료를 통해서 이 미 복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오늘 본문 에서 굳이 복음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복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먼저 구약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선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복음의 의미를 살펴보고, 그 다 음으로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복음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진짜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복음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이른 바 칠십인경이라고 부릅니다. 이 칠십인경에도 복음을 뜻하는 ‘유앙겔리온’과 연관된 단어들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구 약 성경에서 복음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나라에서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 해서 이제 곧 그들에게 회복의 역사가 있을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 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여기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다”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칠십인 경은 이것을 한 단어로 번역해서 헬라어 ‘유앙겔리온’의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 식’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에 해당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 면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의 끝부분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복음 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절에서 나타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 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0-11).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이 임하셔서 친히 그의 팔로 자기 백성들을 다 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들에게 소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임하시면 그들에게 회복의 역 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 나님은 목자와 같이 그들을 먹이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가지 않고 복음에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포로가 되어 잡혀간 그들에게 복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힘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방법대로 살면서 자기들의 복음 안에 살았던 것 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여기에도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이 두 번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복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 스리시면 평화와 복과 구원이 자동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임하셔 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새 시대가 열린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 바로 복음임을 믿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그들에게 이 복음이 필요 했기에 메시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새롭게 회복시키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그들은 늦게나마 믿고 있 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복음

그러면 이제 그 당시 이방인들, 특히 로마 사람들은 복음을 어 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06년 소아시아의 프리에네(Priene)에서 헬라어로 쓰인 비문들이 발견되었 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주전 9년, 즉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 에 쓰인 비문이었습니다. 이 비문은 그 당시에 소아시아를 통치하던 로마의 총독 파울루스 파비우스 맥시무스(Paulus Fabius Maximus)가 그곳 사람들에게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숭배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문에 복음이라 는 단어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 비문에서 맥시무스는 로마의 가이사, 곧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를 가리켜 서 신이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생일을 가리켜서 이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렇게 적은 이유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땅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주었으며, 이 세상의 질서를 확립했기 때문이 라고 밝혔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로마의 황제 아구스 도를 신으로 숭배해야만 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즉 그 당시의 로마인들에게는 복음, 곧 ‘유앙겔리온’이 가이사 아구스도가 임하여 그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새 시대를 열고 그들에게 구원과 평화와 질서를 주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 땅의 힘 있는 승리의 모습 즉 세상에서 강한 왕이 그들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든지 로마인이든지 간에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방법으로 ‘복음’이라는 단어와 친숙했습니다. 이것을 ‘내가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복음은 한마디로 강한 능력의 새로운 통치자에 의해서 새로운 승리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뜻했습니다.

언제든지 당대에 통용되는 언어를 가지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효과적인 법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기쁜 소식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가도 오늘 본문에서 똑같은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마가는 로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곧 그들의 생각이나 방향과는 다른 진정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힘차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당시의 상황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기 때문에 곳곳에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해야 만 했습니다. “신의 아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와 같이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었던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한 바로 그 와 같은 시대에 마가는 그가 기록한 마가복음의 첫머리에서 다 음과 같이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는 너무나도 놀라운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말은 도무지 통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쩌면 더 큰 핍박이 나 타날 수도 있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선포한 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게 태어났고, 생활반경도 다른 사람 들이 결코 우러러볼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 도 미약한 존재들이었고, 결국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 어 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이라는 메시지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신앙 때문에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마가도 로마에서 순교할 각오로 그 가 기록한 복음서의 가장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순교의 피와 맞바꿀 수 있는 그 복음을 그들은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신앙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 시며, 우리의 삶에 새로운 구원과 소망의 시대를 열어주실 분이 라는 것을 믿고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위기가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외칠 수 있는 바로 그 복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무엇을 복음으로 여기는가?

마가복음 1장 1절은 그 한 절만으로도 너무나 놀라운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전을 주는 이유는 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이 복음을 통해 놀랍게 변화된 사 람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요한은 오순절 성령이 강림할 때 예루살렘 교회 120명의 성도가 모여서 기도할 수 있는 다락방을 내어줄 정도로 부유한 집에서 자랐으며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 무래도 나약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다가 너무 힘든 나머지 중간에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는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는 바울과 데려가자는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생겨 서로 갈라서 게 한 장본인이 바로 이 마가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복음을 깨닫고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를 “나의 믿음의 아 들”이라 불렀고, 바울도 나중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내 선교사역에 아주 유익한 사람이니 데려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는 이 말에 마가는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오직 예수가 아닌 황제의 복음이나 아니면 잠시 지나면 사라질 것들에 취해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어떤 것이 내게 복음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현재 믿음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교회에 발을 디딘 동기가 다를 수 있고, 현재 믿음의 위치도 다를 수 있지만 마가를 변화시킨 복음이 우리 심령에 와서 부딪친다면 우리도 마가가 경험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바로 깨달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마가가 경험한 것 과 같은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종교개혁의 5대 강령 101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존경도 받으셨지만, 수많은 사람 들에게 많은 핍박과 조롱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 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처럼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자 신이 살기 위해 이웃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안식일에 선 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질문하십니다. 이 말씀은 저를 비롯한 성도와 목회자 그리고 이 시대에 우리 총회를 향한 주님의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리는 자, 죽이는 자

김상현 목사(목장교회)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 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마가복음 3:1-6) | 찬 송가: 288장, 369장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

본문 6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라고 나옵니다. 그 당시 가장 대표적인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함께 예 님을 죽이고자 결심하고 의논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었으며, 가장 잘 믿는다는 대표적인 바리새인들이 어느 날 잘못된 의식구조를 그들의 생각 안에 수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죽이는 사람들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표적인 보수교단이요,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요, 장로인 우리들도 어느 날 잘못된 생각과 의식구조를 갖 시작할 때, 우리도 얼마든지 이웃을 죽이는 행렬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5절). ‘완악하다’는 단어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생각으로 견고하게 굳어져 버린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즉 전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오염된 이기주의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삶 때문에 가정에서도 살맛이 나지 않고, 이웃들과의 관계도 힘들어지며, 직장에서도 소통이 어려워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결코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장 기쁜 마 음으로 만나고 싶은 얼굴들이 모여 있는 교회나 노회나 총회도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결정적으로 한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암 바이러스 같은 무서운 이기심의 정체도 이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종교적 이기심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노회 안에도, 총회 안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의 완악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을 살인자로 내몰고 있던 원인은 독단주의 신앙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믿음 없이 절대화시키는 것, 그래서 고소와 고발이 끊이지 않는 것. 그러나 우리는 신앙 에서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절대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적이며 교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중요하지 않은 어떤 한 부분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성경과 상관없이 절대화시켜 버릴 때 우리도 얼마든지 독단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독단주의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금식과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사고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8절에서 먼저 그들은 금식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주님 앞에 돌아와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너무 기뻐서 잔치를 연 세리 마태의 집에 계셨습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바리새인들이 “우리들도 금식하고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는데 어찌해서 당신들은 먹고만 있습니까?”라며 시비를 걸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금식은 정말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처럼 자 기의 금식을 절대화시켜서 금식하지 않는 이웃들을 정죄하기 시 작할 때, 바로 그때부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은 종교적인 규례로서 1년에 한 차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 같자 왜 당신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며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을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해야 할 것이다”(막 2:19-20). 금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니란 말씀 입니다.

지금은 죄인 마태가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기쁨의 잔치를 벌여야 할 시간인데,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하필이면 그때에 와서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독단주의적인 신앙이요, 개인 이기주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안식일의 경우입니다. 마가복음 2장 23절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쁘게 복음 전파 일정을 소화하느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배고픔을 느낀 나머지 이삭을 잘라 먹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제자들이 했다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막 2:24).

우리 주변에도 바리새인적인 사고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세상 법에 고소, 고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전후좌우 생각지도 않고 먼저 세상 법에 송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는지 어디 두 고 봐라. 돈이든 뭐든 네가 힘이 있으면 한번 해보자.” 하는 잘못 된 마음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 삶의 축복과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또한 바리새 인 같은 현대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안식일이라는 종교의식이나 전통을 절대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잘 안 지킨다고 서로를 송사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 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규례(39개)를 만들었으며 이 규례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을 잘 지키자고 규례를 만들어 놓고 오히려 이것이 자신들에게 올가미가 되어 사람들을 규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축복과 유익과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안식일을 주셨는데 이것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얽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축복이 아니고 무거운 종교적 부담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놓고 시비 하고 정죄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심 지어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던 것입니다(막 2:16).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독사 같은 자들이 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죄인들과 잔치를 열었으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의식구조는 “저희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24절).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겠나? 참 안 됐구나.’라고 이해하면 안 됩니까? 오늘날 이 땅의 바리새인같이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정죄하는 일에 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에게 날카로운 언어와 종교 적인 독설로 가슴에 상처와 아픔만 남겨줍니다. 이렇듯 종교 지 도자의 신앙 독선주의는 극단에 치우칠 우려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금도 이웃들을 허물거나 죽이는 일에 앞장서 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게 무슨 악한 행위 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이웃들을 살리려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무시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우리 이웃들은 죽어 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배우고, 우리의 마음을 연단해 나가야겠습니다.

이웃을 살리는 사람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자 가운데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돌을 다루는 석수장이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마른 손이 ‘오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중풍으로 오른손이 피 가 통하지 않아 말라 버린 것 같습니다. 현재 이 사람은 다리가 부러져 피를 계속 흘리는 것도 아니며, 단지 한쪽 손이 말라 손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갖게 된 것으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확대 해석한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줄 수 있지만, 당장 위급하지 않은 경우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면 안 되기 때문 입니다. 이 사람은 손이 말라 손을 쓸 수는 없지만 생명이 위급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정한 규례에 의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이 아닌 다음날 고쳐 주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안식일이어야 하고 안식일에 선을 베푸는 것이 참된 안식일의 정신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치료해서는 안되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정신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다음날 고쳐 주어도 되지만, 바로 즉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심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적인 사고 없이 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적 의식구조와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요약하면 전파하시고 가르치시며 치료하시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이웃들에게 복음이 되는 인생을 살 수 있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지탄받으며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던 세리를 돕고, 문제가 될 줄 아시면서도 죄인들과 앉아서 잔치를 열고 상대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돕고 이웃을 섬기고 있습니까?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5절).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평생 동안 그 손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건강한 손을 주신 것 을 감사하며 이웃을 죽이는 삶이 아니라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 가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많은 대 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 한 사람을 향한 진지한 예수님의 사랑, 그를 사랑하기 위해 마지막에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웃을 살리신 예수님! 이런 마음, 이런 태 도로 우리는 교회와 이웃과 총회를 섬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진정으로 나는 이웃을 죽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웃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지식을 넘어 온전한 믿음으로

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 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 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한복음 6:41-46) | 찬송가: 82장, 198장

오병이어 사건의 의미

보통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부르는 표적은 사복음서 전체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음서가 네 권인데 다 똑같지 않습니다. 가끔 ‘복음서 기록이 왜 똑같지 않 고 다른가?’ 하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서 네 권이 다 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이 밖에 나가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 고 한다면 다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특히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더 달라질 것입니다. 다만 몇 가지 특징적으로 중요한 일은 다 비슷하게 언급할 것입니다. 네 권의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할 때도 똑같은 말을 똑같은 방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다 실려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기 위해 분량으로 따지면 거의 삼분지 일 이상을 사용합니다. 모든 복음서가 똑같 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 당한 예수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표적 중에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길게 설명 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떡이라는 것입니다(요 6:47-48).

우리 성경에 떡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 이것은 떡이 아니라 양식이요 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문화에서 떡은 밥과 다릅니다. 떡은 기호품이지만 살기 위해 먹는 것은 밥입니다. 예수님이 생명 의 떡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을 주는 양식, 그것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의미에서 생명을 주는 밥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병이어 사건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받아먹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

먼저 성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난 후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요 6:31)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성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사람이 먹을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요 6:32-3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공급해 주신 양식이지만 먹고 나면 다시 배가 고플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양식인 데 반해서 예수님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요 6:49-51).

성경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모르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요 5:39-40).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미션스쿨이었는데 그 선생님은 시험을 치르고 난 후에 매번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놓고 혼을 내셨습니다. 학생들을 혼낼 때 성경 구절을 찾아 읽게 하고는 그 말씀에 기초해서 훈계를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선생님이 불신자였다는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를 생각해 봅시다.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노라 자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인 비밀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고 나무라셨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실상 교회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그저 자신에게 익숙한 종교적인 전통을 따라 살아갈 뿐입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곁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지어 놓고 그곳이 예배 처소라 주장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 진짜 성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각기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그저 자신들에게 익숙한 종교적 전통을 내세우면서 서로 다투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예배 장소가 그리심이냐, 예루살렘이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 4:20-24).

성경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필사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 필사는 상당 히 귀하고 여러 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 나 가끔 성경을 다 옮겨 쓰고 나면 신경통이 낫는다, 눈이 밝아진다는 등의 간증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선하시니 성경을 필사하는 도중에 특별한 은혜가 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신경통을 고치기 위해 성경을 필사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성 경을 필사하고 나면 도리어 팔목도 아프고 손가락도 아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헛된 소망을 품고 할 일이 아니라 필사하는 동안 성경을 꼼꼼히 읽으면서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깨닫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 안에 일천번제를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드렸던 일천번제는 일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한꺼번에 천 마리를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것을 일천 번 드리는 헌금으로 둔갑시킨 것은 성경을 왜곡한 것입니다. 더욱이 일천번제를 드릴 때 솔로몬과 같은 지혜와 부귀영화를 얻고 자신의 소원을 이룰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일 뿐 하나님 의 뜻을 이루는 것과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이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 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며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곳이 갈릴리 근처였기 때문에 예수님 이 자라났던 동네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 내력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나사렛에서 요셉의 아들로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이들이 알고 있던 정보가 틀리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점 은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요 6:38).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이셨던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고 성장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컨대 갈릴리 사람들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잘 알았지만 예수님이 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한 더 깊은 진리는 몰랐던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배우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 생명을 주시는 떡입니다(요 6:33, 35, 48).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더 잘 이해하려면 오병이어 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 뿐만 아니라 설령 돈이 있다고 한들 이천년 전 갈릴리 호숫가와 같은 벽촌에서 갑자기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어디서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그 자리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는 일종의 어린이용 도시락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나누어 주셨습니다(요 6:10-13). 불가능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천 명이라고 하지만 당시 풍습대로라면 남자들만 세었을 것이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수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배고픔만 면할 정도로 주신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난 후 남은 조각을 다 거두게 하셨는데 왜 거두게 하셨을까요? 특히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합니다. 이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 덕분에 얼마나 풍성하고 놀라운 잔치가 벌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은 굳이 예수님이 하시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은혜는 이처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풍성한 복을 거저 받는 것, 오병이어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한 엄청난 은혜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님의 능력에 놀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요 6:15).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기록을 보면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후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해서 그들 먼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시고, 당신이 뒷정리를 다 하십니다(마 14:22-23; 막 6:45). 그리고 본문이 묘사하는 것처럼 혼자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자신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임금이 되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결국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왕이 되십니다(빌 2:9-11). 바른 신앙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온 세상의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을 주목하게 하시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쓰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에서와 같이 정작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주목하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떠받들려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정말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임금,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왕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왕이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을 압도하는 능력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희생하는 왕이 되려고 하십니다(막 10:45).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주시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내어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떡을 그저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는 마술적인 힘을 가진 떡 정도로 생각했습니다(요 6:34). 마치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그저 마시는 물로 생각한 것과 같습니다(요 4:15).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육체의 썩을 양식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도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 수를 건너면서까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과 예수님이 주고 싶어 하시는 것 이 달랐다는 것입니다(요 6:26-27).

이 사람들이 오병이어 사건 후에 예수님을 임금으로 옹립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알고 사랑해서 예수님을 높이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그저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따라온 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요 6:26)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했던 이유 나 또 갈릴리 바다를 건너 예수님을 찾아오기까지 한 이유는 예 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이용해서 좀 더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자신 을 희생하는 왕이신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처럼 행세할지라도 실상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거룩한 희생과 섬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한평생 배불리 먹고 즐겁게 평안한 삶을 사는 것, 자기 꿈을 이루며 행복하게 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에 꼭 가르쳐 주고 싶어 하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예수님의 몸을 내어 주시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는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의 의미,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반드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진 사건인지 설명하고 계십니다. 보리떡과 물고기 같은 육체의 양식을 먹으면 육체의 생명을 얻을 뿐이지만, 예수님이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죽임 당하는 사건, 즉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는 사람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다시 살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염두에 두신 것이 확실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설교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전부가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마셔도 결국에는 죽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어 주는 자기 살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를 위해 깨어지고 썩어지면서 우리가 살게 되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살게 하시려고 자기 몸,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 이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저주와 형벌을 당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막 10:45, 벧전 3:18).

이처럼 예수님이 자기 죽음을 통해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총에는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나 죄인처럼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고 당연히 같이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사건이 벌어진 들판에서는 아이, 어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펼쳐진 풍성한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누구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 주시면서 남을 살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온 세상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 아무든지 믿고 따르는 사람을 영원한 천국 잔치로 이끌어 주시는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짐들이 벗겨지고 복락의 강수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 들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메마른 심령을 만져주심으로 주님의 깊은 심정을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 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 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 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3-6) | 찬송가: 487장, 94장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신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인가?”라는 질문은 다양성을 진리처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배타적인 물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 제목만으로도 불쾌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도전적인 질문은 기독교가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부적절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이 며 살아야 한다.”라거나 “교회는 언제나 사회에 봉사자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주제로 설교를 하면 세상은 박수를 칠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에 대해서 설교한 다면 그 역시 세상은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진리요 구원자”라고 설교하는 순간 세상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비판할 뿐 아니라, 교회를 배타적이며 관용 이 없는 옹졸한 집단으로 몰아세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여기는 이 사회는 자신의 삶을 지배 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절대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 기 때문입니다. 절대 진리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순간 상대적 진 리 위에 애써 쌓아 놓은 자신의 모든 것이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 지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는 예수님의 절대적 유일성, 예수 그리 스도의 유일한 진리 되심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주장하는 것을 저마다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종교다원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다원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02년 9월에 미국 911 테러 1주년 기념 추모 예배가 미국 하버드 대학교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추모 예배라고 해서 저 도 앞자리에 앉아 참석했습니다. 수천 명이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듣고 함께 예배를 드리겠다 싶었는데 깜짝 놀랄 일 이 벌어졌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자 어떤 유대인 랍비들이 나오더니 소뿔로 된 나팔을 불었습니다. 잠시 후에는 이슬람 사제인 이맘이 나와서 환영 인사를 하고, 그다음에는 티베트 라마승이 나 오고, 또 힌두교 사제가 나와서 알아듣지 못하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그 후에는 말로만 듣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나와 그들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부르고 경전을 읽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한 동양계 학생이 나오더니 불교 경전을 낭독했고 이어서 어떤 사람이 나와 힌두교의 우파니샤드를 읽었습니다. ‘기독교는 언제 나오나?’ 생각하며 한참을 기다리는데 거의 마칠 때쯤 기독교 서클의 한 학생이 나오더니 로마서 8장 35절부터 39절을 낭독하고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주류 종교가 기독교인데 이런 자리에서는 어떤 주도권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침묵하고 다른 종교는 힘껏 목청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가 진리처럼 행세하는 현대에 많은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름 깨어 있다는, 그래서 다양성과 관용을 인간적 가치 척도의 기준으로 여기는 교인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수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만 유일한 길인가? 왜 기독교만 유일한 길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비판이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세상을 건져내는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 후면 너희를 위하여 천국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질문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5절). 도마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는데, 주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고아와 같은 마음이 되고, 지금까지의 삶에 회의가 들어 상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 은 제자들의 외로운 마음, 상한 마음까지 헤아리는 대답이자 오늘날 세상에서 흔들리고, 상처 입고, 홀로 있는 모든 현대인들에 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길(The Way)

첫 번째로 주님이 길이 되신다는 것은 구원의 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천국 입성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A way가 아니고 The Way입니 다.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부산을 갈 때 비행기를 타고 갈 수 도 있고, 버스, 기차, 또는 자가용으로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도 다양할 수 있으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길은 부산 가는 길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길 은 세상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진리 의 길은 세상의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밖에 없는 길입니다. 유사한 것이 아닙니다. 유사제품이 통용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는 뜻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The Way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The Truth)

두 번째로 예수님은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어디서도 변함없이 올바른 것 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은 창세기 3장의 소위 원시복음 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아멘 주 예수여 오 시옵소서!” 마라나타까지, 성경 66권 전체가 지난 수천 년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한결같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해석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과거에도 현재 에도 미래에도 영원불변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 생명(The Life)

세 번째로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죽음을 정 복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구주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 중에 살아도 재미가 없고 기쁨도 없고 삶이 권태로 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유는 그 삶 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 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 은 인간적인 이해나 노력으로는 가슴에 담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경험되고 확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말씀 속에서 성령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길 되신 것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어린 시절 주일학교 때부터 불렀던 찬송이 제 기억의 창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길 참 험악하여서 거짓된 길이 많으니 가지를 맙시다. 동무여 갑시다 참 길로. 주 예수께서 가신 길 참 길로.” 이 세상 살아가는 길이 참 험악한데, 그 이유는 거짓된 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예수님께서 ‘참 길’이시고 ‘참 생명’이시고 ‘참 진리’이신 것이 자연스럽게 호흡하듯이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이유

첫째, 예수님만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는 인격이기에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를 성숙하게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아닙니다.

타 종교를 믿는 분들 가운데 진지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헌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지하다고 해서 진리는 아닙니다.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진지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상의 강도는 부끄러움도 많고 수치도 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님이 진리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인격적으로 헌신하자 그 순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진지하다고 해서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생명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예수님만이 진리이고 길이고 생명이신 것을 고백하십시다. 모든 종교가 구원의 길임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인격적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통하여 해결할 길이 있었다면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 1:4). 아멘. 이 악한 세대에서,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 진리가 훼손당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속하여 우리를 건지시려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많은 타 종교는 진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런 진리가 있다,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구원의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속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수영하면 살아날 수 있다’며 수영하는 법을 가르치고 수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많은 종교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가셔서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유일하시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이 유일한 생명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님의 신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유일한 분이십니다. C. S. 루이스는 “나는 하나님과 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평가한다면 두 가지 결론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기꾼, 미치광이, 거짓말쟁이 가운데 하나이거나 아니면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듣고도 그분을 단지 도덕적 스승이나 현자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신성 때문에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어느 인간도, 어느 타 종교의 지도자들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최후의 승자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이긴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깨뜨리셨고 마귀를 격파하셨고, 지옥의 문을 여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유일한 길 되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 죽음을 극복하고 지옥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구원의 진리에 관한 한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며 영생의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것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것이라면, 결코 타협하거나 관용을 베풀 수 없으며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멸망하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유일한 생명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리 뒤에 있는 존재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중요한 사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왜 세상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토록 흥분하며 저항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관용이 나 다양성 혹은 신실함이나 진정성이라는 피켓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을 비판하고 거부할 때, 믿는 자는 영안을 열어 그렇게 주장하는 세상의 커튼 뒤에서 누가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마귀가 세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세상을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일성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유일성을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전해 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어떻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 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의 전 도,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길을 가는데 낭떠러지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도 그냥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살인 방조 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은 자의 책무는 죽어 가는 생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낭떠러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떨어지기 직전이고 멸망하기 직전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의 끝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도 “그리로 가면 안 됩니다. 이리로 오셔야 합니다.”하고 말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손을 강제적으로라도 붙잡고 안전한 길로 데리고 가는 것이 믿는 자의 책임입니다.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약을 먹고 그 병에서 완치되었는데도 나와 꼭 같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약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성이 나쁜 것입니다.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내가 원한다고 내 식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 나라가 인정하는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이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 나라의 특정한 법칙과 조약이 통하는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비자는 바로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함께 읽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생명을 받은 자는 반드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먼저는 내 가족에게 그리고 내 이웃과 동료에게 이 생명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천국 비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이 말씀을 붙잡고 전합시다. 그럴 때 내 속에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고 세상 죄를 해결할 유일한 대속자이시며 천국 입성의 유일한 생명길이라는 사실을!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사를 결정하기에 결코 세상과 타협할 수도, 한 치도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 되심을 선포하는 이 정신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에 다시 한 번 새롭게 확인되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믿음으로 세상의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영혼을 건지는 이 귀한 일에 때를 놓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교회의 젊은 세대가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절대 확신함으로 종교다원주의에 물든 이 세상을 역류하며 오직 예수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는가??

송태근 목사(삼일교회)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 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 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2-27) | 찬송가: 151장, 85장

본문 요한복음 10장을 중심으로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는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2절에서 저자는 장소와 절기 그리고 계절을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 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장소가 어딥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언제였습니까? 수전절이 가까이 왔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계절 은 겨울이었습니다. 수전절이라는 절기는 아마 기독교인들에게 도 그렇게 익숙한 절기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절기는 구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수전절이 하나님께 서 율법이나 규례로 제정하신 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전 절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수전절

우선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다니엘의 예언대로 제일 먼저 역사 에 우뚝 등장했던 바벨론 제국이 유대 땅을 정복합니다. 바벨론 은 엄청난 제국이었습니다. 마치 그 시대는 영원히 갈 것 같았습니다. 지금의 미국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영원한 권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합니다. 이 페르시아 제국도 대단한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페르시아 제국도 결국 헬라 제국의 등장과 함께 몰락합니다. 그리고 헬라 제국은 로마 제국에 멸망당합니다. 로마 제국은 실질적으로 천년의 기간 동안 유럽과 아 시아를 지배합니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로마의 속국이 됩니다. 그러면서 엄청 처참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도 불똥이 튑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는 장군이 예루살렘 을 침공한 것입니다. 그 격변기 속에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성전 을 함락하고 성전을 더럽힙니다. 에피파네스는 의도적으로 유대 인들에게 부정하게 여기는 동물인 돼지의 피를 사용하여 성전을 더럽힙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성전은 목숨보다 귀한 존재감 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전이 훼파되고 점령당했을 뿐 아니라 돼지의 피에 의해서 더럽혀지는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 유대의 마카비라는 사람 이 반응합니다. 마카비가 군대를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을 회복합니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제일 먼저 성전 정화 작업을 위해 성전에 들어가는데 성전이 깜깜합니다. 무너지고 훼파되었으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촛불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기름을 보니 정확하게 딱 하루 분량의 기름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루만 지나면 꺼져 버릴 촛불 하나가 켜 져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촛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기름을 구하려고 하는데 기름이 없습니다. 성전의 촛불에 쓰이 는 기름은 아무 기름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제조법이 따로 있습니다. 그 기름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용 기름을 만드는 데 정확하게 8일이 걸립니다. 어떡합니까? 초는 하루면 꺼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름을 만드는 8일 동안 이 촛불이 꺼지지 않을 것입니 다. 하루 분량의 남은 기름으로 8일간 촛불을 태웁니다. 마카비의 성전 정화 이후 유대인들은 이날을 절기로 삼습니다. 성경에 서는 수전절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누카라고 부릅니다. 현재 이 절기는 정확하게 11월 말부터 12월 초순까지 8일 간 지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수전절이 갖는 유대인들의 인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오시 기 약 100여 년 전에 벌어졌던 사건입니다. 이 절기는 구약의 하 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정된 절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스스로 성전을 다시 정화하고 회복해서 하나님께 봉헌한 그 영광스러운 날을 기념하여 만든 절기입니다.

이 절기 속에 담아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전쟁을 해서, 성 전을 회복하고 우리의 전쟁과 의지와 행위와 노력, 애씀과 헌신, 봉사 로 이 성전을 다시 하나님 앞에 봉헌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즉 이 절 기는 인간의 의지가 가장 극대화된 절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수전절이 겨울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겨울이라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수전절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텐데 왜 “때는 겨울이라”는 말을 붙여놨을까요? 여기에는 성경적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항상 겨울이 갖는 계절적 의미가 있습니다. 봄은 싹이 트는 계절이고 여름은 잎이 푸르러지고 모든 것들을 만개시키는 풍성한 계절입니다. 가을은 모든 가라지와 곡식을 구분해서 곡식은 곳간에 거두고 열매를 맺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겨울은 항상 성경 전체에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겨울이 갖는 계절적 의미는 심판입니다. 예레미야 8장 20절을 보면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오늘의 말씀인 요한복음 10장 22절을 읽어봅시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서서히 이 짧은 구절이 말하고 싶은 의미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전절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절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의 전쟁과 수고와 애씀과 의와 행위와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라는 자기들의 자긍심을 맘껏 발휘하여 녹여낸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겨울이라는 심판을 상징하는 계절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성경 기자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희미하게나마 그림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23절을 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지금 바로 그 절기 그 겨울에 예수님이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 절묘한 그림이 말하고 싶은 의미가 무엇일까요? 솔로몬 행각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지성소, 유대인의 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그리고 솔로몬 행각이 위치합니다. 그러면 이 솔로몬 행각이 성전에서 위치한 지점은 가장 끝부분인 변두리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거닐고 계십니다. 이 장면이 조금 아이러니합니다. 한번 여러분들에게 여쭤보겠습니다. 구약에서 내내 성전과 그 안의 내용들이 지향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구약의 모든 성소, 지성소, 성전은 누구를 지향하는 그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입니다. 성소의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상징적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정작 그 본체요 실체이신 예수님은 배척하고 떠밀어내고, 그 껍데기이며 모형에 불과한 성전을 봉헌한다고 지키는 수전절은 온갖 폼을 다 잡고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22-23절이 말하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겨울의 때

그런데 그때가 겨울입니다. 왜 겨울일 수밖에 없을까요? 예수님은 정작 그 실체이신데 성전 끝머리에 떠밀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체로 이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미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이미 겨울이 온 상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정확하게 딱 하나입니다.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유명한 흑인 여성인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세계 10위 안에 드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지만 모든 역경을 극복해 내고 존경받는 여인으로 귀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분이 종교문제로 토크쇼를 진행하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도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지만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양한 통로와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자 어떤 여자가 객석에서 일어나서 “당신 지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을 모릅니까!”라고 했더니 오히려 그 여자를 공격합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 오프라 윈프리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본인은 크리스천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녀는 절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누가 크리스천입니까? 내게는 가능성이 없고, 나는 정말 예수의 피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으며 절망에 놓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자가 크리스천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여지나 가능성 또는 가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갈수록 신앙이 깊어진다는 의미가 뭔지 아십니까? 고매한 인격이 되면 좋겠지요? 그런데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인격이 고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세월이 갈수록 “나는 정말 쓰레기구나. 죄 덩어리구나.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용서와 긍휼과 그분의 덮으심 없이는 도리가 없는 존재다.”라는 것을 매일 선명하게 깨닫고 고백하는 것을 신앙이 깊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타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차원에서 설교를 하고 메시지를 줄지 모르지만 성경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인간 은 절망스러운 존재다! 그래서 주님 밖에는 구원이 없다!” 여러 분, 주님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전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너무 심하다고요? 아닙니다. 더 심하게 얘기할 까요?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전부 이단입니 다. 저는 그것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확 신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유일한 헌신자

우리는 종종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까? 가진 것이 있어야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남은 것이라곤 빚더미뿐인 데 파산된 존재가 무엇을 가지고 헌신을 합니까. 유일한 헌신자는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누카’, ‘수전’이라는 말을 헬라말로 찾아봤더니 ‘엥카이미아’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 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 에 큰 가죽 천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 천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찢을 수 없는 두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그 두꺼운 가죽 천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누가 찢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찢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서 해석이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 육체를 하늘 아버지가 아픈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찢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이고 떡을 떼는 사건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새롭게 살 길, 이제까지 어느 인류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살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 길로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라는 말씀에 ‘열어 놓으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가 ‘엥카이미아’의 동사형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봉헌되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 성전으로서 봉헌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애씀과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구원이 봉헌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전절이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자기 몸을 찢어서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엥카이미아’, 즉 ‘봉헌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헌신합니까? 그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헌신입니다. 우리는 헌신할 자산이 없습니다. 우리는 파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찢어서 자신을 열어 놓으시고 봉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십자가의 제단에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 같이 들어가면 우리는 구별된 자, 헌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찬을 받는 우리의 중요한 구원의 인식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그 아들 예수는 십자가의 제단에 우리를 위해서 수전절이 되어 주셨습니다.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참된 봉헌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이 성찬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함께 목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 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로새서 1:16) | 찬송가: 94장, 314장

그리스도의 탁월성 인성과 신성의 결합

우리 인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으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 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세상 에 있는 기적 가운데 최대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본질도 그대로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육체만을 가지고 본다면 예수님도 지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늙어 가기도 하는 단순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사람으로서의 본질과 하나님으로서의 본질이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이 두 본질은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진 채 예수님의 영혼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실 수 있었고 동시에 참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대체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만나는 이러한 일이 왜 필요했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진노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둘 사이를 화목케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무한하고 영원하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유한 세계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육체로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

예수님의 육체 자체에 어떤 탁월성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인간과는 다른 예수님의 탁월성은 어디에 있는 것 일까요? 바로 영혼입니다.

먼저 인간의 영혼은 죄에 물들어 있는 영혼인 데 반해 예수님 의 영혼은 죄가 전혀 없는 순결한 영혼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영혼은 인간에게 필요한 인간의 본질로만 이루어진 영혼이지만,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과 탁월하게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들은 여러 면에서 나타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탁월한 지성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고,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의 참됨이나 사악함을 분별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인간이 지닐 수 없는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본질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가지신 놀라운 능력입니다. 물론 인간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 놀라운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설교를 들으며 청중들이 압도당하기도 하고, 병든 자가 낫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신 능력의 삶은 그저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선포와 이적은 단지 성령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힘입었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바로 인간의 영혼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만의 탁월한 능력,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성향으로서의 사랑과 애를 쓰고 노력하는 사랑 두 가지가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은 성향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분 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성향으로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기만 할 뿐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과 달리 죄인들에게 친히 다가가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를 향해서도 저주하고 욕하는 대신, 자기를 그렇게 죽였기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받게 될 형벌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채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행동이 아니라 그러실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 사랑이 당신 마음속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모든 생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절정은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가 못 박혀야 할 그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성육신의 목적과 사역

성육신의 목적 : 창조 목적의 회복

그러면 그렇게 탁월한 영혼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루시고자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기대대로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업을 해도 목적이 있는데, 하나님이 이 아름답고 넓은 세상과 수많은 사물들을 지으시고, 또한 우리 인간을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실 때 목적이 없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이 창조한 이 모든 세계를 인간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잘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알며, 또 옆으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 알아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계속 가꾸어 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세상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안에 드러난 아름다움과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함께 두셨습니다. 창조된 이 세상은 그 상태로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인간이 섬기고 봉사하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여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와 능력으로 창조세계를 잘 가꾸고 돌보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인간은 스스로도 가장 행복하고, 함께 있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며, 또 그에 의해서 잘 돌봄을 받는 피조세계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 자기 혼자 섬김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의 결과로 인간은 오히려 그동안 화목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곡물을 심어도 소출이 잘 나지 않고, 다스려야 할 짐승들을 피해서 도망이나 다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살아가는 가엾은 신세가 된 인간들을 회복시켜 다시 창조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친히 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그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물질로 인해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건강만 되찾으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건강한 사람들도 인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살합니다. 명예만 있으면 또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이루시고자 한 목적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사역

그러면 이렇게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즉 어떤 일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것입니까?

첫째로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으면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손해를 입은 상대에게 보상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나쁜 일을 했을 때 궁극적으로 손해를 보시는 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 그중 우리가 책임져야 할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떠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망가뜨린 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은 분이신지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는 결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배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인간이 자신들이 지은 죄대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인간은 모두 파멸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파멸된다 하더라도 그 대가를 다 치를 수는 없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뜨린 죄에 대해 보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이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던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율법을 따라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단지 인간으로서 받은 형벌이었다면 그 크기가 유한했을 텐데, 죄 없는 사람이면서 또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당하신 형벌의 크기는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지은 인간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상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둘째로 모본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너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이런 말들은 모두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의 눈으로 똑바로 볼 수 있게끔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만 했습니다. 죄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피곤함을 모두 가지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며, 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듯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살 수 있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찬란한 신성의 영광으로써만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

우리 인생의 문제의 해답은 우리의 인생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그분에게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모든 세계가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나도 그분을 통하여 이 세상에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삶의 혼돈과 무질서를 해결해주시고, 인간이 걸어가야 할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분도 오직 그분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전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예전에 내가 극복할 수 없던 시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을 제대로 보는 눈도 없고, 어리석어서 아무리 애쓰면서 살아도 돌아오는 것이 불행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예수님 안에서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되어 우리의 인생이 밝은 빛 가운데서 걸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등불이 되시며 우리의 길에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무엇인지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며, 우리가 캄캄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힘써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결국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문제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원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는 돌아갈 곳도 없이 불효막심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한없이 받으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의 깊은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날마다 발견하고, 그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탁월하고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비와 은총과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녀답게 참 사람으로서 참 인생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사람이 죄의 상태에 타락함으로 구원을 가져올 만한 아무런 영적 선에 향해 서도 의지의 재능을 전부 다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게 되고, 죄에서 죽어 있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자신을 회심시키도록 준비할 수도 없다. (신도게요 제9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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