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인생의 내비게이션(시 119:102-105)

한국교회, 나사로인가?(요 11:1-4)

보배를 간직한 사람(딤후 3:14-15)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 살라(딤후 3:16-17)

 

 

인생의 내비게이션

김진하 목사(예수사랑교회)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2-105) | 찬송가: 199장, 202장

종교개혁의 시작

2017년 10월 31일은 독일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500주년에 맞춰서 손님맞이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생활의 출발은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간 때부터 입니다. 어느 날 그가 친구와 함께 들판을 지나다가 소낙비를 만나 큰 나무 아래로 피했는데 갑자기 내리쳐진 천둥과 번개로 인해 친구가 죽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구원에 대한 불안과 죄의식이 그를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만들었고 그때부터 그는 어떻게 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기독교 신학은 세 가지 사닥다리에 의해서 하늘에 올라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째, 스콜라 신학의 합리주의에 의한 것과, 둘째, 신비주의에 의한 황홀한 경험, 셋째, 일반적인 도덕주의입니다. 스콜라 신학의 합리주의는 사람의 이성을 근거했고, 신비주의는 특별한 경험을 강조했으며, 도덕주의는 행위를 바탕으로 신에게 나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구원을 위해 위의 세 가지 사닥다리에 오르고자 전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수고는 한계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치기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때마침 당시 부패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의 바티칸 성당 건축을 위한 헌금 모금으로 면죄부를 판매한 사건이 유럽 전 역에서 일어나게 되자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던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내걸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1517년 10월 31일이었는데 할로윈 축제 전날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이 다음날 아침에 교회에 나올 것을 알고 그들에게 알리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루터 자신은 이 일로 인해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가 탄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합니다. 단지 면죄부의 폐습을 알리고 교회 내부의 잘못된 관습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중세 천년 동안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고 개인의 양심과 개성이 억압되었던 암흑 시대에서 르네상스, 즉 인간 중심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람들의 내면적 개성, 재능, 문학, 예술, 과학, 미술, 음악 등 모든 부분에서 개방과 자유를 누리는 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을 르네상스, 즉 인문주의 운동이 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그가 사망한 후 존 칼빈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지도하며 신정정치를 실시 하였습니다. 칼빈은 장로교 제도를 만들어 민주적인 교회정치를 실현했습니다.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에서 독립전쟁을 야기했고, 영국의 퓨리턴 혁명과도 결부되어 나타났으며, 스코틀랜드에서 도 위클리프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 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00년 전 종교개혁은 완성된 것이 아니며 지금도 개혁되어야 하고 앞으로도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은 매년 1억 5천만 권을 만들어 반포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주제의 책이 이처럼 많이 팔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최고의 베스트셀러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경을 많이 찍어 반포하는 나라라고 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와 지역을 다녀 보면 곳곳마다 동상을 만들 어 세워놓았습니다. 어떻게 저런 동상을 만들었을까 생각이 들 만큼 대단한 동상과 석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우러러보고 갑니다. 하지만 사실 그 동상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대를 거슬러 오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유럽에 가보면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폴란드, 헝가리 등이 성경 때문에 나라가 세워졌고, 성경 때문에 전쟁을 했으며, 성경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고, 성경 때문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또 한 성경 때문에 유명한 작가가 나와 불후의 명곡들이 탄생했고, 성경 때문에 유명한 미술가들이 탄생했습니다. 지금도 가장 비싸고 고귀한 미술품은 모두 성경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조각이 성경 말씀에 기초하고 있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문학작품은 거의 모두 성경으로 인해 만들어졌습니다. 유럽 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구약은 28명의 저자가 1500년간 기록 했고, 신약은 8명의 저자가 100년간 기록했습니다. 모두 합하면 약 40여 명의 저자가 1,600년간 기록한 66권의 책이 성경입니다.

이 책 속에는 역사가 있고, 법률, 위인전기, 문학작품, 시, 희 곡, 비유, 편지, 격언, 교훈시, 상징문학, 과학, 물리, 경제원리, 인간 철학, 삶의 윤리, 생의 체험기, 삶의 성공과 실패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거울처럼 우리 자신을 비추게 하는 능력이 있어 2-3천 년 전에 기록한 글임에도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말씀을 읽다가 실패했던 사람들이 일어섰고, 낙심했던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으며, 인생 쓰레기요 낙오자가 역사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버림받았던 사람들이 역사의 등불로 세워졌습니다. 또 인생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애착을 가지게 되었고, 병들었던 사람들이 신비한 치료를 경험했으며,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린 성경을 이렇게 손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옛날에 성경은 양피 두루마리에 원본을 쓰거나 파피루스에 기록해서 보관했는데 그 분량이 너무도 방대하여 보관하기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일일이 기록하여 복사해야 했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읽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450년대까지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베낀 사본만 있어서 교황이나 신부 또는 제사장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457년에 로마자인 라틴어로 번역했고, 1467년에는 독일어로, 1471년에는 이탈리아어로, 1474년에는 프랑스어로, 1475년에는 오스트리아어로 번역했고, 영어는 훨씬 후인 1525년 틴 델이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순교 당했고 성경은 모두 수거되어 불살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틴델은 죽으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538년에 성경은 다시 발간되어 전국 교회에 한 권씩 배부되었고 철사 줄로 묶어 공중전화 책자처럼 보관했다고 합니다.

1800년경 영국 웨일즈 지방에 메리 존스라는 16세의 소녀가 있었습니다. 10km나 떨어진 곳까지 다니면서 성경을 배울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 소녀는 성경을 구입하기 위해 닭을 기르고, 나무를 해서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100km쯤 떨어진 찰스 목사님을 찾아갔는데 “미안하구나. 요새는 성경 출판이 끊겼구나”라는 말에 그만 목을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은 달랑 한 권 있는 책을 그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이후 찰스 목사님은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1804년 3월 7일 런던에서 300명이 출석하여 성서공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영 성서공회로 오늘날 이곳에서 1년에 1억 5천만 권의 성경이 보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성경을 책장에 또는 선반 위에 장식으로 놓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읽어 생명을 얻고, 땅 끝까지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내비게이션

시편 119편 105절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저는 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 중 하나로 일명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라고 알려진 인공위성에서 위치를 추적하여 알려 주는 기능입니다. 원래 군사용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요즘에는 편리하게 운전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만큼 내비게이션이 진보된 나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도, 프랑스도, 자동차의 나라 독일도 비교가 안 됩니다. 필리핀에서는 본 적도 없습니다. 목적지를 정해 놓으면 거리, 시간, 코스, 속도, 방향 모두를 안내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속도를 알려주고, 과속 여부도 알려주고, 과속 사진 찍히는 곳도 미리 신호를 주어 피하게 합니다. 앞으로 얼마쯤 가서 오른쪽으로 나가야 하는지, U턴을 해야 하는지 미리 다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또 다른 길을 탐색하여 금방 다시 알려주는데 수십 번을 잘못 가도 절대 큰소리치거나 핀잔을 주지 않습니다. 설령 길을 잃는다 해 도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하여 기어코 목적지에 도착해야 끝이 나는 것이 내비게이션입니다. 그러기에 처음 가는 길도 내비게이션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 주님의 성품이 마치 내비게이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짜증도 내지 않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다시 가르쳐 주시고, 용납하시는 주님의 성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내비게이션인 것 입니다.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참 안내자는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행할 때 공항의 엑스레이를 통과해보면 가방 속의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감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에는 알몸 투시기도 설치했다고 합니다.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자식은 부모를 속일 수 있고, 제자는 선생을 속일 수 있고, 성도는 목사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이신 하나님을 어찌 속이겠습니까?

두 사람이 어느 음악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사람은 큰 감동을 받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몹시 지루했습니다. 그는 옆에 앉아 열심히 음악을 감상하는 신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저 노래 별로이지 않습니까?”

“저 가수는 제 아내입니다.”

그는 순간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 만회하려고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요, 가수는 훌륭한데 곡이 형편없다는 거죠.”

“저 곡은 제가 작곡한 것입니다.”

음악을 듣는 데는 음악적 이해력이 성숙되어야 하고, 미술을 감상하는 데는 미술에 대한 이해력이 축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성숙되어 야 합니다. 소꼬리는 세 번 이상 고면 멀건 물만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옵니다.

옛 사상가들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책이 세 권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자연계란 책이 있는데 이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 자비와 영광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인간의 양심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 속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성향의 지표를 발견할 수 있고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생긴다고 했 습니다. 셋째, 신구약 성경이란 책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친히 계시하신 책으로 죄로 얼룩졌던 인간을 천국까지 인도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내비게이션을 통해 길 잃지 말고 저 북방 얼음산과 남방 산호섬에 이르기까지 주의 복음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한국교회, 나사로인가?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 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한복음 11:1-4) | 찬송가: 205장, 210장

종교개혁과 성경

금년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건 ‘95개조의 항의문’은 사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작은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헌데 그 몸짓이 이렇게 엄청난 나비효과로 중세를 강타할 줄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루터는 그 무엇보다 먼저 당시 금기시했던 ‘면죄부’를 건드렸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분명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반 평신도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미사 집례도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교 황, 사제)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까막눈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 무엇보다 먼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접하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번역된 성경을 누구나 읽게 함으로써 ‘성경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를 직접 확인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내건 슬로건의 첫 번째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인 것입니다. 그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오직 성경으로’에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 으로 번져나갔던 것입니다.

이 성경 번역의 효과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까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란 책에서 저자 스티븐 존 슨(Steven John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책을 읽게 되면서 자신의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처음 알기 시작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안경업체가 호황을 누렸다. 안경 산업은 렌즈의 발달로 이어진다. 렌즈의 개발은 자연스럽게 현미경의 발명으로 옮아간다. 현미경은 세균의 존재를 알게 했고 질병의 원인이 이 세균에 의한 감염이라는 과학적 성과로 결실을 맺는다. 세균의 존재를 알게 되자 물이 깨끗해졌고, 물이 깨끗해지자 야외 수영장이 생겼고, 야외 수영장이 생기자 여성들이 자신들의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비키니를 입기 시작했다.” 비약적인 이야기지만 결국 루터의 성경 번역이 비키니로 이어졌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성(聖)을 대표한다면 비키니는 속(俗) 을 상징하는 극과 극이 아닙니까? 이것을 ‘벌새 효과’(Hummingbird Effect)라고 부른다 합니다. 벌새란 꿀을 채집하기 위해 같은 자리 에서 공중에 떠 있는 방식으로 나는 새를 말하는데 ‘벌새 효과’란 ‘나비 효과’와는 달리 인과관계가 명확한 경우에 사용하는 단어 입니다.

우연이 있을까? 우연이란 것이 존재할까? 지혜자 솔로몬은 말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또 사도 바울은 말 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아담의 원죄, 둘째 아담의 속죄가 언제 적 일입니까? 그런 데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과관계 그 자체입니다.

나사로의 병과 예수님의 진단

요한복음 11장에는 베다니의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호주 격인 나사로가 중한 병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 누이들이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전후 사정을 알렸습니다. 그때 주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4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둘째는 15 절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1:15).

‘이 병은’(4절), ‘이는’(15절)이라고 하시면서 지금 나사로의 병에 대해, 아니 그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는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있는 일임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살피면 4절은 병에 대한 진단이요, 15절은 그 병에 대한 처방입니다. 나사로에게 일어난 병이자 그 집에 일어난 이 병을 놓고 진단과 함께 처방을 내리십니다.

나사로에게 일어난 이 병, 그 가정에 불어 닥친 이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 집만의 문제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다양한 모든 문제들을 총칭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문제로, 어떤 사람은 저런 문제로 진통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 어떤 집은 이런 문제로 저런 문제로 가족 모두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몸 둘 바를 모르며 안절부절못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나사로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영적 진통을 기가 막히게 꼬집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내 문제이자 내 가정의 문제요, 나아가 한국교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야. 그건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진단과 동시에 처방을 내려주고 있기 때 문입니다. 오늘 여기서는 ‘진단’에 대하여 짚어보겠습니다.

‘진단’이 중요합니다. 어떤 병, 어떤 문제든 진단이 중요합니다. 엉뚱한 진단을 내려서 시간, 물질을 허비하다가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녀는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지만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은 더 중하여지지 않았습니까?(마 5:25-26). 의사들이 진단을 잘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나사로의 가정을 향한 주님의 진단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다”라는 이 말씀은 누군가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이 집이 어떤 집입니까?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융숭한 접대를 하지 않았습니까?(눅 10:38). 동생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가 아니었습니까?(요 11:2). 그런데 어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진단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하바’(신 7:8) 등 대략 일곱 가 지 정도 됩니다. 헬라어로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중에 대표 적인 것이 에로스, 스톨게, 필리아, 아가페입니다. 이중에서 ‘에 로스’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에서 변화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한결같이 성(性)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잠 7:18, 30:16). 그래서인지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에로스란 단어 는 사실 쓰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영적으로 깊이가 탁월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어휘를 매우 주의 깊게 선택하여 사용했습니다. 특히 성경의 대주제인 ‘사랑’을 언급할 때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즉 에 로스는 남녀 간의 이성적인 사랑, 필리아는 인간 대 인간의 깊이 있는 사랑, 스톨게는 부모와 자녀 간의 혈연적인 사랑, 아가페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그래서 인간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임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가 디베랴 해변에서 나누었던 대화 속에 ‘아가페’와 ‘필리아’가 오갔음을 밝힙니다(요 21:15-17). 똑같이 ‘사랑’ 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 색깔이 완전히 다른 것이기 에 이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사건은 어떠합니까? 본문에 ‘사랑’이라는 단 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5).

여기에서의 ‘사랑’은 각각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먼저 5 절을 봅시다. 주어가 분명히 예수님이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신 바로 그분이 그 가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때문에 요한은 주저 없이 ‘아가페’란 단어를 쓰고 있는 것 입니다.

문제는 3절입니다. 요한이 여기에서는 어떤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에로스도 아니고 스톨게도 아닙니다. 그러면 필리아, 아가페 중 하나입니다. 둘 중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까? 영적 통찰력이 깊었던 요한은 ‘필리아’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사랑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이 나사로를’이 아닙니다. ‘누이들이 나사로를’입니다. ‘필리아’는 누이들이 나사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빠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입니다(3절).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나사로는 오빠 이상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는 집안의 대들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빠를 의지하고 기대면서 여기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주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도 접대하고, 말씀도 들었습니다(눅 10:38~42). 심지어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기까지 했습니다(2절). 겉으로 볼 때에는 정말 주님을 사랑한 모범적인 가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향한 이 같은 사랑이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아직 넘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오빠를 뛰어 넘어 하나님 자체이신 그분을 사랑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오빠는 주님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나사로는 주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리는, 아니 가로채는 그런 위치에 서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4 절의 말씀을 이해할 듯합니다. 주님이 왜 이런 진단을 내리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든 신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란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리디머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팀 켈러(Timothy Keller)는 오늘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중 하나입니다. 그가 최근에 『내가 만든 신』을 발간했습니다. 책의 부제 “하나님 자리를 훔치다”로 내용을 보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하는 현대인들에게 비수를 들이댑니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과 같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그게 무엇이든 워낙 당신 삶에 중심 이자 필수여서 그것 없이는 살아갈 가치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가짜 신이다. 가정과 자녀, 직업과 돈벌이, 성취와 평론가의 호평, 체면과 사회적 지위가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로맨틱한 이성 관계, 업계의 인정, 안전하고 평안한 환경, 외모나 두뇌, 심지어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다 우상이 될 수 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가 있어질 거야.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내가 중요해지고 안정감이 들 거야.”

그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상 숭배란 말 앞에서 단 지 목상(木像) 혹은 신상(神像) 앞에 절하는 원시인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게 아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우 상 숭배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인간이 ‘마음에 우상을 들이며’(겔 14:3)라는 말씀대로 설령 형상화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를 지배하고, 가치관을 거기에 두는 것이라면 그게 우상이다.” 이어서 팀 켈러는 단정합니다.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있어서 나사로는 주님보다 더 귀한 존재 였습니다. 분명히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고 사랑했습니다. 하지 만 여전히 나사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를 더 기대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나사로 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들었습니다. 냄새나는 시신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어느 순간 마르다와 마리아를 배신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진단을 내리십니다. “그 병, 이유가 뭔지 아니?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야.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기 원하셔. 그런데 여전히 나사로를 더 의지하고 기대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나사로가 그 영광을 가리고 있구나.”

우리의 나사로 한국교회의 사명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개신교 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개신교회는 500년 전 ‘오직 성경’으로 출발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외쳤던 그 피 묻은 후예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과연 ‘오직 성경’입니까?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어떤 진단을 내리고 계실까요?

한국교회가 쓰러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대단할 것 같았는데 마치 나사로처럼 픽픽 쓰러지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나흘이 나 되어”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요 11:39). 이것이 우연입니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까요?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기대며 의지하는 존재는 과연 누구 입니까?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내가 만든 신’은 아닐까요? 팀 켈러의 “심지어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다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아픈 지적에서 우리는 과연 자유롭습니까? 우리는 과연 면죄부를 팔던 종교개혁 당시의 교회와 사제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아니 가로챘던 나사로는 쓰러져야 합니다. 헤롯처럼 충이 먹어야 합니다(행 12:23).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요 11:44).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요 11:27).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엄한 책망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 그래서 우리의 나사로인 한국 교회를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요 11:44).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애 3:21-22).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의 책무 요 사명입니다. 그냥 두면 나사로는 썩어 냄새를 풍기다가 흔적 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저 유럽의 교회들처럼 말입니다.

 

 

보배를 간직한 사람

민찬기 목사(예수인교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4-15) | 찬송가: 199장, 200장

세계 제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필리핀 해협을 통과하고 있을 때 갑판에서 일을 하던 수병의 상의가 바람에 날려 물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수병은 쏜살같이 물속으로 다이빙해서 그 상의를 건졌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수십 대의 비행기와 많은 병기를 실은 항공모함이 급히 멈추어야 했고, 긴급히 구조선을 내려서 그는 구출되었습니다. 이후 전시에 항공모함을 서게 한 죄로 그 수병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고 크게 이적 행위를 한 것으로 판명될 경우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군 법무관은 그의 죄상을 논고하였고 재판장은 그로 하여금 진술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판장님, 저의 잘못으로 군 작전에 크게 지장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상의 때문에 물속으로 뛰어든 것은 그 상의 주머니에는 저를 전쟁터에 보내시고 주야로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사진과, 전쟁터에서 꼭 하나 님께 의지하고 읽으라는 어머니의 성경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 다. 제가 아직껏 이토록 용감하게 싸운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득이하게 물에 뛰어든 것입니다.” 이 말을 들 은 재판장은 “미합중국 헌법에 어머니의 사진과 성경을 건지기 위하여 물에 뛰어든 수병을 처벌하라는 조항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

성도를 가리켜서 책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진정한 성도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성경을 사랑한다는 말이 곧 하나님을 사랑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역시 성경을 사랑한 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편이 타국에서 편지를 보 내왔다면 아내는 닳고 닳도록 편지를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잘 때도 품에 안고 잘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이 이런 관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내신 ‘러브레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성경을 보내주신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세상에 성경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근본, 뿌리 그리고 갈 길,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이 세상의 창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 속에 인류의 근원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 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링컨은 “인류 창조 이래 하 나님이 세상에 주신 최대의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 왕 조지 5세는 “성경은 영국에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고 보고 읽혀진 책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은 실제 저자가 40여 명이 되며, 1600여 년에 걸쳐서 기록됐습니다. 그러나 1차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록된 내용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기자들이 단지 상상하거나 연구해서 쓴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저자들에게 신적인 영감을 주셔서 그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당부한 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성경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은사요 소중한 스승입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를 아주 강하게 훈련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14절)는 당부입니다. 그때 당시는 이단들이 극성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혹되었습니다.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그때까지 계속해서 율법을 신주 모시듯 지키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또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영지주의에 넘어가 기독교를 왜곡시켰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성경에서 가르침 받은 그대로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리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의 소중함을 알라는 권고입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고 어머니로부터 경건을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아주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하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5절)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란 말의 뜻은 영어로 ‘캐논’(canon) 즉 ‘척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척도란 ‘정확하게 재는 자’라는 뜻인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갈대로 자를 대신했습니다. 갈대는 곧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를 대면 잘못되어 삐뚤어진 것이 드러나게 되고, 잘못된 것이 드러나면 고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1,600년이란 오랜 기간을 두고 한 사람이 아닌 40명의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6권의 내용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음을 ‘구속사’라는 주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로 향하는 길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길뿐 아니라 인간의 뿌리, 삶, 운명, 죽음, 그 이후의 문제들 모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과 방법을 말씀합니다. 이 책 이외에는 구원 얻는 길이나 방법 등을 제시한 책이 없습니다. 성경책 이외에는 구원이니 영생이니 천국이니 하는 말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책은 귀한 보배와 같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누구나 다 한 번씩은 죽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길은 피할 수도, 돈 주고 면제받을 수도 없습니다. 싫어도 좋아도 가기 싫어도 이 길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하고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죽음 이후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 길을 모르기 때문에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죽음의 길을 연구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연구하다가 벽에 부딪혔습니다. 불교나 유교나 어떤 종교도 이 죽음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길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정확하게 알려주며, 그 해결책까지 제시해 줍니다.

최고의 교재인 성경

이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지혜로운 민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유대인들이 이 성경을 학교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 세계인구의 0.2%밖에 안 되지만 그럼에도 이 민족은 지금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창조적 인생을 탄생시켰고 그 소수 인구를 가지고 지금도 세계 역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쓴 사람, 공산주의 제창자, 미 대륙 발견자, 원자폭탄 발견자, 자본주의 제창자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또 그들은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의 30%를 차지하고 있는데 노벨상 중에서 경제상 65%, 화학상 12%, 의학상 23%, 문학상 8%, 물리상 22%를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부호 상위 400가족 중 24%가 유대인이고 최상의 부자 40가족 중 42%가 유대인입니다.

원 제작자에게 맡기라

어느 날 일본의 한 기업체에서 해외 지사 활동을 통제하는 초대형 슈퍼컴퓨터가 고장 났습니다. 회사 사람들은 컴퓨터를 제조한 미국 회사에 최고의 기술자를 즉시 파견해 달라는 긴급 타전을 보냈습니다. 그날 늦게 청바지를 입은 한 젊은이가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로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본 회사 경영자는 버럭 화를 내며 “나는 당신의 사장에게 가장 경험 많고 유능한 기술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컴퓨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수백만 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습니다. 즉시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오다니...... 당신 도대체 누구요?”라고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덤덤한 태도로 “사장님, 그 컴퓨터를 발명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어서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컴퓨터는 한 시간 만에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습니다. 그는 수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회사 경영자에게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 둔 사용자 매뉴얼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컴퓨터를 지침서에 따라 사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잠시 짬을 내어 사용자 매뉴얼을 읽어보고 그대로만 작동시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는 매뉴얼의 지침대로 작동하게 만들어졌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이 지구상에 살아가면서 어떠한 지침을 가지고 생활해야 할지 사용설명서를 주셨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원칙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용설명서를 읽지 않으면 그 비싼 컴퓨터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도 작동에 이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성경은 그 시대의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은 죄악으로 인하여 암흑에 처했던 인류에게 소망을 주었고, 그 시대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종소리를 성경이 울려 주었습니다. 인류 최대의 지식, 그것은 바로 성경이 가르쳐 준 지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시켜 박애주의의 아름다운 정신으로 살게 한 숭고한 삶이 바로 성경에 근거하고 영향을 입었습니다. 현재 세계 문화의 모든 문명국가들이나 정신적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위대한 사람들 모두가 다 성경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최고의 보배로 여기고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말씀만을 붙잡고 사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말 큰 선물입니다. 매뉴얼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해당 제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말씀은 정보가 아니며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게 생각되십니까? “정녕 이루 어지리라!”는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지배합니다.

 

세계 대학들의 교훈들

세계의 유명 대학들의 교훈을 보면 성경적입니다. 하버드대 학교는 교훈이 ‘진리’입니다. 예일 대학교는 ‘진리와 빛’이며 프린 스턴 대학교는 ‘신구약성경’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시편 36 편 9절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 리가 빛을 보리이다”입니다. 이런 역사적 학교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한국 대학교들도 교훈에 진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입니다. 연세대학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려대학교는 ‘자유 정의 진리’, 숭실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 삼육대학교는 ‘진리 사랑 봉사’입니다. 또 단국대학교는 ‘진리 봉사’, 동덕여자대학교는 ‘도의 진리 화협’, 서울시립대학교는 ‘진리 창 조 봉사’, 한국외국어대학교는 ‘진리 평화 창조’, 한성대학교는 ‘진리와 지선’, 이화여자대학교는 ‘진선미’, 성균관대학교는 ‘인의예지’입니다. 그런데 국민대학교는 ‘이교위가(以校爲家)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정말 그분은 사필귀정이지요. 많은 대학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나라의 교육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지성이 진리 편에 서 있을까요? 얼마나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까요? 학문은 그 자체가 진리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시류에 편승하고, 실용만 추구하며 아집에 깊이 빠져 있는 상아탑을 보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대학이나 학문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교회도 진리보다 는 독단이 앞서고,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판단하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없을 정도로 권위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데 특별한 이유가 없다

어느 글에 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좋아함의 이유는 언제나 ‘그냥’이었다. 이유의 근거를 찾을 수 없어 결론은 언제나 ‘그냥’이다.” 좋은 것은 이유가 없어야 한답니다. 진리는 좋은 것입니다. 왜 좋은 것이냐 하면 이 유가 없습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그냥 좋은 것입니다. 진리를 행함에 있어서도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데는 이유 가 없어야 합니다.

“군대 생활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답은 “없다”였는데, 사실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내게 유익하게 받아들인다면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 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이고, 사회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답은 ‘없다’입니다. 진리로 살면 왕따를 당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진리로 일하면 실패합니다. 진리로 사업하면 망합니다. 그러나 진리로 살아서 잘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실은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준법정신으로 살고, 자기 사랑으로 살고, 이웃 사랑으로 살고, 성경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여기에 유익함이 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자유하게 하는 영입니다. 내가 손해 보고, 조금은 더디어도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귀한 편지

성경은 하나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풍성하신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단지 성경을 읽고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실천하고 경험하고 실험해야 합니다.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삶을 바르게 살 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 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 중요한 역 할을 합니다. 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안식처로 삼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좋은 소문이 나기를 소망하며 노력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좋은 소문을 내려고 사람들이 관심 두는 한 가지 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인권운동이나 사회복지, 지역사회 봉사에 관심을 두기도 하고 또 노인이나 노숙자에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좋은 소문은 사람들의 관심에 연관된 어떤 한 가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 살라

김미열 목사(원주중부교회)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 임없이 기억함이니...(중략)....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 추게 하려 함이라(데살로니가전서 1:2-8, 디모데후서 3:16-17) | 찬송가: 84 장, 205장

교회의 좋은 소문은 오직 복음이어야 하고 복음으로 인한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교회들에게 전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많은 교회중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살펴보겠습 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과 관련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들을 묵상하기 위하여 먼저 다시 복음을 함께 정리 하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평생 고백하고 구하며 자랑하고 전 하고 감사해야 할 복음을 함께 먼저 나누길 원합니다. 복음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복음

첫째로 성경이 복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성취 그리고 효과적 적용 일체를 기록한 성경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완전하게 알려주기 위하여 주신 계시가 특별계시입니다. 그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을 특별히 알려주는 진리의 내용들입니다. 그 구원에 관한 특별계시를 기록하여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따라 서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기록으로 주신 유일한 구원의 말씀 곧 복된 소식인 복음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복음인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특별계시로 주신 진리의 성경은 삼위일 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인간 구원과 관련하여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계획을 이루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구속의 진리를 택함 받은 각 성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심을 증거합니다. 즉 성경은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적용하심을 십자가 구속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완전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승천하신 이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완전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 그분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택한 백성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원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에도 완전한 사람으로서 나사렛 예수라는 신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는 동안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하게 복종하셨고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으며 죽은지 사흘 후에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할렐루야! 부활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속죄의 희생으로 받으셨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또한 부활하시고 40일 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시어 성부의 우편에 앉으셨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자신의 죄와 부패함, 무능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며 의롭게 여기시고 자신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자녀 삼아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복된 소식 곧 복음입니다.

 

복음의 좋은 소문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내야 할 좋은 소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오직 복음과 복음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주님의 삼중의 은혜, 곧 믿음, 사랑, 소망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바울이 지적한 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나던 복음의 좋은 소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소문이 우리와 우리 교회에서도 나기를 축복합니다.

첫째로 교회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살전 1:3a).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로 소문나 있었는데, 여기서 믿음의 역사란 ‘행동하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그 자체가 행위로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다면 주님을 향한 헌신의 행위, 말씀을 실천하는 행위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믿을 때 그에게 말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그에게 주거나 빌려주기도 합니다. 믿으면 행동합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행동은 믿음 자체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믿음은 예배 행위로 표현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주일간 힘써 일하고 쉬어야 할 시간에 주님께 감사해서 주일 아침 예배에 나오는 것, 그것이 믿음이며 믿음의 표현이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소문난 교회와 소문나지 않은 교회의 차이 중 하나가 예배에 대한 열정과 참여의 차이입니다.

예배는 행동하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실제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소문난 교회는 한결같이 준비된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초대하여 예배실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배에 초대하기 위해 정열적인 노력을 다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았음을 믿는 믿음은 ‘증거’, ‘전도’, ‘예수님 자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전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 고백으로 다른 이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믿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행동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자랑해야겠다는 고민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의 사람으로 그리고 전도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교회는 수고하는 사랑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살전 1:3b).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로 소문이 났는데, 이는 사랑을 하되 ‘수고하는 사랑’을 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갖게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속되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감사와 헌신으로 표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무관심 속에서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갖게 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곧 사랑을 유지하고 풍성하게하기 위해서는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 수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수고자들의 모습을 성령의 열매로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써 다양한 섬김을 나타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의 수고하는 사랑에서 ‘수고’라는 말은 ‘자르는 것’, ‘채찍으로 때림의 고통’, ‘아픔 중에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교회에서 봉사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이 수고하는 사랑입니다. 육체의 현저한 일들로 인하여 가정이 깨어지는 이 시대에 말씀으로 가정을 지키는 일과 기도로 교회와 교회의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축복하는 일도 수고하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고하는 사랑은 삶 속에서 대화로 나타납니다. 힘들지만 함께 믿음의 대화를 나눌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문제를 풀어갈 때 진정한 사랑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인내하는 소망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살전 1:3c).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망의 인내란 소망을 붙들되 상황이 안 좋고 어려울 때 도 인내하며 ‘소망을 버리지 않고 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소 망이란 구원의 소망을 의미하는데,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서 예 수님이 오시기까지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대로 그 구원을 온전 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소망은 하 나님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랑을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고전 13:13)과 달 리, 여기에서는 소망을 마지막에 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가 종말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종말론적이기에 결국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고 승리하신다는 확신 속에 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소문으로 일어나는 소망은 목숨 걸고 인내하는 소망입니다. 인내하는 소망은 비굴하거나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소망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디에서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과 그 교회는 좋은 소문이 나게 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 세상 삶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장차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소망의 삶을 사는 자는 세상의 물질에 유혹당하지 않고 세상의 관계 유지에 매이지 않으며 담대합니다.

성경대로 살라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소문이 나는 교회요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러한 좋은 소문이 나려면 항상 ‘신전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대로-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주도하면서 철저하게 삶의 모토로 삼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와 ‘성경대로’였습니다. 칼빈이 그의 종교개혁운동과 그의 글들 그리고 실천적 삶을 통해서 모든 자들에게 위대한 인물로 소문이 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라는 신앙의식과 삶의 태도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고백을 하며 말씀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사람들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 행동하는 믿음, 수고하는 사랑, 인내하는 소망이라는 좋은 소문이 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때든 하지 못할 때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우리는 말씀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때 소문은 저절로 나게 됩니다. 소문은 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힘이 됩니다.

이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 이후로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 살면서 오직 복음과 복음에 기초한 행동하는 믿음으로, 수고하는 사랑으로, 인내하는 소망으로 지역사회와 조국 땅과 세계 곳곳에 소문나길 기도합니다.

 

문) 은혜 언약의 중보는 누구신가?

답) 은혜 언약의 유일한 중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한 실체이시요, 동등이시며 때가 차매 사람이 되셨으나 계속하여 영원히 전연 판이한 양성을 가지신 한 위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 (대요리문답 제3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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