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별설교] 말씀의 보초 (히 4:12~13)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개인과 교회, 세상에 보초 서는 운동 … 머리지식에서 생활지식으로 나아가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 권성수 목사
(대구동신교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세 천국과 내세 천국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들 누가 알겠는가?’ ‘은밀하게 부분적으로 조금씩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아무도 모르지 않겠는가?’ 또 다른 질문도 생깁니다. ‘끝까지 견디고 믿는 견인(堅忍)을 하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실속 없는 경고뿐이지 않은가?’ ‘천국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경고는 실제로 집행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않아도 정말 아무도 모를까요? 우리가 끝까지 믿고 순종해야 천국 안식을 체험한다는 것이 빈 말일까요? 아닙니다. 본문 12~13절은 이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경고를 무시할 때 하나님께서는 숨은 것까지도 다 아셔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집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결코 도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특징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미하고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기의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신속하고 강력하다는 점에서 ‘운동력’이 있습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합니다(전 12:11, 사 49:2, 계 1:16, 2:12, 16, 19:15).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중심(마음)을 예리하게 뚫고 들어가서 파헤친다는 의미에서 어떤 날카로운 칼보다 더 예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뚫고 들어갑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는 모든 방면의 인간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학적인 용어 축적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서 거기에 숨은 모든 것을 파헤칩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인간 영혼을 비추는 밝은 태양과 같아서 구석구석에 숨은 죄악들, 오래 잊어버린 죄악들, 무관심한 죄악들을 다 적나라하게 노출시킵니다.
우리는 우리 속을 보아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렘 17:9), 하나님은 우리 속을 다 보시고 아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의 숨은 죄악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내 어두운 마음을 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시 139:11~12).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눈을 피할 곳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모든 허위와 가식을 벗고 알몸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의 판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는 우리를 외모로 판결하시지 않으시고 진리대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은 정죄가 아니라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층심부에 들어와서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평가합니다.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 좋은 의도인지 나쁜 의도인지를 평가합니다. 우리의 심층심부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중요합니까? 예,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것은 10만원, 100만원, 1억원, 집 한 채가 걸린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 전체와 영원이 걸린 문제입니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층심부에 뚫고 들어와서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신앙의 생각이냐, 불신앙의 생각이냐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우리 마음이 불신앙을 경계하도록 개인 보초를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우리는 성도들의 마음이 불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그룹 보초를 서야 합니다. 우리는 피차 보초를 서고 경계해야 할 것을 경계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육체는 죄악의 쾌락을 갈망하고, 마인드는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성적인 죄를 범할 것인가, 말 것인가? 슬쩍 속일 것인가, 말 것인가? 부정한 돈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눈 질끈 감고 우선 유익한 것을 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합니다. 우리는 두 생각이 싸울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생각을 선택하기 위해서 개인 보초와 그룹 보초를 서야 합니다. 이런 질문이 오갈 때에 우리 마음에서 불신앙이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가 불신앙의 생각을 자꾸 따라가면 마음이 너무 완고해져서 회개가 불가능해집니다(히 6:6). 그렇게 될 경우, 이 세상의 잠시 지나가는 쾌락을 위해 영원한 천국을 던져버린 셈이 됩니다. 달콤한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긴 에서처럼 말입니다(히 12:16).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생각에 넘어가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불신앙의 유혹, 죄악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유학할 때 거의 매일 저를 괴롭히던 생각이 있습니다. 몸이 아프고 가난하고 공부가 힘들고 환경이 열악하니까 계속 짜증이 났습니다. 짜증을 부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것을 어찌할 수 있나 싶었습니다. 짜증이라는 것은 별로 죄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짜증은 큰 죄악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우회전 하라고 했는데, 돌아서는데 보니 오른쪽으로 많이 꺾이는 우회전이었습니다. 아내는 처음 운전을 배울 때라 우회전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앞에는 골프장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아름드리 나무들과 잡초가 골프장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자동차가 우회전을 못하고 앞으로 돌진하는데 그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골프장의 나무들을 박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급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자동차가 골프장 안으로 들어가다가 잡초 숲에 걸렸습니다. 자동차 밖으로 가까스로 나가 보니 옻나무가 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손으로 옻나무(poison ivy)를 헤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자동차는 다 망가졌고, 제 몸에는 옻나무로 인한 물집이 생겼습니다. 짜내면 다시 생기고, 짜내면 다시 생기는 물집이 한 달 내내 저를 괴롭혔습니다. 보기에 추하기도 하고 따갑기도 했습니다.

그때 짜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짜증을 부리지 못하도록 교통사고를 나게 하셨고, 옻나무로 제 팔뚝에 물집이 생기게 했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했다가 몸에 문둥병이 발생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부인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물집은 저의 짜증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때 제 속에서 ‘짜증 정도가 무슨 죄야? 짜증나면 부리면 시원하잖아? 괜찮잖아?’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이것이 저를 속이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께 불평했는데, 짜증이 곧 불평입니다. 성경은 불평하거나 짜증부리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제 속생각이 저를 얼마나 교묘하게 속이는지 실감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짜증을 부리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짜증을 부려 몇 번 혼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짜증을 부리지 않기로 각오하고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마음 속을 깊이 뚫어 들어와서 ‘짜증내도 괜찮아’라는 생각을 폭로해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밝히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한 번 잘못된 생각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제가 주행하고 있는데 바로 앞의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브레이크를 잡았는데, 제 뒤에 오는 사람은 가속 페달을 밟았습니다. 뒤차가 제 차를 크게 박았습니다. 저는 이미 짜증을 부리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일단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사고를 통해서 저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제 뒤차 운전수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사후 보험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바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 보초를 서면서 경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다는 것을 체험하는 비결입니다. 말씀훈련은 말씀 보초 훈련입니다.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스쳐 지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과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훈련을 받다가 보면 말씀 앞에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하고, 말씀에 따라 심층심부를 살피고 말씀 붙잡고 살아가면서 말씀의 생명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우리 개인과 교회와 세상에 보초를 서는 운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머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지 철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가 성령의 불로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은 말씀, 죄악과 고통의 바위를 부서뜨리는 망치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슴의 묵상을 통해 불같은 말씀, 망치 같은 말씀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에만 머물러 있을 말씀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 생활로 옮겨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머리지식만이 아니라 가슴지식과 생활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로 옮길 때 “아,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살아 보니 그대로 되는구나!”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신자 개인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타성과 부패에 빠지기 쉽습니다. 종교개혁은 우리의 심층심부를 뚫고 들어가서 우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초를 서는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지식에서 가슴지식으로, 가슴지식에서 생활지식으로 나가게 하는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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