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우 목사의 사진에세이 ‘순례자의 길’ ] (6)개혁, 길을 몰라서 못하는가
양과 목자의 비유는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매우 익숙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양이라고 했다. 목축을 주업으로 했던 이들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비유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양을 이끌고 다니는 목자를 보지 못하고 자랐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해 본적이 없는 이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고 오해를 사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내가 오해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대목이 하나 있다. 나는 양과 목자가 있는 그림을 평화롭고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이라 생각했고, 목자를 따라 다니는 양들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울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유적지 답사 길에서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환상이 깨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이 아니었다. 목자는 우아한 자태로 지팡이를 짚고, 앞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리에서 이탈하는 양,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는 양 등 사고뭉치들을 몰고 다니는 일이 중노동임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목자를 따라 다니는 양들도 결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양들은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때가 묻어 거무튀튀한 색깔들이었다. 그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순례자의 길을 가는 우리는 수정처럼 맑은 존재가 아니며, 순백색의 눈과 같이 깨끗하고 순수한 자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때 묻어 추하고, 굽고 휘어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목자 앞의 양들을 좀 더 깨끗한 양과 좀 더 더러운 양으로 구분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순례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삶은 누가 보아도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이었다. 바리새인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자신을 절제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거기에 비해 세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혀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잘난 척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고 남을 비판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인 줄 알고, 감히 얼굴도 못 들고 흐느끼며 회개하고 자복하는 세리의 기도는 들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추하고 비뚤어진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길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갈수록 더러운 때는 더 묻기에 순간순간 자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는다. 개혁의 방향도 제시한다. 개혁의 길을 묻고 답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녕 우리가 개혁의 길을 몰라서 못 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고 깨닫고 있는 것만 바로 실천해도 정말 잘 할 수 있다.
개혁은 남이 아니라 나부터 하는 것이다. 남을 독려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한다. ‘주여.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하게 하소서.’ 개혁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말없이 바른 길을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말을 하지 않고 행동을 하게 하소서.’ 개혁은 비판이 아니라 회개로 시작하는 것이다. 비판하지 않고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회개하지 않고 비판만 한 것을 용서하소서. 주여, 남이 아닌 나부터, 말이 아닌 행동으로, 비판이 아닌 회개로 개혁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