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2- ⑩ 진리 그리고 교회(하):설교

‘바른 교훈이 좋은 교훈ʼ 임을 깊이 인식하며 참되며 순수하고 유익한 것을 전하는 데 힘써야

종교개혁은 강단의 개혁

설교는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으로 목사에 의해서 행해진다. 오직 목사만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강도권을 가진다.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 지체된 성도들의 연합체에 있다면, 교회의 당위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데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의 순수한 선포(pura praedicatio verbi, pure preaching of the Word)를 참 교회의 첫 번째 표지(標識)로 여겼다.

설교의 존재는 말씀의 존재와 그 궤를 같이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말씀으로 말미암으므로(롬 10:17),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필히 요구된다(롬 10:14). 종교 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다. 예배의 지향점이 ‘보는 예배(cultus visus)’로부터 ‘듣는 예배(cultus auditus)’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단의 개혁에 초점이 맞춰졌다. 설교가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었다. 설교가 없는 예배, 들음이 없는 예배는 공허한 외식(外飾)에 불과함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인식되었다. 칼빈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복음이 설교되고 우리가 함께 가르침 받기 위해서 모일 때 이것은 인간이 고안한 정책이거나 질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환상이거나 발명품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나온 포고(布告)이며,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영구적인 법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하며, 성도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칭찬받을 수 있었던 것은(살전 1:3)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다(살전 2:13). 새로운 설교는 있으나 새로운 말씀은 없다. 새로운 감화는 있으나 새로운 복음은 없다. 교회가 생기가 돌고 살이 붙고 주님의 큰 군대를 이루려면(겔 37:5~6, 10)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심중에 깊이 새겨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자

설교자는 자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사변을 논하거나 이론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하는 것이다.
첫째, 설교는 교훈적이어야 한다. 가르침이 없는 설교는 지침이 없는 나침판과 다를 바 없다. 설교자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가감 없이 선포해야 한다. 자기의 취향이나 의도대로 취사선택된 본문만을 전해서는 한 된다.
둘째, 설교는 고백적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어느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그 말씀에 대한 성령의 감화를 받아야 한다. 믿지 않고 설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보다 앞서지 말고 말씀을 좇아야 한다.
셋째, 설교는 변증적이어야 한다.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한다. ‘예’와 ‘아니오’가 어김이 없어야 한다. 설교는 선포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이론을 소개하여 회중이 판단해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설교를 하기 위하여 다음에 힘써야 한다.
첫째, 설교자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유일하신 교사이시자 원(原) 선포자시며 전파자이신(마 4:23)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그 들은 것을 강단에서 가감 없이 전하여야 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먼저 들어야 입이 열린다. “귀가 열리고” 난 후에야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진다(막 7:35). 올바로 들어야 올바로 전할 수 있다.
둘째,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한다. 배우지 않는 자는 가르칠 수 없다. 설교자는 청중이 듣도록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발을 벗고 듣는 자리에 서야 한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스스로를 가르치지 못한다면 끝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설교를 작성하고 전하는 전 과정에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자기 자아를 꺾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점점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으며(벧전 1:23) “배우고 확신한 일”을 선포할 수 없다(딤후 3:14). 설교자는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 강단에 서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강단에서 목사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외에 어떤 것도 선포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구령(救靈)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롬 1:17).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한다(시 104:15). 설교의 목적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선포하여 그 말씀을 듣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고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게 하는데 있다(딤전 4:6). 전하여야 할 때 전하지 않거나, 전하여도 자기의 말을 전하는 자는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요(딤전 1:10) “삯꾼”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 10:12).

▲ 종교개혁은 결국 성경에서 시작해 그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말씀을 전하는 자인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적 성취와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구원론적 적용, 그리고 성도는 주님의 영광과 함께 고난도 기꺼이 감당하고 사랑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함을 전해야 한다.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을 함께 선포

초대교회에서 말씀을 맡은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심, 그들 자신이 이 일에 증인이 됨을 선포했다(행 3:15). 사도들과 다를 바 없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설교 중에 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우리가 이 일에 먼저 증인이 되었음을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시대의 설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다는 구속사적 성취와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의를 값없이 전가해 주신다는 구원론적 적용의 두 가지 사실을 언제나 강단에서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의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선포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창세 전에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단번에 영원히 모든 의를 다 이루셨다. 주님은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일생동안 자신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준비하셔서, 자기를 믿는 거룩한 자들을 단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요 17:19; 히 5:9; 10:10, 14).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셨다(빌 2:7-8). 그리고 “자기 몸”을 주셨다. 그가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자기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9:26, 28). 주님이 자신을 주심은 생명을 주심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 5:12).
둘째, 주님은 친히 다 이루신 의를 거저, 값없이 성도에게 전가해 주신다. 전가는 우리의 것이 아니나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을 뜻한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설교에서 “이 사람[그리스도]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하여 의의 전가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됨을 천명하였다(행 13:39).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살아남과 살아감의 은혜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
셋째,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성도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그의 말씀과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그의 멍에를 메고(마 11:28)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도 받는 자리에 기꺼이 서게 된다(롬 8:17). 거듭난 성도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는 자리에 선다(롬 8:17). 그는 구원의 선물로 믿음을 지니되(엡 2:8), 그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요컨대, 설교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대속의 유일한 제사를 아버지께 ‘드리심’과 이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을 함께 선포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함께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살아남’과 ‘살아감’이 함께 선포될 때에만 설교가 참되다.

▲ ●기고
문병호 교수
(총신대 신대원)

한국교회는 현재 강단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것을 전하지 않고 오히려 받지 않은 것을 성도들에게 맞추어서, 이성적으로, 세속적으로 전하는데 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말씀의 선포로부터 비롯되었다. 베드로의 “말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 삼천이나 되었다(행 2:41). 사도 베드로가 구약의 말씀을(욜 2:28~32; 시 16:8~11; 110:1) 정확히 인용하면서 설교하니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더하는데 있다(행 2:14-47). 우리가 모두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진리를 땅 끝까지 전하여야 한다. “바른 교훈”(딤전 1:10)이 “좋은 교훈”(딤전 4:6)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참 된 것(vera), 순수한 것(pura), 유익한 것(utilia)을 전하도록 해야 한다. 아멘.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 (Soli Deo gloria in aeter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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