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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2- ⑨ 진리 그리고 교회(상)

교회는 구원의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보존하고
가르치고 변증하며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교회의 본질: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

종교개혁은 그 일차적 지향점이 말씀을 통한 교회의 개혁에 있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은 성경이 신적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은 교회의 승인으로 말미암고 성경 말씀이 각각 확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교회의 해석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실상 교회를 성경 위에 두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찾고 말씀을 듣는 일에 등한하였다.

종교개혁은 교회중보주의 혹은 사제중보주의를 거부하고 중보자는 그리스도 예수 한 분밖에 없으며 그분만이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심을 천명하면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타올랐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지체된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는 연합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하나님은 영원히 택정함을 받은 성도를 때가 되면 교회의 일원으로서 부르신다(엡 1:4~5; 벧후 1:10). 그 부르심이 구원의 때에 일어난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다 이루신 대속의 의를 우리의 의로 삼아주시기 때문이다. 즉 전가해 주시기 때문이다(요 19:30; 고후 5:21; 빌 3:9).

성도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부어주시는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요 15:26; 행 2:33), 한 부르심, 한 믿음, 한 세례, 한 소망 가운데 한 몸이 되어, 함께 그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간다(엡 4:4~5, 15~16). 교회는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언약백성의 모임이다(롬 3:24; 4:6).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롬 6:5), 그와 함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므로(롬 8:17), 그와 형제라 일컫는다(히 2:11).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이후에 성도의 교제로 나아갈 수 있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나란히 고백하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이다.

가시적 교회만을 인정하고 그것이 무오(無誤)하다고 여기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자들은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존재를 인정한다. 칼빈은 교회에 관하여 논하면서 특히 이 부분을 강조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곧 신앙고백서는 유형(有形)교회라고 일컫는 가시적 교회와 무형(無形)교회라고 일컫는 비가시적 교회의 머리가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있다(제25~26장). 비가시적 교회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총수(總數)로 이루어진 교회로서 시간과 공간에 무관하게 존재한다. 이는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성례를 거행하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함께 자라가고, 주어진 은사대로 직분을 수행함으로써 서로 섬기는 지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이는 지상에서 시작되나 지상에서 끝나지 않으며 천상에서 계속된다.

지상의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의 교회도 완전하지 않다. 심지어 교회의 구성원 가운데도 가라지가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교회 밖에도 양이 많고 교회 안에도 이리가 많다.” 오직 주님만이 끝까지 구원으로 이끄실 자를 아신다(마 24:13; 딤후 2:19; 벧전 1:5, 8~9). 그러므로 지상의 성도가 날마다 거룩해져 가듯이 지상의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져 가고 있어야 한다.

▲ 중세 로마가톨릭은 교회를 성경 위에 두는 오류를 저지르면서 말씀의 약화를 가져왔다. 결국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마리아와 성상 숭배 등으로 채웠고, 그 결과 중세 로마가톨릭 예배당은 각종 성상과 상징으로 화려한 외형을 갖게 됐다. 이에 비해 종교개혁가들은 말씀 자체에 집중하면서 예배당 역시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후스가 사역한 체코 프라하의 베들레헴교회 역시 후스를 기념하는 벽화만 있을 뿐 소박한 예배당이다.

교회의 당위:선포하는 교회와 가르치는 교회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마 17:5).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며,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은 구원의 진리로서 하나님의 존재, 속성, 사역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는 이 말씀을 보존하고, 가르치고, 변증하고, 수호할 의무가 있다.

중세교회는 성도를 귀머거리가 되게 하고 끝내 벙어리가 되게 했다. 우상을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부르면서 사제나 수사 등 특별한 자질을 지닌 몇몇을 제외한 일반성도는 우상을 보고 만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에 맞서서 교회의 본연의 직무가 모든 성도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데 있음을 천명하였다.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성도들이 각각 그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는 데 있다면 교회의 당위는 머리이신 그분께 자라가는 데 있다(엡 4:15). 그 자라감이 교회를 세워감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선포하는 교회(ecclesia praedicens)로서 본연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다. 이렇듯 그들은 교회는 교황이나 사제의 권위가 아니라 말씀 위에 세워질 때 반석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공표한 것이다(마 7:24~29).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혈관에 흐르는 피와 같이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으면 살아있다는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은 죽은 것이며(계 3:1),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도 없고 정결한 행실에 이를 수도 없다(히 9:14; 10:29). 교회의 순결함은 말씀의 순결함에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일컬어진다(딤전 3:15).

참 교회의 표지와 특성

참 교회(ecclesia vera)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규가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가 그 나라의 통치방식이다(롬 8:9, 15~17; 빌 1:19; 고후 3:17~18).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듯이(요 10:14, 27) 진리에 속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는다(요 18:37). 삼위일체 하나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무조건적 은혜, 주님의 재림과 몸이 다시 사는 것에 대한 고백이 온전치 않은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참 교회의 표지(標識)로는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합법적 거행’, ‘권징의 합당한 시행’ 세 가지가 있다. 그런데 말씀의 제정에 따른 성례의 거행만이 합법적이고, 말씀의 규범에 따라 성도를 돌이켜 세우는 권징의 시행만이 합당하므로, 결국 말씀이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유일한 표지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교회의 첫 번째 원리로 여겼다.

초대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신경(381년)에서 확정한 바와 같이 교회는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그 머리가 그리스도로서 유일하므로 하나이다. 교회는 그 유일한 그리스도만을 신부로 삼으므로 거룩하다. 교회는 지역과 공간과 인종과 민족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교회는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으므로 사도적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의 특성이라도 결여하면 거짓교회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곧 그들이 전한 복음 위에 세워졌으며, 그 머릿돌은 그리스도 예수시다(엡 2:20; 시 118:22; 마 21:42; 막 12:10; 눅 20:17; 행 4:11; 벧전 2:7). 오직 그에게 부착(附着)할 때에만 교회는 생명의 진리에 거하고 생명의 길에 서게 된다(요 14:6). 그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시고(행 20:28),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행 2:33). 그러므로 교회는 “믿음의 주요”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주님의 터 위에서만 온전해진다(히 3:1; 히 12:2). 그가 머리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교회는 영원하다(히 13:8).

교회와 복음전도

종교개혁은 말씀을 들음이 없이는 믿음이 없으며, 말씀을 듣는 믿음 곧 “믿음의 말씀”의(롬 10:8; 딤전 4:6) 역사가 없이는 구원이 없음을 선포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 전도라고 여겼다.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더하는 데 있다(행 2:14~47). 이를 위하여 우리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겔 2:5, 7; 3:11),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피를 토하듯이 전해야 한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지혜로운 사람과 같이 된다(마 7:24). 전파하는 자는 주관적인 사변이나 관념이나 경험적 이치가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벧전 1:23). 그는 자기 자신이 “배우고 확신한 일”을 선포해야 한다(딤후 3:14).

▲ 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교회는 거룩한 주님의 몸이지만(골 1:18, 24; 엡 5:30) 여전히 거룩해가는 과정에 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교회는 날마다 진보하므로 거룩하다.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말씀은 무오(無誤)하나 지상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 위에 말씀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주님이 교회를 성결하게 하셨으나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참조. 히 9~10장). 교회는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요 ‘쉴 곳’이 된다(시 132:13~14). 낮과 밤의 운행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영영 쇠하지 아니한다(렘 31:35~36).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듯이(벧전 1:23~25) 그 말씀과 함께 교회도 영원하다. 다만 그 말씀과 함께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 가고 있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 should be always being refo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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