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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은혜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주어진다[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2- ⑦ 오직 은혜의 진리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돼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 선택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 발행하던 면죄부가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이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하려 했다. 루터의 요지는 죄에 대한 값을 이미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값을 치를 필요가 없고, 치를 수도 없다는데 있었다. 이 사상은 그의 저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일목요연하게 전개되어 있다.

이 저술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과 자유는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이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 매임이 믿음이며, 성도는 어떤 자질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저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로서, 누구나 그 은혜 앞에 동등하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전적인 은혜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자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 또한 아무도 없다. 이것이 루터가 제창한 만인제사장주의의 요체였다.

루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로써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말하고자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러한가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칼빈을 기다려야 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는 가운데서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상실하여 뜻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모두 악하므로 자신의 자질이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그의 예정론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칼빈은 성도의 구원이 창세 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비롯됨에 착념하여 자신의 언약신학을 개진했다.
그 작정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정하셨다.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만이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딤전 2:5; 요 14:6).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그에게만 있다(요 1:14, 17). 둘째, 구원의 방식은 대속(代贖)으로 정하셨다. 이에 따라 주님은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셨다(엡 5:2; 갈 1:4). 즉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셨다(딤전 2:6; 막 10:45). 셋째, 이러한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택된 사람에게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짐이 작정되었다. 이러한 선택에는 어떤 조건도 따르지 않으며 오직 긍휼히 여기시고, 이를 그저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만이 있을 뿐이다(엡 1:4~5; 롬 9:14~18).

▲ 성도의 구원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핵심은 아들을 내어주심이며, 그 아들이 순종으로 모든 형벌을 당하심에 있다. 그 은혜로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이르는 참회개로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됐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경륜 혹은 질서를 언약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언약의 두 요소로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자신을 드리신 아들의 공로가 필수적임을 줄곧 강조했다. 택함 받은 사람은 자기의 어떤 공로도 없이 “값없는 은혜로(gratia immerita)” 구원을 받는다. 반면에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한 “마땅한 형벌로 말미암아(poena debita)” 영원한 사망에 이른다(<기독교 강요>, 3.23.11). 그러므로 이러한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二重豫定)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는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 미친다. 아버지가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아들의 공로는 그가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모든 형벌을 당하신 순종과 우리를 거룩한 백성 삼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모두 행하신 순종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게 된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기독교 강요>, 3.17.10).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는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더하신다(롬 8:32). 아들이 다 이루신 모든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轉嫁)되어서, 우리가 다시 태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살아남도 살아감도 모두 은혜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는 우리의 생명과 삶에 모두 미친다. 구원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다. 그 의는 그 누구에게도 돌려질 수 없으며, 심지어 교회에도 돌려질 수 없다. 교회의 의는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은 백성이 모이고 그에게로 자라갈 뿐, 교회가 의의 원천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의 외에 다른 의를 말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임을 자처하거나 자임하는 행위이다.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rimatus)을 말하는 로마 가톨릭이 그 자리에 서 있다.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진다(행 2:33).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아무도 자녀의 영을 받음이 없이 자녀의 은혜를 누릴 수 없다(롬 8:15; 갈 4:6). 구원의 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믿음조차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다(엡 2:8). 믿는 것조차 은혜이다. 믿음으로 비로소 택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택함이 있으니 믿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하나님의 큰 일(행 2:11)을 다 이루심으로(요 19:30), 창세 전에 그 안에서 택함을 받은 백성은(electio) 의롭다 칭함을 받고(iustificatio) 거룩하게 되며(sanctificatio) 영화롭게 된다(glorificatio)(롬 6:22; 8:30). 이렇듯 선택과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구원 과정 전체에 미치는 은혜가 모두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

우리는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전적 은혜로(tota gratia) 구원을 받았다.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에 이르는 참 회개로 죄를 사함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됐다(롬 8:17). 이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롬 8:9).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눅 11:13). 어찌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는가(갈 3:3)? 성령은 모든 선한 것, 좋은 것, 신령한 것, 하늘에 속한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은사로, 거저 주신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다(受納).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과 감동이 없이는 아무도 성경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믿음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씀을 심중에 새기고 그것을 반향시키는 정서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어떤 공로도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았음을 믿는 데 믿음의 시작이 있다. 하나님은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에게서 믿음을 찾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 10:6) 즉 “믿음의 의”(롬 4:13)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 아브라함이 믿어서 의롭게 된 것은(창 15:6) 오직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로 말미암았다. 이를 강조하면서, 칼빈은 “의는 복음에 의해서 부여되고 믿음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로마서 1장 17절을 주석했다.

우리의 의가 믿음에 달려있는 것은 사실이나, 구원의 과정 즉 구원서정(救援序程) 전체에 있어서 믿음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 자체의 공로가 아니라 그것에 부여되는 은혜 때문이다. 믿음은 구원의 값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도구일 뿐, 그 자체로는 어떤 값(pretium)도 지닐 수 없다. 믿음의 의는 믿는 행위 혹은 믿음의 행위에 기인하지 않는, 값없는 의이다. 그것은 율법의 의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다(롬 3:20-22; 롬 10:4).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적으로 믿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선행도 상급도 모두 은혜이다

성도의 생명뿐만 아니라 생활도 은혜이다. 은혜로 생명을 얻었으니 은혜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오직 은혜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갈 5:6)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는 성도의 구원 전체에 미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율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외치게 된다(빌 4:13). 우리의 의는 믿음의 의밖에 없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대체하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우리 속에 부여하신 은혜의 선물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곳간에 들이는 알곡으로서 선행(善行)의 열매를 맺고 상급을 받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것을 찾지 아니하시고 자신이 주신 것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의지조차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우리의 마음먹는 것도 온전할 수 없다. 오직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만이 진리를 알고 그 증거대로 행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요 14:12, 17, 26; 15:26; 16:13~16).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로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길을 가게 된다(롬 8:17; 엡 3:6; 요 17:22, 24). 이 또한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 ●기고
문병호 교수
(총신대 신대원)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죄에 대해서는 자유하나 의에 대해서는 스스로 종이 된다(롬 6:15-23). 주 안에서 자유함을 입은 자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종노릇한다(갈 5:13-14).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 안에 다 내려놓고 이제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사랑의 짐을 진다. 그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마 11:28-30). 그것은 은혜의 멍에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는 삶 -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남은 사랑의 짐을 지는 것 또한 우리에게 미치는 은혜요, 은혜 위의 은혜이다(요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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