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 목사(로뎀교회)

▲ 권호 목사(로뎀교회)

설교, 왕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

케루쏘는 신약 전반에서 설교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로 쓰였다. 케루쏘의 뜻은 한국성경에서 주로 ‘전하다’ 혹은 ‘전파하다’로 번역되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설교하다(to preach)’로 번역된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에 대해 설교했을 때(막 1:4), 예수님께서 회개와 천국에 대해 설교하셨을 때(마 4:17),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설교했을 때(고전 1:23) 모두 이 동사가 쓰였다.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고 명령했을 때도 동일한 단어가 쓰였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설교하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 때 케루쏘는 왕 혹은 다스리는 자의 메시지를 전령이 선포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였다. 전령은 임명받은 자이기에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사람들의 반응과 관련 없이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바울의 말이 이해가 된다. 바울에 따르자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그렇기 때문에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바울은 왕 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보냄 받은 전령으로서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의 뜻과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했다. 또 이 단어의 배경을 알면 바울이 왜 디모데에게 어떤 환경에서든지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이해가 된다. 살펴본 것처럼 전령은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갖 어려운 환경들을 극복해야 했다.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충실하게 왕이신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권면했던 것이다.

설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유앙겔리조는 신약성경에서 케루쏘와 더불어 ‘설교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또 다른 대표적 단어다. 케루쏘가 설교의 행위를 강조한다면, 유앙겔리조는 특별히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는 단어다. 유앙겔리조는 주로 ‘복음을 전파하다(to preach the Gospel) 의미로 쓰였다. 누가복음 8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듣는 자에게 기쁜 소식(good news), 복음을 전하셨다. 이때 좋은 소식을 설교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유앙겔리조가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8장 4절에 따르면 핍박 때문에 흩어진 성도들이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유앙겔리조와 케루쏘를 같은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이 구절을 ‘말씀을 설교했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유앙겔리조가 쓰였기 때문에 한국어 개역개정은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로 잘 번역해 뜻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이 구절은 핍박 받는 상황 속에서도 성도들이 세상에 기쁜 소식, 복음을 전했던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설교자가 기억해야 할 함의

정리해보자. 케루쏘와 유앙겔리조는 성경에서 둘 다 설교하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 동사다. 전자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외쳐야 할 임무를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사이다. 반면 후자는 설교의 내용을 강조하는 단어로, 설교로 전달해야할 것이 기쁜 소식, 복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동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첫째, 설교자는 하나님의 전령으로 부름 받은 자다. 둘째, 그렇다면 메시지의 권위는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를 보낸 자에게 있음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설교자는 자신의 임무가 자신을 보낸 하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 설교자가 전해야 할 소식은 우리를 향한 좋은 소식, 복음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명자이며,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임무를 가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설교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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