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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묵은 총회와 총신의 갈등 해법은 없는 것일까?홍성헌 목사(성주중앙교회)
▲ 홍성헌 목사(성주중앙교회)

총회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이라면 수 년 전부터 난치병처럼 앓아온 총회와 총신간의 갈등에 이제는 답답함을 넘어 큰 피로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하 해묵은 내홍의 아픔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찾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한 식구요 한 지붕 아래 사람이라는 큰 우산 아래서 승자독식의 서바이벌게임의 마인드가 아니라 역지사지의 지혜로 상생 공존공영의 하모니를 창출해야 한다.

첫째, 총신은 왜 총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가? 총회기관인 총신은 의당 총회의 결정을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일반적이고 상식적 사고를 모를 리가 없는 총신은 왜 따르지 않는 것인가?

‘총회의 지도를 받는다’라는 것의 범위나 적용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해 볼 때 총회신학교의 신앙이나 신학을 지도하는 것이지 인사와 행정, 그리고 학교운영의 전반에 걸친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만일 총신대학교의 인사와 행정 운영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총회의 지도를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독립된 법인체로서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결과물들이 나오게 될 것인지는 정말 불안할 수밖에 없다.

둘째, 총회의 지시나 결의가 적법하며 합리적인가하는 원천적 질문에 대한 것이다. 총신이 ‘총회의 직영’이고 총회 아래 있는 ‘기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체적 개괄적 규명으로 지칭하는 것일 뿐 실질적 각론에 있어서는 독립법인체인 총신은 총신대로 붙들고 가야하는 다른 법인체 운영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3년 여간 지속되어오는 총회 결의를 앞세운 총신에 대한 압박과 지도 그리고 제제를 짧지 않은 시간 지켜봐오면서 돌아보게 된 점이다.

우리는 혹여 총회결의 지상주의나 총회결의 제일주의 같은 동굴 속에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굳이 단어를 동원해 본다고 하면 팩트 제시나 증거는 없는, 다수의 분위기에 따른 중우정치의 모습은 아니겠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총회 결의나 결정이 존중되어야하지만 그것이 현 국가사회의 실정법보다 우위를 점하거나 능가할 수는 없고 또 해서도 아니 될 일이며 헌법보다 우월하게 우선시 할 수는 없다. 일례로 목사의 권징권이 노회에 있는데 총회에서 기소위원을 내어서 합당하고 적법한 절차를 따라 범법이나 범과의 적시가 있는 서류도 없이 그냥 임원회의 행정지시로 권징을 노회에 지시명령으로 하달하는 것이 합헌적인가? 하는 데는 고개가 갸우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공존 상생으로 공영하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총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서바이벌게임은 안 된다는 것일 것이다. 총신은 그야말로 교육기관으로서 총회와는 다른 특성들이 있다. 총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관리감독이 신학이라는 학문과 영성 그리고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연속과 지속성이 총회보다 훨씬 더 깊이 요청되는 곳이라 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무너지거나 부재하게 될 때 그때의 총신은 참으로 힘 있는 폴리프로페서 집단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총신은 우리 총회의 개혁신학을 유지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소한 리더십이 보장되는 한도 내에서 정관의 개정이나 운영에 관한 조정이 필요하다. 또한 중대한 범과에 대한 총회의 총신에 대한 합법적 철자에 의한 처리와 지도규정도 필요하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진리문제가 아닌 이상 이해와 조정 그리고 정반합의 지혜로 머리를 맞대고 최고와 최선은 아닐지라도 보다 더 나음을 향한 각고의 고민과 대화와 결단이 필요한 때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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