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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의 설교] 복음의 야성을 회복하라(롬 1:8~17)이권희 목사(서울 신일교회)

복음의 야성으로 충만해야 삽니다
복음으로 돌아갈 때 능력을 회복하며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 이권희 목사(서울 신일교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수혈을 통해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은 1901년부터라고 합니다. 병리학자 칼란트 수타이너가 혈액형을 발견하면서 피를 공급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을 살린 것은 전적으로 수혈의 힘이었으며, 지난 100년 동안 수혈은 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수혈은 사람의 영혼까지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한 영혼을 새롭게 하고 그를 변화시킵니다. 한 가정을 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 나라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8~17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8절부터 13절에서는 로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어 14절부터 17절까지는 복음에 관한 바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복음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복음(1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2절)입니다.

안타깝게도 로마교회 성도들이 어느덧 이 복음에 대해 무뎌졌습니다. 들어도 감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적신호가 켜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능력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었습니다.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생전에 “한국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복음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제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우리가 복음하면 다 아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설사 알면 뭐합니까? 가슴이 뜨겁지를 않아요. 냉랭합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절) 로마교회 교인들은 복음을 알았지만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함을 뜨겁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외침이 저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다시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라고 했는데, 이것은 순서를 말하는 것도 되지만 ‘모든 사람’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 즉 인류의 죄를 사하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부수게 합니다. 죄를 이기게 합니다.

요즈음 북한이 개발하는 ICBM(대륙간 탄도유도탄)의 위력은 가공할 만합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수천 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ICBM이 가공할 만한 능력이 있지만 죄를 이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어요. 여러분! 진짜로 능력 있는 것은 부수는 게 아닙니다. 회복하게 하는 것이 진짜 능력입니다. 설교도 죄를 지적하고 막 깨부수기는 잘하지만 회복시키지 못하는 설교가 있어요. 반쪽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인간의 죄를 부수고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나요? 오직 복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복음이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복음의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죄를 범한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처럼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바울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을 때,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고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구속을 총체적으로 완성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런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15절). 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복음을 다시 전하려고 했을까요? 만약 복음이 단회적인 능력만 갖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복음을 알고 복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교회 성도들은 지속적이고 현재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야성(野性)’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Now)’ ‘이 곳(Here)’에 계속해서 능력으로 임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 삶의 현장과 하루하루 일상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21세기 한국교회도 로마교회 교인들처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복음의 야성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잃었습니다. 정말 나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나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을 좋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야성이 뭡니까? ‘본래 갖고 있는 그 본연의 성질’입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본래 갖고 있는 복음의 성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후 325년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전의 초기 성도들의 신앙은 복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붉은 순교’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복음의 야성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온실 안의 신앙처럼 나약합니다. 힘이 없어요. 무엇보다 십자가 앞에서 처절하게 싸우려는 의지가 부족합니다.

제가 보니 오늘날 성도들이 죄와 싸워 너무 쉽게 무너집니다. 죄에 대항해 승리하겠다는 투지가 부족합니다. 한 마디로 분투의 영성이 부족합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의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이런 야성이 없어요. 승부욕이 없어요. 죄와 싸워 패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룩을 지키기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이 많은지 몰라요.

사업을 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 법대로 사업하기란 정말 어렵다고 합니다. 직장생활 역시도 공의를 지키기가 어렵대요.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몰려옵니까? 문제는 그 싸움에서 너무 쉽게 손을 든다는 것입니다. 좀 처절하고 생명을 내놓는 필사적인 힘이 부족해요. 결국 복음은 세상과 구별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만 했을까요? 복음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새로워서도 아닙니다. 전혀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복음의 야성으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치열한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맥없이 지면 안 됩니다. 분투해야 합니다. 승리할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2017년은 개혁교회에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한 마디로 ‘애드 폰테스(Ad Fontes)’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즈음 유럽에서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사조가 생겼습니다. 르네상스의 기치가 바로 ‘애드 폰테스’였습니다. 그 의미는 ‘원천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이 운동은 알프스산맥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으로 나뉘었는데, 이남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자’는 운동이 되었습니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인간의 존엄성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근본은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으로 돌아갈 때 능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의 야성을 회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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