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섭 목사(마을안교회)

▲ 최영섭 목사(마을안교회)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 해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개혁에는 희생이 따른다. 하지만 결국은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루터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이 있다. 체코의 얀 후스다. 그는 성경에서 벗어난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화형을 당했다. 그 후 그를 기념하여 체코의 프라하 구 시청광장에는 얀 후스의 동상이 세워졌다. 개혁을 위해 희생을 치른 것은 얀 후스 뿐만은 아니었다.

체코의 프라하 구 시청광장 한 편에 시청사가 있다. 그 주변에 얀 후스를 따라 가톨릭교회에 반항하다 처형 당한 후스파 지도자 27명의 머리를 모아 두었던 곳이 있다. 그곳에는 하얀색 십자가 27개가 바닥에 깔려있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누군가 두고 간 꽃 한 줌이 땅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이렇듯 개혁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리고 그 희생에는 또 다른 희생이 힘을 모아 따른다. 그리고 위대한 결과가 주어진다. 1415년 7월 6일 종교개혁을 위해 인생을 바치며 죽어가던 얀 후스(거위라는 의미가 있음)가 화형을 당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금 당신들은 한 마리 거위를 죽이지만 후에는 굽지도 삶지도 못할 백조가 등장할 것이오.”
그 후 100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말대로 백조가 나타났다. 루터다. 루터(백조란 의미가 있음)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궁정교회 앞에 붙였다. 종교개혁의 길을 간 것이다. 그 후 루터는 3가지를 외쳤다.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솔라 피데(Sola Fide), 솔라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즉,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이다. 그 백조의 외침은 500년 동안 이 세상에 위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터로부터 500년이 흘렀다. 그 동안 루터를 따르던 자들은 자신들이 원 백조의 외침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호수 위 백조의 우아함으로 500년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또 다른 백조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호수 위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백조가 아니라 큰 날개를 가지고 하늘로 비상(飛上)하기를 바라는 백조를 바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종교개혁에 대한 외침도 많고 세미나도 많고 기도회도 많다. 종교개혁에 대한 외침과 세미나를 하는 것은 거위를 뜻하는 후스와 백조를 의미하는 루터의 영적 후계자임을 확인하는 긍정적인 일이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는 참 귀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이 호수 위 백조의 ‘우아함’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개혁은 예수처럼 살아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다. 섬기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쏟으신 보혈로 죄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섬김의 길을 가셨다. 또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아보시고 그들과 삶을 나누는 길을 가셨다.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자의 길은 예수를 닮은 섬김이어야 한다.
섬김보다 군림하려는 자가 많을 때 그 공동체는 쉽게 무너진다. 노회도 총회도 그리고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 목회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낮아짐을 잊고 예수님 보다 더 위에 서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당시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도도하게 진행 중에 있다. 먼저 교회가 개혁돼야 사회도 살고, 나라도 산다.

소수이지만 삶으로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목사들이 있어 소개 한다. 10여 년 전부터 초교파로 모인 목사들 10여 명이 삶으로 예수를 따르고자 실천운동을 하고 있다. 삼십분의 일 운동을 하고 있는 목사들이다. 그들은 목회를 하면서 한 달에 하루 기도원 가는 마음으로 노동현장을 찾아 노동을 한다. 그 하루 동안 공장에도 가고, 과수원에도 가고, 건축 현장에도 간다. 물론 정당한 임금을 받는다. 그렇게 하여 하루만이라도 지도자 목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지시받는 사람으로, 식사 줄을 따라 자기 순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식사하는 사람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1년 동안 모은 임금으로 노숙인과 소외된 분들에게 직접 구운 호떡이나 떡볶이 등 작은 음식을 나누며 삶으로 예수 따르기를 소원한다.

물론 모두 동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루터를 따르는 백조들이라면 이제 두 날개를 펴고 물위를 차고 오르는 날개 짓으로 비상하는 삶이 있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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