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조선 500년을 통틀어 태평성대로 불리는 때가 세종대왕의 치세이다.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때를 태평성대라 하는 것은 정법(正法)과 조화를 소중히 여겼던 그분의 정치철학 때문이다. 우리가 지키는 스승의 날 5월 15일도 세종대왕의 탄생일 아닌가. 세종대왕은 정치에 임할 때 사람이 지켜야 할 변치 않는 법도인 상경(常經)과 왕명으로 임기웅변에 대응한다는 권도(權道)를 존중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자세를 취했다. 제왕이면서도 정법을 몸소 실천해 보이는 것으로 대소 신료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런 예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의 이야기이다.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둔 재목으로 별실 두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띠(茅草)로 덮게 하였으니 장식은 친히 명령하여 힘써 검소하게 하였다. 임금은 이때에 와서 정전에 들지 않고 이 별실에서 기거하였다.” 무슨 말인가. 대궐 안에 초가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기거하면서 백성들의 고초가 무엇인가를 몸소 체험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세종의 지행(知行)함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료들은 이런 제왕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의정부의 수장들인 삼정승과 육조판서들은 지존께서 기거하는 초가마당에 꿇어앉아 대전으로 들어갈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성군 세종의 삶을 기록한 <세종장헌대왕실록>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존경스런 성군인가를 보게 하는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놀라운 사실은 세종이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초인적인 업적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너무 많은 독서량 때문에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만성 안질을 앓고 있었고 옆구리에 난 창과 풍질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다 각기병이 있어 보행조차 자유롭지 못했고 당뇨병까지 있어 병고가 말이 아니었는데도 수많은 과학기기와 우리의 자랑스런 언어인 정음(正音)을 창제하였던 것이다. 당시 왕실과 조정은 이러한 제왕의 환후를 걱정하여 검은 염소를 다려 드시라고 간청했지만 세종은 외국에서 들여온 염소를 약으로 써 멸종케 할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하늘이 내린 성군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성군 세종은 이런 자세로 이상국가를 소망하면서 치도에 임했다. 그의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용비어천가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도 좋고 열매도 좋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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