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조선이 5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데는 지배 계급이었던 선비들의 학행일치 때문이었다. 배운 것은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 학생일치이다.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을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매도한 것이 조선 선비사회 풍속이었다. 아끼고 절약해야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청렴정신이 청백리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청렴정신을 공직사회에서 몸소 실천한 관리를 청백리라 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청백리들을 배출하여 대동(大同)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조선 500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정의사회가 세종조였다. 세종대왕이야말로 제왕중에 가장 백성을 사랑했던 성군인데 이 시대에 세종대왕을 도운 청백리가 황희, 맹사성, 유관이다. 이들 세 사람은 의정부의 삼정승으로 우정도 돈독했지만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주군인 세종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루어 낸 청백리들이었다. 이들 중 황희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전반까지 육조 판서를 모두 역임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을 18년간 역임하면서 귀감을 보인 청백리였다.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였다.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우던 육진개척의 무장 절제 김종서가 공조판서로 있을 때였다. 김종서가 자기 소속관아인 공조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약간의 술과 유과를 마련하여 정승 판서들까지 접대하게 했다. 이때 의정부 수장이었던 황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엄히 문책한다. “국가에서 예빈시를 설치한 것은 접대를 위한 것 아닌가. 만약 시장하다면 예빈시로 하여금 음식물을 마련하게 해야지 어찌 사사로이 음식물을 제공한단 말인가?” 지금의 김영란법이 이미 조선 세종조에 있었음을 보게 하는 대목이다. 예산외의 경비 지출로 인한 부작용을 경계했던 것이다.

지금 이 나라, 아니 우리 총회나 노회에서도 공금을 눈먼 돈으로 알고 써버리는 예가 얼마나 많은가. 황희 정승은 어느 날 조회에 거친 베로 만든 관복을 입고 나왔다고 한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모든 대신들이 헌 관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좀 지나치다는 감도 없지 않지만 존경받던 청백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가를 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만한 인품과 인격으로 평가 받는 사랑이 황희였기에 사치를 좋아하는 관료들을 감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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