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바울, 갑을관계를 뒤집다(몬 1:16~18)
[이 주일의 설교] 바울, 갑을관계를 뒤집다(몬 1:16~18)
권호 목사(로뎀교회/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설교학)
  • 김병국 기자
  • 승인 2017.06.22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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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바꾸면 은혜의 반전이 옵니다
범죄자에 기회를 주고 회복시킨 바울과 빌레몬의 모습 닮아야

▲ 권호 목사(로뎀교회.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설교학)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 1:17~18)

현재 한국사회는 대화를 기반으로 여러 분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구체적인 열매로 맺어지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 예로 노사관계는 늘 풀기 어려운 과제로 언급됩니다. 이익을 창출하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와 그에 따른 정책들이 심각한 갈등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노사문제와 산업체들의 갈등을 두고, 소위 ‘갑을관계’로 표현되며 쟁점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와 각 경제단체들이 다양한 노력을 통해 갑을관계 갈등의 해결점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관점을 갖고 노사관계 및 갑을관계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터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하고도 깜짝 놀랄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 그 시대의 영원한 ‘을’

1절에 따르면 편지의 저자는 바울입니다. AD 60~70년경 바울이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수신자는 빌레몬인데, 그는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이며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로 빌레몬에게 무엇인가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네시모의 문제였습니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6절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종, 노예는 흔히 ‘말하는 짐승’으로 여기던 때입니다. 현대사회의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불변의 상하관계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종은 주인 앞에 ‘을’입니다.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반면 주인은 종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갑’인 것입니다. 그것도 ‘슈퍼 갑’이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함이 생깁니다. 어떻게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바울을 알게 된 것일까요. 자세한 상황은 모르나, 많은 주석가들은 다음 구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8~19절)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재정적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자신에게 청구하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오네시모가 빌레몬 밑에 있을 때 그의 재산에 불의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재산을 빼돌리거나 훔쳤던 것 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정횡령은 심각한 범죄입니다. 심한 처벌을 받을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오네시모가 도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에 범죄자들이 그랬듯이 지중해 연안을 숨어 다니다가, 그 지역의 로마 군인에게 잡혀 결국 감옥신세를 지게 된 듯합니다. 오네시모는 이제 을일뿐 아니라, 처벌을 피해갈 수 없는 범죄자 을이 되었습니다.

갑을 관계를 뒤집다, 종이 아닌 형제로!

끝장난 것 같은 인생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10절). 또한 그를 자신의 ‘심장’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12절). 오네시모 또한 힘을 다해 바울을 섬기며 도왔습니다. 13절을 보니 바울은 그런 그를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법에도, 그리스도인의 도리에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다시 원래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친필 편지로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마치 나를 받아들이듯 환대해달라고.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6~17절) 그렇습니다. 바울은 지금 놀랍게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당대 주인과 종의 관계를 뛰어 넘어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주인-종’ 관계의 틀을 뒤집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는 바울 시대와 같은 주인과 종의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평등한 노사관계나 강압적 갑을관계를 볼 때, 현대판 주종관계의 느낌을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회사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고용인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가정도 신앙도 뒤로한 채 일에 빠져 살아야 합니다. 갑의 일방적 지시에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주어진 할당목표를 채워야 합니다. 이름만 달라졌지 내용은 주종관계 아닙니까.

이런 현대판 주종관계에서 한 개인이 오네시모처럼 회사에서 재정적 실수를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 판매점이 실수로 본사의 판매 전략에 오점을 남겼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습니까. 즉시 판매점 제재, 혹은 인사 강등이나 해고를 당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크리스천 기업운영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실수한 개인과 판매점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쉽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줄 수 있을까요. 솔직히 그렇게 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은 어땠겠습니까. 그의 재산에 손해를 입힌 범죄자 을, 오네시모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오네시모를 이해하거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경제계에서 현대판 바울과 빌레몬을 꿈꾸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오네시모에게 기회를 주고, 그를 회복시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당시 노예이름 중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쓸모 있는’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Mr. Useful’, 한국말로 하면 ‘쓸 만한 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노예이름으로 딱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 쓸 만한 자가 주인에게 나쁜 짓을 해서 쓸모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는 다시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의 이름을 언어유희를 사용해 빌레몬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오네시모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 그를 회복시키라고.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11~12절) 바울은 이렇게 오네시모에게 기회를 주고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관계적, 신앙적, 문학적 힘을 다해 빌레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네시모의 재정적 잘못을 자신이 갚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18절).

우리 시대에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노력하는 크리스천 사업가들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고용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손해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이런 예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고민해보고, 좋은 크리스천 기업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숙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크리스천 기업인들이 실수한 개인에게, 관련 사업체에게 다시 가르쳐주고, 기회를 주고, 원래의 모습으로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경제계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당부대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였을까요.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랬을 것이라 봅니다. 바울은 이미 빌레몬의 순종을 너무나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놀랍습니다. 당시 사회의 주종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관계로 변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주종관계의 반전을 우리 또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실수하는 개인과 관련 업체를 다시 가르쳐주고, 기회도 주고, 일어설 수 있는 힘까지 주는 그런 형제관계를 우리의 일터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쉽지 않지만 이런 놀라운 일들이 크리스천 일터에서 일어날 때, 믿음의 파장이 주변 사람들과 경제계에 기분 좋은 소문으로 들리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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