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신 목사(익산 북일교회)

▲ 김익신 목사(익산 북일교회)

하나님의 간섭과 선한 역사로 인해 새로운 정부가 감격적으로 출범했다. 이제 막 출범한 문재인 정부를 향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기대를 거는 부분이 있다. 바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표한 점이다. 부디 약속이 잘 이루어져 우리 조국이 더욱 바르고 정의로운 나라로 반듯이 서기를 소망한다.

우리 총회도 서서히 한 회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회기를 시작할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날 우리 총회와 산하 기관들은 자신의 역할을 열심히 감당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며 전국 교회에 아쉬움을 주고 심지어 교단 발전을 가로막는 행태까지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총회를 맞을 때마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기도하며, 진행되는 상황들을 예의주시하게 된다.

나라 경영도 그렇지만 교단 총회의 운영은 더더욱 원칙과 상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은 철저한 원칙주의 위에 서있다. 어정쩡하게, 두루 뭉실하게, 편법이나 상황논리에 따라 우리 죄를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정확하고 철저한 원칙을 적용하셔서 우리들의 죄 값을 해결해 주셨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처참하게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셔야 했다. 주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완벽하게 죄의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죽음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삶을 통해서도 원칙적인 사역의 모습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제시해주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 22:21)라고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엄격한 원칙주의적 자세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하다고 교훈한다. 로마서 3장에는 이 교훈이 잘 나타나있다. 비록 선의에서 우러난 행동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 행위라 할지라도 결코 거짓은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원칙들이 우리 주변에서 파괴되고 말았다. 점점 사라져가고, 희귀해져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취를 감춘 원칙들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가 좋다는 태도이다. 인간적 감정에 따른 결정, 세상 논리를 앞세운 결의, 내 이익과 관계가 우선하는 이기주의적인 선택들이 난무한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 총회가 과연 원칙에 얼마나 충실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총회 구성원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하는지 말이다. 규칙이나 법규는 상황에 따라 돌변하는 괴물처럼 적용되고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편익을 따라 어지럽게 춤추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때그때 군중심리에 따라 일어났던 정의감들마저 어느새 흔적 없이 묻혀버리는 서글픈 현상도 자주 목격한다. “법이요!”라고 외치는 함성 뒤에는 두려움이 섞여있다. 행여 원칙만 강하게 고수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를 지닌 융통성 없는 존재라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실제로 원칙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혼자만 선한 척 한다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자신이 던진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바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넘어지는 일들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하게 원칙을 고수하는 입장에 서야한다. 원칙과 상식이 제대로 살아나, 분명하게 적용된다면 결코 발목 잡힐 일이 없다. 그리할 때 아무 것도 두려워할 일이 없어지며,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평강 속에서 판단하며 결코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원칙주의자가 정말 그립다.

‘주일성수가 무너져간다.’ ‘예배가 변질된다.’ ‘강단이 세속화되고 있다.’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지 않는다.’ ‘무기력해졌다.’ ‘맛을 잃어간다.’ 여기저기 아우성이다. 이 또한 원칙과 상식을 버린 결과들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좋아해서…’라며 좇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 교회 공동체가 쓰러지고, 성도들이 쓰러진다. 총회가 흔들리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에게는 냉정한 진단이 필요하다.

총회가 다가온다.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일이 복잡하게 꼬여있는가? 그럴수록 상식과 원칙에 입각하여 돌파해 나가자. 이것이 성경적이다. 자신과 관련된 어떤 사안들에도 철저하게 원칙과 상식을 지키고,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천덕꾸러기 대하듯 하지않으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사는 길이고, 총회가 사는 길이며, 결국에는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다.

원칙과 상식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은 떠나라! 맷돌을 돌리려 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원칙과 상식이야말로 교회와 총회가 제 기능을 하는 어처구니이다. 어처구니가 없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한다. 복음은 철저한 원칙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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