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이기주의로 공동체 파괴…생명·구원의 성경적 진리 찾아야


< 좌담참석자 >
사회:김영우 주필(목사·서천읍교회)
박영신 교수(연세대 사회학)
송길원 목사(하이패밀리 소장)
채이석 목사(비전교회)

김영우 주필=올해 기독신문사에서 연중기획 일환으로 ‘이웃과 더불어 선한 사회를’이란 주제로 공동체를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체 혹은 공동체주의란 말이 최근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왜 관심을 모으고 있는지 우선 박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박영신 교수=지난 몇 세기에 걸쳐서 서구중심의 개인주의가 강조되어 왔습니다. 물론 좋은 점도 많았지만 방종, 이기심의 팽배 등이 만연해 부정적인 면도 솔직히 있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지적 또는 실천적 관심은 이러한 개인주의의 사회질서를 바탕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자유주의에 균형을 맞추려는 대안으로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공동체주의가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포용해서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사회 전반적인 요소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김 주필=중세의 봉건적 집단주의, 그 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서양 합리주의의 만개가 이루어지면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지금 박 교수께서 말씀하신대로 20세기 들어서 개인주의 일변도로 치닫고 보니 병폐가 많이 발생해 문제점을 보완하자는 차원에서 공동체주의가 요청 받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공동체는 대안의 모색이라고 보아야 하겠네요.

박 교수=그렇죠. 공동체주의란 용어가 대두된 것은 지난 몇 십 년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보면 사회학은 개인중심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차원의 시각으로 보려는 학문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학에서도 개인주의가 침투돼 한동안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가 최근 공동체와 사회구성원으로서 개인을 강조하는 부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공동체주의 이론으로 자기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김 주필=신학에서도 요즈음 공동체주의가 새로운 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동체이고 공동체주의의 형태를 띈 실체인데 왜 공동체주의가 강조되고 있다고 봅니까, 채 목사님.

채이석 목사=교회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주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주의가 등장했다고 봅니다. 교회의 출발은 공동체에서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보듯 초대교회는 바로 공동체 모습을 띄었습니다. 중세 때도 수도원 중심의 공동체가 있었고, 20세기에도 라이먼 콜만의 소그룹 목회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영적인 성장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왔는데 그룹으로 시작해 영적인 진보와 성장이 가능하지 않겠는가를 염두에 두고 연구를 거듭해, 70년대 미국에 급속도로 확산돼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내에도 바람을 일으켜 관심을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개인주의 대안으로서 교회성장 과정에서 공동체 운동이 부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 주필=교회의 경우 미국 교회보다는 유럽 교회가 더 공동체성이 높지 않습니까. 오히려 미국 교회는 ‘대목장주의’를 지향하다보니 개교회를 넘어서는 공동체성이 약하고 개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효과적인 종교적 단체를 만들기 위한 ‘함께’ 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대기업처럼 목표지상주의적인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경향이 한국에도 흘러 들어와 사회를 향한 반성에 힘이 모아지지 않고 오히려 개교회중심성장으로만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채 목사=그렇습니다. 유럽은 공동체의 뿌리가 깊습니다. 미국의 경우 윌로우크릭이나 새들백교회가 커뮤니티교회를 표방해 지역교회로 거듭나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커뮤니티라는 말이 지역주의의 한계를 의식해서인지 새들백커뮤니티교회는 교회이름에서 커뮤니티를 빼버렸습니다.

김 주필=한국 사회에서 산업화 이전에는 가정의 유대관계가 강했습니다. 그러나 산업화로 핵가족화 되면서 전통적인 정의(情誼)는 사라지고 이기성이 팽배돼 이혼율이 40%에 달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요즘엔 오히려 가정에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것 보다 취미, 운동, 이념집단 등에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송 목사님께서 현대 가정의 추세와 공동체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설명해 주시지요.

송길원 목사=개인주의와 방종으로 인해 공동체가 출현했다고 말씀을 하시고 또한 교회성장 차원에서 공동체가 대안으로 등장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이런 대안논리로 공동체를 볼 것이 아니라 공동체는 본질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게이나 레즈비언의 문제를 예전에는 죄로 봤지만 20세기에는 유전자 문제로 생각하고, 21세기에는 인격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가정공동체가 개인 논리에 휘말려 이제는 가족의 ‘핵가족화’가 아니라 ‘개족화(個族化)’되어 있습니다.
가정파괴의 핵심적 요인은 개인주의입니다. OECD국가 중 이혼율 3위, 5쌍 가운데 2쌍이 이혼하다보니 ‘대안가족’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혈연에 의한 가족관계가 아닌, 동아리 형태의 가족이 현재의 추세입니다. 자식 없이 부부끼리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딩크족도 출현하고 있습니다. 입양을 실시하려는 가족확대주의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가족을 개방해서 가족확대주의로 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핵가족이라 하지 않고 ‘신(new)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정보사회로 인한 신가족, 그런데 잘못돼 ‘신(sin)가족’이 되면 어쩌죠.

김 주필=가정이나 사회나 교회에서 왜 공동체가 화두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공동체라는 말은 아직 자연스러운 용어가 아닌 듯합니다. 자유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평신도들은 왜 교회라고 하지 않고 공동체라고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 너무 사회화한 표지판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 공동체라는 말이 삶의 각 영역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공동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얘기해봅시다. 자유롭게 말씀들 하시지요.

박 교수=오늘날 정황에서 문화비평이라고나 할까요.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겠죠. 사회학에서는 희랍의 전통이 공공의 선을 강조했기 때문에 거기서 공동체를 다루는 경향이 높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서 공동체의 모습을 찾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군사정권 속에서 개인구원이나 사회구원이나 모두 공공에 대한 선을 도외시해왔습니다. 성경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출발부터 관계성으로 얽혀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관계성이 희석되고 있습니다. 저는 혈연 씨족 학연 등의 유사공동체만 주장한다면 공동체를 논할 수 없다고 봅니다. 교회도 본래 공동체였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원래 우리의 모습이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교회가 느껴야 합니다.

송 목사=지금까지 명분만의 공동체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집단적 개인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공동체입니다.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해왔고 공동체라는 이름만 빌려쓴 변형된 개인주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공동체는 낡은 외투입니다. 왜 공동체가 새롭게 다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박 교수=낡은 외투의 개념이 무엇인지요.

송 목사=오래됐다는 것입니다.

박 교수=낡은 외투라고 하면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그런 뜻으로 쓰신 것은 아니지요?

송 목사=공동체라는 개념이 오래됐다는 뜻입니다. 출발은 관계에서 시작됐습니다. 아담의 외로움을 보시고 하와와 가족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족공동체의 생성을 통해 생겨난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곡된 것은 사회나 교회에서 잘못된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뿌리는 바로 가정이며 공동체 회복의 지름길도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주필=성경적의 공동체관을 이야기하기 전에 중국 인도 희랍사상에서는 공동체가 어떻게 조명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은데요.

박 교수=저는 동양학문을 잘 모릅니다만 현재 우리 사회에 대해선 나름대로 생각이 있습니다. 지식인들이 먼저 오늘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핫바지인가” “우리가 남인가” 하는 말은 학연과 지연에 얽매여 있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나타냅니다. 이런 풍토 속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연과 지연의 공평치 못한 태도로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사회의 핵심은 삼강오륜이 핵심입니다. 그 중에서 효는 가족공동체의 핵이었습니다. 사회분석 단위로 본다면 가족입니다. 우리 사회는 충보다 효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효를 바탕으로 한 유교가 500년 조선사회를 지탱했습니다. 더 올라가면 불교입니다. 불교는 혈연과 관계가 중요치 않다고 봅니다. 그걸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 적응하고 타협하고 만 것이지요. 그 이전의 무속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교 불교 무속 할 것 없이 혈연 가족중심의 복을 비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유교사회에서 논리성을 갖춰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가족공동체를 생각한다면 아마 조선사회가 모범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 혈연 중심의 공동체는 집단 이기주의를 정당화시킬 뿐입니다. 지연 학연을 넘어서지 못하는 문화는 신앙의 빈곤입니다. 혈연, 유사가족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러 과정과 역사의 길목을 건너오면서 기독교 조차도 조선시대 사회에 함몰 돼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는 힘들어 졌다고 봅니다.

채 목사=기독교의 자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가족공동체는 혈연중심이었지만 신약성경은 이웃의 개념을 이야기했고 참 이웃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각도의 해석이었습니다. 교회가 지금까지 할 일을 다 못해 발전적인 측면에서 이런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필=다시 말씀드립니다. 동양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국과 인도, 서양 중에서 희랍의 공동체관에 대해 말씀해봅시다.

송 목사=조선시대의 효는 가부장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가족의 희생을 강요시킨 형식적인 공동체입니다. 중국 인도의 가족주의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거의 똑같았습니다.

채 목사=그러나 로마시대에는 희랍적 관점보다 지역공동체와 국가공동체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 데요.

송 목사=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덧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도 가족개념은 똑같습니다. 김일성은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박 교수=가족의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족은 건강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념의 문제입니다. 가족에는 굳이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혈연 지연 학연 등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 것에 과연 공동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요? 가족 중 병환 중에 있는 구성원이 있으면 가족의 개념은 깨지는 것입니다. 희랍의 전통 중 참여가 그들의 권리이자 책임이었습니다. 나는 시간이 없어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시민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인들은 사회참여를 꺼리고 오히려 자원봉사자를 싸구려 취급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성장만 생각한다면 공동체라기 보다는 교회이기주의 집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은 어디든 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김 주필=맞습니다. 근래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는 아무 데나 마구 붙여지는 끝말 같아졌습니다. 무슨 문화, 무슨 문화 하면서 문화란 말을 여기저기 붙여대는 것과 비슷하게요. 자, 기독교 이외의 다른 공동체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기독교공동체에 대해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다음이 구약의 가정교회공동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교회공동체, 신약에 넘어와 예수께서 동서사방에서 문을 활짝 열고 모으신 말세 하나님 나라 복음 공동체에 이르는 구속사적 관찰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공동체는 필요의 산물이라기보다 당위적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란 말을 들으면 왠지 경직되고 다양함이 인정되지 않는 실체, 즉 획일적이고 상명하달만 있는 조직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는 반틸 교수가 기독교의 실재를 하나와 여럿의 구조로 파악한 것처럼 개체와 전체가 순기능적으로 상관하는 유기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만 되어있다면 교회는 공동체의 대표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객관성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객관성과 진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공공선의 실상이라 하겠습니다.

채 목사=사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그러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자체가 공동체였고 중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세 때는 지나치게 기독교 왕국을 건설해 세례 받지 못하면 사회차별과 신분차별을 받았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교회가 끝까지 관심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시적, 가변적 권역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김 주필=중세 교회는 국가성을 띄었던 게 잘못이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세교회는 국가성이 배제된 교회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오늘의 바티칸도 마찬가지로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국가성을 띄면 벌써 말세교회의 참된 모습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국가성을 띄면 안됩니다.

송 목사=신학적인 문제만 다뤄 좀 답답합니다, 생명을 매개로 한 것 이외에 공동체란 말을 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명과 구원 이외의 단어에 공동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이상합니다.
김 주필=어떤 문제든 그것을 신학적으로 스크린하지 않고 기독교적 생명과 구원을 논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생명과 구원이 있는 것만 공동체로 봐야한다면 교회 공동체 말고는 공동체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닙니까. 공동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범위랄까 조건에 대해 말씀해봅시다.

채 목사=우리 사회에서 공동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방향도 여러 군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령 동창회가 하나님의 형상성을 가지고 있다면 공동체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박 교수=공동체에 관한 개념일치는 어려울 것 같군요. 다만 공동체는 닫혀있는 근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데는 모두들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지배가 아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김 주필=비기독교인들이라도 보편선(普遍善) 또는 공동선(共同善)에 어긋나지 않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모임, 즉 공공성을 지향하며 정기적으로 모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된다면 공동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송 목사=공동체는 공공성을 띄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노사모도 공동체입니까. 공산주의도 공동체입니까. 공산주의는 사도행전 2장에서 힌트를 얻어 출발했다는 말도 있는데….

김 주필=노사모는 노무현 씨의 정치적 소신에 동조하는 팬클럽쯤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소외극복철학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정치행동방식입니다. 공공선과 배치된 것이기 때문에 20세기말에 저처럼 붕괴되지 요? 우리 사회가 본래의 모습대로 잘 나간다면 공동체성 회복이란 과제가 대두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정의는 이 정도로 하고, 마지막으로 공동체 회복에 대한 의견을 나눠봅시다.

송 목사=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가정에서 출발해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부부는 가장 좋은 자녀환경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 섬김 희생 등을 학습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것은 생략된 채 성공지상이란 숫자놀음에 빠져 우선 순위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출세보다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워 인간상을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박 교수=물론 가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웃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가정에서의 회복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교회 사회 시민단체에 참여하여 공동체적 삶을 익히고 어려 곳에 거점을 만들어 공동체성을 회복하면서 생동감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채 목사=교회가 공동체의 원형입니다. 에덴동산의 공동체는 장차 천국의 공동체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천상에서 베풀어질 기쁨이거든요. 가정과 교회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할 때 공동체가 회복되리라 생각합니다.

송 목사=논의의 배경을 확대해 주 5일 근무제도 생각해야 됩니다. 도시와 농촌간의 연결을 생각하고 이번에 주 5일 근무를 교육의 기회로 삼아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여 개인적인 삶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김 주필=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원리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공동체 회복에서도 동일합니다. 가정이나 교회가 모두 가정답고, 교회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정 교회 사회가 자기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말고 제3의 만남이 이뤄지는 그런 토대로, 근본적이고 공동적인 토대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론과 실천의 토대를 공공적이고 열린 모습으로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회복도 이런 취지에서 한 걸음 두 걸음 진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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