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500주년 특별기획]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④강과 바다를 넘어서

유럽서 사라진 개혁신학 활동, 치열한 내부논쟁에 분열 이어져 … 흔들리는 정체성, 회복 과제 막중

지난 3회에 걸친 기획기사를 통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개혁의 흐름과 1517년 마르틴 루터로 촉발된 종교개혁, 그리고 16~17세기 프랑스 스위스 영국과 스코틀랜드 등 유럽의 종교개혁 시대를 되짚었다.

또한 이 역사 속에서 마르틴 루터와 다른 개혁파의 흐름도 주목했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개혁의 몸부림, 프랑스에서 기욤 브리소넷, 쟈크 르페브르 데타블 그리고 기욤 파렐 등의 교회개혁 노력을 우리는 간과해선 안 된다. 특별히 기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목회를 강권하였고 그와 평생 친구로 지냈던 개혁자였다. 그 이후 개혁교회는 군주의 간섭 없이 의회 중심의 종교개혁을 이끌었고, 프랑스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으면서 발전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1648년에 이르러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년)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서 일단락 됐다.

17세기 이후 루터교회는 세속 권력의 보호 속에 독일과 북유럽에서 정착하고 있었다. 이때 개혁파 종교개혁은 프랑스 내에서 일어난 위그노 전쟁으로 인해, 또 스위스 내에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의 반정서로 인해,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개혁교회는 이제 강과 바다를 건너서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 및 미국에서 꽃을 피게 된다.

이번 4번째 기획은 종교개혁의 역사를 언급할 때 간과하고 있었던 18세기 이후 개혁교회의 역사적 흐름을 고찰한다. 이 시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한국교회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라은성 교수에게 ‘18세기 이후 현대 개혁교회’에 대해 들어본다.

침체한 18세기 유럽 개혁교회

17세기 네덜란드는 ‘돌드레히트 종교회의’(1618~1619년)를 거쳤지만 여전히 아르미니우스파가 세력을 확장했고, 영국에서는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1688년)으로 청교도 운동이 마무리됐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언약도 운동으로 개혁교회를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는데,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흔히 장로교회라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계몽운동(Enlightenment)이 일어나고 영국의 자연신론(Deism)으로 인해, 또 교회 지도자들이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유럽 개혁신학의 활동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자연신론에 맞서기 위해 존 웨슬리와 조지 와잇필드에 의한 부흥주의(Revivalism)가 일어났지만, 개혁신학의 발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개혁신학의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졌다고 말할 수 있다.

▲ 1843년 스코틀랜드 목사들이 목회자 임명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유교회를 결성했을 당시의 모습. 사진작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의 작품이다.

영국과는 달리 스코틀랜드는 명예혁명에 대해 맞섰다. 언약도 또는 장로교도는 감독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영국 국가에 맞서면서 1600명 정도의 언약도들이 죽임을 당했고, 2800명 정도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수천 명이 집을 잃어 1700명 정도의 언약도들이 신대륙을 찾아 떠났다.
이 때 있었던 주요한 신학적 이슈는 1711년에 내려진 수임령(Church Patronage Act)이었다.

수임령은 정부가 교회 업무만 아니라 목회자까지 임명하겠다고 덤빈 것이다. 이것은 중세교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평신도 성직 수임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과 다를 바 없었다. 수임령이 문제가 된 것은 스코틀랜드 교회 내에 이성주의를 추구하는 온건파(moderates)와 개혁신학을 고수하고자 하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s)가 서로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건파는 수임령을 지지했다. 여기에 1718~1723년 ‘정수논쟁’(marrow Controversy)이 일어났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상이 자연신론과 아울러 스코틀랜드 교회를 강타하여 분열을 일으켰다.

개혁신학은 미국에 넘겨졌지만

18세기 미국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한 1차 대각성 운동(1730~1755년)이 일어났다. 에드워즈가 대각성을 이끌었지만 정말 진정한 부흥이 이런 것인 것에 관해 늘 의심을 품고 있다가 1750년 15년 동안 목회한 노샘프턴교회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 이유는 외할아버지인 솔로몬 스탓드의 ‘중도언약’(Half-Way Covenant)과 같은 교회정책 때문이었다. 교회의 문턱을 높이지 않고 신앙의 성장을 도모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정통신앙을 망각하도록 하는 요즘 한국교회와 다를 바 없었다. 결국 대중교회를 꿈꿨던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디언을 중심한 목회로 옮기게 되었다.

이뿐 아니었다. 부흥운동을 꿈꿨던 자들이 주로 회중파 청교도였기에 이들로 인해 미국 장로교회는 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18세기(1741~1758년)에 일어난 신·구파 논쟁(Old Side-New Side Controversy)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1837년)에 일어난 신학파와 구학파 논쟁(Old School-New School Controversy)이다.

개혁신학을 지키려는 세기의 노력

19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개혁신학은 독일 신학의 악영향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철학에 영향을 받은 독일신학은 기독교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과거 이성주의자들이 행한 작태들을 답습했다.

19세기 스코틀랜드에서 1차 종교개혁(1560년), 2차 종교개혁(1638년)에 이어 3차 종교개혁(1843년)이 일어났다. 3차 종교개혁은 현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형성하면서 마무리 된다. 1711년에 내려진 ‘수임령’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거부령(Veto Act)으로 맞섰지만 총회마저 수임령을 지지하므로 하는 수 없이 개혁신학에 입각한 자들이 분열하여 나와 1843년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를 만들었다. 신학생 배출을 위해 에든버러 대학교 내 ‘뉴 칼리지’를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네덜란드도 분열을 맞이하게 된다. 네덜란드 내 신학운동은 ‘흐로닝건 신학’이었는데 이 신학은 세속 철학과 슐라이어마허 및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돌드레히트 신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비롯한 속죄론까지 거부하였고, 성경비평주의를 수용하여 성경의 무오성을 무너뜨렸다. 이에 맞서 헨드리크 데 콕을 중심한 사람들이 1834년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탈퇴하여 기독교 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 CGK)를 만들었고, 후에 이 교단은 현재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칼빈 신학대학원이 속한 교단인 기독교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es; CRC)가 되었다.

19세기 미국은 혁신적 부흥사면서 기독교 완전주의를 꿈꿨던 찰스 피니에 의해 2차 대각성 운동(1790~1840년)으로 양적 성장이 일어났으나 각종 이단종파들도 함께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분열(구학파와 신학파 논쟁, 1837년)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겪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된다. 또 이어서 일어난 3차 대각성 운동(1850년대~1900년대)은 사회복음화 운동이라 일컫는데, 각종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그 결과 느슨해진 정통신학에 대한 자세로 인해 성경비평주의가 교회에 충격을 가하므로 1902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자는데까지 뻗어나갔다.

게다가 ‘부의 복음’을 전개한 록펠러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사회복음을 부르짖으면서 진보적 운동을 전개했다. 더욱이 초교파 성격을 가지면서 신학의 정체성에 상관없이 수적이고 외적 연합에만 꿈을 꿨다. 이에 대해 정통신학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레샴 메이천(Gresham Machen, 1881~1937년)을 중심으로 1929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세우므로 개혁신학을 고수하였다.

흔들리는 개혁교회 그리고 한국교회

네덜란드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는데 19세기의 탈퇴파에 이어 1886년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년)를 중심한 돌레레파(Doleantie)의 분열이었다. 20세기 미국장로교회를 강타한 자유주의 신학과 진보적 성향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에도 일어난 것이다. 카이퍼를 중심한 돌레레파는 ‘신칼빈주의’(New Calvinism)라는 이름으로 현재 알려져 있다.

▲ 라은성 교수
(총신대)

20~21세기 미국교회는 초교파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일어난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와 같은 3물결로 인해 온 세상의 교회는 신비주의, 즉 신사도운동이라는 쓰나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 영향을 오늘 한국교회도 그대로 받고 있다. 신사도운동이라는 괴물에게 홀려 신앙이 무엇이며 신념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지내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 주소를 깨달아야 한다.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에 입각한 신앙을 회복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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