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500주년 특별기획]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③들불처럼 번지는 교회개혁(하)

1523년 첫 순교자 이후 개혁신앙은 순교와 동행 … 녹스의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 새 지평 열어

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는 시기,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성례 문제로 얼굴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15가지 조항 중 14항에 합의를 하고 나머지 1조항에 대한 견해도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종교개혁에 공감했던 개혁자들이 이견을 극복하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이 간극은 이후 루터의 후계자들(루터파)과 츠빙글리의 후계자들(개혁파)의 반목을 넘어 박해 수준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개신교회의 분열을 지적하며 종교개혁을 교회를 분열한 행위로 비판하고 있다. 지금도 교회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개혁교회는 정말 태생부터 분열의 씨앗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왜 이런 상황이 닥쳤을까.

화합하기 원했지만 출발이 다른

“칼빈은 누구보다 개혁자와 교회들이 신앙의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루터와 츠빙글리를 화합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함께 하다가 분열한 것이 아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독일의 종교개혁과 츠빙글리의 프랑스 종교개혁은 출발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총신대 라은성 교수는 1517년 이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을 한 줄기로 보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성례론과 세속권력에 대한 신학의 차이만큼, 독일 루터파와 프랑스에서 일어나 스위스와 영국 및 스코틀랜드로 퍼져나간 개혁파는 시작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라 교수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는 루터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출발이 다르다면, 개혁교회의 시작은 분열의 역사가 아닌 화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불링거가 돌이킬 수 없는 반목을 하며 서로를 비난할 때, 칼빈과 부써는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칼빈은 같은 개혁파인 불링거에게 루터를 변호하고, 직접 루터를 만나 대화하려 했다. 루터 역시 칼빈에 대해서만은 높이 평가했다.

루터와 칼빈이 직접 만나 대화하고 협력했다면, 개신교회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수를 5대 솔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개혁파인 칼빈이 루터의 오직성경, 오직믿음, 오직은혜를 받아들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더해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멜랑히톤과 칼빈의 합의로 종교개혁의 5대 정신이 만들어진 것이다. 개혁파의 슬로건은 ‘Post tennebras Lux’ 즉 어둠 이후에 빛이다.”(라은성 교수)

개혁교회는 순교의 역사

칼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혁파와 루터파는 화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했지만, 교회개혁의 중요한 불길로 지금껏 타오르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확산되기 시작하던 1523년, 프랑스는 최초의 순교자가 나오면서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시작했다. 프랑스 ‘위그노’의 출현이었다. 칼빈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스위스로 피신했지만, 위그노들은 종교전쟁과 유명한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사건’을 거치며 수천 명이 순교를 했다. 1598년 낭트칙령, 1629년 알레스평화조약 등으로 잠깐의 평화와 종교자유를 맛 보았지만, 1685년 루이14세의 낭트칙령 철회로 위그노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와 신대륙 아메리카로 피난을 떠났다.

“얼마나 많은 위그노들이 순교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위해 순교를 했는지. 하지만 위그노들은 네덜란드로 피난을 가서 교회의 모임을 시작했다. 1571년 개혁교회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 시기 작성한 벨직고백서 역시 순교 속에서 만들어졌다. 개혁신앙은 네덜란드와 함께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리게 된다. 녹스 이후 스코틀랜드의 교회 역시 순교로 점철됐다. 개혁교회는 순교와 동행했다.”(라은성 교수)

녹스의 힘 ‘하나님 절대주권’

프랑스 위그노들는 루터가 아닌 칼빈의 개혁사상을 따랐다. 위그노와 함께 칼빈의 영향을 그대로 흡수한 인물이 녹스이다.

녹스는 1545년 위샤르트를 만나고 성안드류스에서 목회를 하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즉위로 1554년 유럽으로 망명했고, 칼빈을 만났다. 이때 녹스는 칼빈의 제네바시 개혁과 제네바의 교육체계, 정치체제로서 장로교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다시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피의 메리 여왕’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여느 종교개혁자들과 달리 개혁신학을 교회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의 모든 부분으로 확대시켰다. 그 결과 1561년 12월 녹스는 스코틀랜드 전체를 개혁하고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하며, 세계 장로교회를 태동시켰다.

“녹스는 이전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주권 개념을 교리적 차원에서 이해한 것을 뛰어넘었다. 메리 여왕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면서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의식을 확립했다. 녹스는 칼빈에게 배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으로 민주적 장로회를 도입했고, 개혁교회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총신대 서요한 교수)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서창원 목사(사진)는 녹스를 칼빈에 버금가는 종교개혁자로 평가한다. 녹스는 가톨릭 신부였다가 휘스하르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후, 칼빈에게서 개혁신학을 배운 인물이 아닌가. 장로교를 태동시켰다고 해도 과한 평가가 아닌가.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녹스만이 유일하게 한 나라 전체를 개혁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다른 개혁가들은 로마가톨릭의 가지치기를 했다면, 녹스는 로마가톨릭의 뿌리를 내리친 개혁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새 시대의 지평을 눈부시게 열어 놓은 사람이었다.”

서창원 목사는 녹스의 활동과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남긴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아 있는 설교 전문도 1편 뿐이고, 전집도 고작 6권으로 편찬됐다.

“녹스는 자신이 책을 쓰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당시 로마가톨릭의 교권과 왕권의 강압에 맞서 담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선포했다. 그는 행동하는 개혁가였으며, 쉬지 않고 순회사역을 감당했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설교를 했다.”

행동하는 개혁가였기에 녹스는 저서를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한 나라를 개혁시켰고 전 세계에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 예수의 공교회성을 번식시킨 공로가 칼빈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서창원 목사는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 예수의 공교회성’을 매우 강조했다.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가 녹스가 죽음을 무릅쓰고 세운 장로교회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학자는 ‘스코틀랜드 교회는 제네바식 교회개혁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개혁의 근간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녹스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그 말씀에서 개혁에 필요한 모든 교훈을 끄집어 냈다. 녹스가 1560년에 작성한 <스코츠신앙고백서>와 <제1치리서>에서 그의 개혁 정신과 장로회주의 정신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교회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고 있는가. 목사 개인의 왕국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결국 녹스는 성경을 최고 권위로 내세우고, 교육과 예배와 직제와 치리 등 교회의 모든 것을 새롭게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운 교회를 통해서 스코틀랜드 국가를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
“녹스의 설교 한 편은 500명의 나팔수가 동시에 나팔을 불어서 잠을 깨우는 것보다 더 많은 영혼들을 사망의 잠에서 깨웠다고 했다. 그에게 ‘진리의 나팔수’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오늘 이 땅에도 녹스와 같은 진리의 나팔소리가 휘몰아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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