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섭 목사(대구동막교회)

갈등은 변화하라는 하나님 경고신호
남을 고치려 하기 보다 이해하며 나를 먼저 고치려고 해야

▲ 송기섭 목사(대구동막교회)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40~41)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남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 때문에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때부터 갈등을 겪습니다. 일찍 일어날 것인가? 좀 더 잘 것인가? 밥을 많이 먹어야 할까? 조금 먹어야 할까? 어느 옷을 입어야 할까? 차를 타고 달릴 때에 노란불일 때 지나갈까 멈출까? 직장인들의 경우는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등 소소한 고민과 갈등 속에 일상을 보냅니다.

범주를 넓혀 봅시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헤어질 것인가? 계속 살 것인가? 교회 계속 나와야 할 것인가? 아닌가? 등, 우리는 늘 갈등구조 속에서 무엇인가 결단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 훌륭한 목회자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사울이 바울이 되도록 최일선에 섰던 자입니다. 특히 위로의 은사, 격려의 은사를 가진 자로 가장 남을 세워줄 줄 아는 자 아닙니까? 그리고 또 바울은 누구입니까? 설명이 필요없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많은 은사를 체험했던 신약시대 가장 위대한 주의 일꾼입니다.

그런데도 바나바와 바울이 갈등하게 됩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마가 때문입니다. 37~38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했던 1차 전도여행 때 마가도 같이 갔는데 전도여행 중에 도중에 하차하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출발을 앞두고 바나바는 마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라는 쪽이고, 바울은 이미 신뢰를 잃은 자인데 또 다시 전도여행 중에 돌아가면 전체 전도여행에 힘드니 아예 처음부터 데리고 가지 말자는 주장을 폅니다. 서로 간에 협상과 양보가 되지 않고 팽팽하자 결국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39~40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누구보다 친했고, 스승과 제자보다 더 친숙한 사이였던 바나바와 바울은 결국 서로 심히 다투어서 피차 갈라서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간의 중심점이 충돌하는 것을 우리는 ‘갈등’이라고 부릅니다. 갈등은 한자어에서 칡을 의미하는 ‘갈(葛)’자와 등나무를 의미하는 ‘등(藤)’자가 만나서 된 단어입니다. 칡처럼 얽히고 등나무처럼 설킨 매우 복잡한 양상을 두고 갈등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같으면 마가를 데라고 가겠습니까? 떼 놓고 가겠습니까?

갈등하는 이유

첫째, 생각의 중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갈등을 겪고 있는 두 사람 중에 바울은 일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고, 바나바는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일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일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여행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서,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마가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일의 과정, 즉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바나바는 일의 결과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다시 한 번 마가에게 기회를 주어서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옳다, 그르다’에 따라 판단해 삭막한 경향이 있지만, 일은 잘 해냅니다. 반면에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좋다, 싫다’에 따라 판단하므로, 인정과 사랑이 많지만, 일의 결과가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등산을 하더라도 일 중심은 정상까지 가야 등산한 맛이 나고, 사람 중심은 가다가 즐거우면 아무데라도 앉아서 놀면 됩니다. 이처럼 생각의 중심이 다르면 갈등이 생깁니다.

둘째, 각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서 본 것과 다른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다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몰아보십시오. 좁은 도로에서 길가는 사람이 길을 비키지 않으면 성질 급한 사람은 경적을 울립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길을 걸어가는데, 뒤에서 차가 빵빵거리면 ‘좀 기다리지, 왜 이렇게 짜증나게 만드냐’고 오히려 불평합니다. 이처럼 입장 바꿔 생각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깁니다. 이심전심해야 합니다.

갈등을 유익으로 만들려면

갈등은 하나님께서 남이 아닌 내가 변화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신호입니다. 마치 축구하다가 노란색 카드를 받으면 퇴장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경고신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올 때 남을 고치려고 하기 보다는 나를 고치려고 해야 합니다. 갈등 상황이 생기면 늘 상대방이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습니다. 동생집은 가난했고 7명의 식구가 살았지만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형의 집은 부자고, 세 명만 살았지만 날마다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형이 동생을 찾아와서 비결을 물었을 때 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네 집에는 똑똑한 사람만 있고 우리 집에는 모두 바보들만 살기 때문입니다.”

형이 어리둥절해 그 말뜻을 묻자 동생이 대답합니다. “형님,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내 잘못이라고 하는 바람에 싸울 일이 없는데, 형님집에서는 일이 생기면 서로 네 잘못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형이 어리둥절해 그 말뜻을 묻자 동생이 대답합니다. “형님,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모두가 내 잘못이라고 하는 바람에 싸울 일이 없는데, 형님집에서는 일이 생기면 서로 네 잘못이라고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런 갈등 이후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심령의 변화를 알 수 없지만, 그의 유언이라고 하는 디모데후서는 여러 면에서 변화된 바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사람중심의 생각을 고쳐갑니다. 성숙해져 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도여행 때에 거절했던 마가를 이제는 데리고 오라고 했고, 그가 자신의 일에 유익하다고 칭찬하고 세워줍니다. 일 중심의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전의 생각에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를 변화시켰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자주 대화해야 합니다. 자주 대화해서 서로를 이해해야 합니다. 남을 이해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2+2=4(이해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되고, 5-3=2(아무리 오해되는 일도 뒤로(마이너스) 물러서서 3번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성경을 보면 바울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에게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마와 그 외 이름을 밝히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지금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며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순히 나를 버렸다고만 말합니다. 갈 길이 달랐다는 표현입니다. 자기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용인해 줄만큼 관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갈등이라는 걸림돌을 성숙의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성숙해집니다. 부쩍 키가 커든지 말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아픈 만큼, 갈등을 겪는 만큼 또 성숙합니다. 사람은 갈등을 겪지 않으면 성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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