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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자유주의 도전 맞서 정통 보수신학 사수[총회역사관 개관 기념 역사기획] 다시 읽는 총회 백년사 (4) 총회의 신학적 도전과 시련(하)
  • 김효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 승인 2017.05.18 09:18
  • 호수 2105

하나님 주권과 성경 권위 훼손에 강력 대응 
민족 저항운동 인도, 위대한 신앙의 힘 보여

▲ 김효시 교수(광신대학교)

정통보수 신학의 정립

1922년 새로 통과된 장로교회 헌법에는 1907년의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기조로 교회행정, 권징조례, 예배모범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헌법에는 한국에 파송되어 복음의 전달자로 수고하였던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이 깊게 스며들어 있다.

선교에 있어서도 곽안련(Charles A. Clark) 선교사가 언급했던 것처럼, 초기 선교사들이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었기에,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가장 큰 역점을 둔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채택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칼빈주의자 워필드(B. B. Warfield)의 개혁주의 성경관을 바탕으로 성경의 절대 무오설에 입각하여 신학적 자유주의나 성경 비판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통보수신학의 핵심이었다.

▲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는데 3·1운동의 전체적 역량의 20% 이상이 당시 한국 인구의 1.3%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에 해서 추진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교회에도 자유주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교회와 선교사들이 핍박을 받고 추방당하던 때와 맞물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역사적 비평주의를 수용하여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며 보수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일본이나 캐나다에서 수학한 자들이었다.

서고도(William Scott) 캐나다 선교사는 성경에 다수의 역사적 오류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고, 조희염 김관식 등은 성경에 문학적,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영주는 창세기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였고, 김춘배는 여권문제를 거론하면서 바울의 가르침 가운데는 구시대적인 내용이 있다고 반박하였다.

1935년 유형기는 단권주석인 <아빙돈 주석>(The Abingdon Commentary)을 출간하였는데, 채필근 송창근 등이 번역에 참여하였다. 박형룡은 이 주석에 대하여 “모든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집대성이라 할만하다. 성경을 고등비평의 원리로 해석하였고 계시의 역사를 종교진화론의 선입견을 가지고 고찰하였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김재준은 서구 기독교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신적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평양장로회 신학교 교수들을 향해서는 ‘극단의 보수주의자들’, ‘완고한 근본주의자들’, ‘기계적 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공격하였다. 특히, 그는 정통보수주의 신학의 핵심인 성경의 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강하게 반박하면서 “구원의 진리로서는 성경의 내용에 오류가 없으나 자연과학적, 역사적으로 접근하면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 부활과 재림, 심판 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사상 외에도 신·구약의 연속성을 간과하는 세대주의,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무시하고 일반은총에 대하여 몰이해적인 반지성주의, 신비주의 운동 등의 물결이 이 시대에 몰려오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결국 평양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되고,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망명하거나 투옥되어 교회에 위기가 닥쳐왔지만, 1940년 친일본 인사들에 의해 조선신학교가 서울에서 설립되면서 자유주의의 도전은 거세져만 갔다.

▲ 창세기 저작 문제와 김춘배 목사 성경해석문제 연구위원보고서(출처:총신대학교 백년사 화보)는 1935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렸던 제24회 총회에 보고된 창세기 저작 문제와 여권 문제에 대한 보고서의 초안이다. 보고자는 나부열로 되어 있으나 글씨체는 박형룡의 친필이다. 그 당시 김영주 목사는 만국주일공과(장년부)에 쓴 글에서 창세기 모세 저작을 부인하였고, 김춘배 목사는 기독신보에 ‘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라는 글에서 여권문제를 언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연구보고서는 이러한 견해들이 “장로회 신조에 위반되며 우리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라고 보고하였다.

보수주의의 응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력은 1930년대에 그 정점에 달하였다. 비록 그 세력이 소수에 불과했으나 교회와 신학교를 장악하고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정통보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지도적 인사로 부각된 김재준이었다. 그는 학식이 풍부한 자유주의 신학자로 이름난 채필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사상 간의 갈등과 충돌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 초반이었다. 자유주의의 도발은 보수주의 진영에 적지 않은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 자유주의의 도전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예비한 인물은 박형룡 박사와 길선주 목사 같은 인물들이었다.

1931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 정교수가 된 박형룡은 자유주의의 도전에 맞선 최전방에 서서 정통보수 신학을 지키는 전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초기 50년 동안 정통보수신학을 고수하였지만, 스며드는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를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현실 앞에 분연히 맞서 칼빈주의 정통 보수신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사력을 다해 투쟁하였다.

1930년 1월에는 <신학지남>에 ‘종교의 권위·성경영감설, 성경무오설’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기독교의 절대권위는 성경에 근거하며, 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절대 무오함을 천명하였다. 그는 이러한 성경관에 입각하여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고등비평설 등을 비판하면서 정통보수 신학을 지켜내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칼빈주의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였다.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사상은 칼빈주의 교리의 근간을 이룬다. 그에게 정통신학의 의미는 ‘성경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책이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교훈이 성령의 감화 아래 일점의 오류도 없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다.

▲ 장로교 희년 총회의 모습. 장로회 제1회 총회가 1912년 조직되고 매년 성장을 거듭했던 장로교회는 1934년 한국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맞이한다. 이때 전국에서 모인 120여 명의 총대들이 1934년 9월 7일부터 14일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3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가 바로 희년 총회였다.

한국 교회의 수난

일제의 무력강점과 주권침탈은 우리 국민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1910년 불법 강제병합은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제국의 최대의 수치였다. 그러기에 1919년 3·1독립운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한민족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거족적 저항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교회는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여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는 16명이었다.

교회의 저항은 일제의 야욕에 가장 큰 방해였다. 일제의 잔혹함에 선교사들도 분노하고 강하게 항의하였으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강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세워 운영하는 기독교학교와 교회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학교가 폐쇄를 당하거나 자진 폐교하였고,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검거되고 투옥되었다.

특히 1930년대 초부터 신사참배 문제가 기독교학교와 교회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일제는 갖가지 회유로 신사참배를 압박했으나, 신사참배가 단순한 국가의식이 아니며 종교행위임을 간파한 지도자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1938년 2월 8일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을 필두로,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이에 굴복하였다. 급기야 1938년 9월 9일 개최된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전격 결의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치욕의 역사는 친일적 배교무리들의 선동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배교의 행위는 일본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일본 불교식 세례인 ‘미소기바라이’를 행하는 것으로까지 치달았다. 예배의 일본화 현상은 국기에 대한 배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으로 이어져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일제 어용 교인과 친일 교단들이 만들어지면서 교회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채필근 신학교’로 알려진 어용 신학교의 개설, 장로교회의 일본화를 도모하는 어용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각 교단의 통합을 위해 조직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등 친일배교의 흔적을 남긴 오욕의 역사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서야 멈춰 섰다.

하지만 그 치욕의 역사 속에서도 신사불참배운동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몇 가지 사례만 소개해 보자. 김선두 목사는 윤필성, 박형룡 박사와 함께 도일하여 일본정부 요인들을 만나 신사불참배운동을 전개하였고, 의사이며 평신도 지도자였던 박관준도 도일하여 항의하였다.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는 7년의 옥중 고통을 겪다가 1941년 1월 21일 순교하였다. 이기선 목사는 북부지방에서, 한상동 목사는 남부지방에서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한국교회의 저력과 신앙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고, 순교의 거룩한 족적을 남기기에 충분하였다.

[이 시대의 키워드] 박형룡 박사

한국 보수신학계의 대들보

▲ 박형룡 박사

박형룡 박사(1897~1978)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분이며, 한국교회의 가장 충성스러운 교사였다. 한국 정통칼빈주의 보수신학의 토대를 놓은 위대한 신학자로서 그의 대표적 저술로는 조직신학 전집(7권)과 <근대신학 난제서평> 등이 있다. 그는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석사(1926), 루이스빌 남침례신학교에서 철학박사(1933) 학위를 받았다. 1928년 4월 평양신학교 임시 교수를 거쳐 1931년 4월 정교수가 되었고, 그 후 50년간 한국 보수신학계의 대들보 역할을 감당하였다.

김효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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