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500주년 특별기획]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①잊혀진 진리는 어떻게 드러났는가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수많은 개혁자들의 진리 위한 순교는 지금까지 들불되어 퍼져나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은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제도와 시스템으로 혜택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을 도와줄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가 가져다줄 혜택에 대한 모호한 그림밖에 없다. 강력한 적과 미온적인 동지, 이것이 개혁을 성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개혁의 어려움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도 사회의 제도를 바꾸고 교회의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한다. 1517년 10월 31일 일어난 종교개혁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사에서 유래없는 ‘개혁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중세기 끝에 여명을 띄우고 솟아나 모든 것을 비추는 태양”(헤겔)이라고 표현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개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 얀 후스는 로마가톨릭에 반하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는 1415년 7월 6일 화형대 위에서 “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저술하고 가르치고 설교했다. 오늘 난 기꺼이 죽을 것이다”라며 순교했다. 그리고 후스가 죽기 전에 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신들은 이 거위(후스)를 요리할 수 있지만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조 한 마리가 일어나 결국 승리할 것이다.” 102년 후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600년이 지났지만 후스는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서 종교개혁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진리를 감춘 거대한 세계

한국교회는 500년 전 일어난 ‘종교개혁’을 ‘교회(신앙)의 개혁’으로 한정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의 왜곡된 진리와 믿음 속에서 부패한 교황과 교회를 개혁”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교회의 개혁’으로만 이해할 때, 우리는 큰 틀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바라볼 수 없다.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은 단순히 종교기관으로서 ‘교회’가 아니었다. 로마가톨릭은 서구 유럽에서 실제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국제정치 기구였고, 사람들에게 정신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사상의 원천이었며, 사회 문화와 삶의 기준을 규정했던 막강한 곳이었다. 이처럼 유럽의 세계와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가톨릭이 루터의 <95개조 논제>로 한번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200년 전부터 진리를 향한 저항과 사상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었다.

진리를 향한 저항과 사상의 전환

잘 아는 것처럼, 진리를 향한 본격적인 저항은 14세기 영국의 위클리프(1330~1384)와 프라하의 얀 후스(1369~1415)을 빼놓을 수 없다. 위클리프는 어떤 면에서 <95개조 반박문>을 쓸 당시의 루터보다 더 로마가톨릭의 잘못을 꿰뚫고 있었다. 영국의 부패한 가톨릭 성직자와 교황을 비판했고, 영국 전체 토지의 1/3 이나 소유한 교회가 세금을 내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며 “성직자의 땅을 몰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로마가톨릭의 전통이나 교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겼다. 이런 생각에 바탕을 두고 부족하지만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영어로 번역해서 배포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후스에게 이어졌다. 후스 역시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고, 성자의 옷조각이나 머리카락 등 유물을 만지고 헌금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교리를 비판했다. 후스도 로마가톨릭이나 교황 또는 교회의 전통이 권위를 가질 수 없고 ‘오직 성경’만이 영적 권위의 토대라고 강조했다.(어윈 루처 <종교개혁 이야기>)

위클리프와 후스, 두 개혁자는 모두 로마가톨릭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로마가톨릭의 붕괴를 목도하지 못했지만, 진리를 향한 저항은 102년 만에 꽃을 피우게 된다.

진리를 향한 저항과 함께 역사학자들은 인문주의와 구텐베르트의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확산시킨 중요한 요건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는 사상의 전환이었다. 에라스무스를 비롯해 당대 인문주의자들은 대부분 로마가톨릭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문예부흥훈동’은 과거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유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교회 개혁을 요청한 인문주의자들은 생각했다. “문예부흥처럼 교회도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시대의 생명력과 소박함을 되찾으면 되지 않는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원천을 성경이라고 확신했다.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의 신학과 성경해석이 아닌 성경의 말씀그 자체로 돌아가길 원했다. 에라스무스는 희랍어 성경을 출간해서 가톨릭교회가 ‘참회(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말씀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고쳤다.(앨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이제 사람들은 로마가톨릭의 부패척결만 외치지 않았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 중에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새로운 그리스도인 그리고 영적 개혁

“루터 자신은 결코 개혁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란 세계사적 변혁을 가져오고 말았다. 개혁의 때는 성숙했고 교회개혁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역사의 물줄기는 로마가톨릭의 영적 도덕적 부패와 타락, 인문주의의 발흥, 중세 도시국가 중심에서 국가주의의 대두 등 복합적이었다. 종교개혁은 이루어져야만 했다.”(고신대 이상규 교수)

루터는 <95개조 논제>로 1519년 로마가톨릭 신학자 요하네스 엑크와 ‘라이프치히 토론’을 벌인 후, 이제 자신이 원치 않았지만 하나님이 강권하신 그 길에 들어섰다. 1520년 루터는 중요한 세 개의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독일 민족의 귀족들에게>를 통해서 로마가톨릭이 성직자와 평신도 계급으로 구분한 것을 비판했고, 평신도들이 성경해석의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교회의 바벨론 유수 서곡>은 로마가톨릭의 미사와 화체설을 근간으로 하는 성찬을 비판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를 통해 인간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로워지며 오직 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기초라고 선언했다. 오직성경, 오직믿음, 오직은혜 그리고 만인제사장의 기초가 세워지는 순간이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출현했다.
이상규 교수는 “종교개혁의 첫째 구호는 오직성경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로마가톨릭의 부패 원인을 성경에 대한 무지로 파악하고, 성경의 절대 우위성을 주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직믿음 오직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는 원칙을 세웠고, ‘만인사제직’으로 오직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립했다고 강조했다.

이상규 교수는 하지만 종교개혁을 신학과 교리적 관점에서만 이해하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부흥 없는 개혁은 공허한 것이며, 신학적 개혁 없는 부흥은 맹목적이다. 진리에 대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재검토 없이, 진리에 복종할 각오 없이 영적 부흥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영적부흥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교회 개혁

중세시대 1000년 동안 진리는 의도적으로 왜곡됐고 잊혀졌다. 그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1517년 이전부터 수백년 동안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위클리프와 후스 외에도 수많은 개혁자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발견한 진리를 거부할 수 없어서 순교를 했다. 루터 이후에도 진리를 위한 순교는 이어졌다. 교회 개혁, 영적 부흥은 이제 들불이 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성경과 명료한 이성이 나를 정죄하지 않은 한-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뿐이다. 나는 어떤 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 않겠다. 양심에 어긋나는 길로 행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 서 있는 나는 달리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1521년 보름스의회에서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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