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둘째 날 저녁집회 설교-송태근 목사

‘이사야가 본 세 가지 비전’(사 6:1~8)

▲ 송태근 목사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당시 유다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 때가 웃시야왕이 죽은 해라고 기록합니다. 웃시야왕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유다는 군사 경제 문화 농경에 이르기까지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으므로 그는 매우 강한 왕이 됐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언제나 부패합니다. 웃시야왕은 힘이 세어지니까 교만해져서 악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성전에 분향을 하는 일을 했고, 이 행동을 말리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결국 그는 나병이 생겨서 왕궁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별궁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웃시야왕이 권력에 취해 무너지고 유다는 극심한 혼란과 어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절대권력의 몰락 속에서 유다는 혼란과 절망에 빠졌고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은 성전에 앉아 있는 이사야를 조명합니다. 이사야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희망을 잃고 낙담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조국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우리들처럼 이사야도 ‘하나님 이 조국을 어떻게 합니까’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절망과 낙담에 빠진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이상을 세 가지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첫번째 이상은 ‘주께서 높이 드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좌는 3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경영(통치)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옷자락을 하늘에서 이 땅의 성전까지 늘여뜨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은 절망을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다 백성처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절망에 빠져있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신학자들이 3가지로 분석을 했습니다. 첫째는 교회 안의 신앙이 세상에서 능력으로 발휘하지 못하는 이원론적인 신앙생활, 둘째는 세속적인 부와 영화를 향한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감추고 있는 기복신앙입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직분론의 타락입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성직매매를 한국교회가 다시 답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성도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현실이 되게 하십시다.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성전에 가득했던 그 하나님의 옷자락을 매일 현실에서 만나는 꿈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본 두번째 이상은 보좌를 모신 스랍들이 얼굴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치는 이상을 봅니다. 그 소리로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해졌습니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드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이사야가 보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세 시대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 이사야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제 내가 망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본 두번째 비전입니다. 망하는 게 무슨 비전입니까. 모든 시대의 새로움과 비전은 철저하게 자신을 십자가 앞에 부정하는 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따르기 전에 고백한 것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아서 수많은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을 위한 본질적인 싸움은 우리 각자가 십자가 앞에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는 부정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그 입술의 죄를 핀 숯으로 사해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봉사나 선한 행위로 사해질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온전케 되는 것은 예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 떠난 아들이 온전케 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십자가의 가치와 예수그리스께 돌아가는 것 외에 온전해 질 방법이 없습니다. 그 길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7~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이 절망의 시대에 누가 갈까라는 부름에 나는 보내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밤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 원합니다. 이 소명을 깨닫고 다시 한번 보냄을 받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개혁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진짝 개혁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개혁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9장 10절에서 개혁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개혁의 의미는 사람을 바꾸고 문화를 고치는 것이 아니리고, 오직 예수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남는 것이 진짜 개혁입니다.

오늘 목사장로기도회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이사야가 절망 속에 보았던 3가지 비전, 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내 안으로는 죄악을 보고, 밖으로는 고통받는 대한민국과 헤매는 영혼을 위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