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목사의 사진에세이 ‘다시, 개혁으로’ (8)운명의 장난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사진❶ 마치 저 새가 지금 자신이 사진 찍히는 것도 모른 채 날아가듯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시청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극적인 장면들이 많이 연출됩니다. 가령 ‘서로 만나야만 하는 두 사람이 지나가는 차로 인해서 만나지 못하는 장면’, ‘잡히면 죽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장면’ 등 흔히 말하는 ‘운명의 장난’을 많이 보게 됩니다.

시청자들에게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흔히 말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의 상황과 감정을 다 알고 있으니, 마음 졸이고 안타깝고 때로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화면 속에서 배역에 따라 움직이는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지만, 화면 밖 시청자 입장에서는 알면서도, 아니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조마조마하며 보게 되는 것이죠.

사실 우리도 이러한 극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모를 뿐이죠. 우리는 모르지만, 모든 만남이 극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거나 못 만나게 되는 상황인 것이고, 수많은 사고와 위험 가운데에서 나도 모르는 무언가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작가 혹은 연출가’가 아니기에, 그냥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마치 내가 촬영하는 새가 지금 자신이 사진 찍히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날아가듯 말입니다.

 

사진❷ 우리가 위험할 때, 우리 모르게 손을 쓰시며 돕는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작가, 연출가’는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나름대로 원인과 결과를 추측하며 살아가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심초사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위험할 때에는 우리도 모르게 손을 쓰시며 돕고 계시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것이 더 큰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의 ‘인생 해석 방법’인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칼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칼을 만들 때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요? ‘이 칼로 사람들이 서로 죽였으면 좋겠다. 이 칼로 인해서 아이들이 다쳤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칼이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칼로 인한 범죄가 일어나도, 칼로 인해서 아이들이 다쳐도, 우리는 칼을 만든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아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원망할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선한 의도를 가지고 창조하셨음을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모든 탓을 돌립니다. 잘못은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을 마음대로 남용하고 오용한 우리에게 있는데도 말입니다.

 

사진❸ 흑인 여인의 검은 피부와 잘 어울리는 의상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실 때는 아름다운 의도를 가지고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현실을 보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악함과 약함으로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는 현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으로 향한 손가락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지금까지 일하셨고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일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운명의 장난’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부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내가 생각한대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혹자는 ‘인생은 해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만약에 한국 교회와 우리 교단 지도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을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절망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낙심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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