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철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순수한 복음 열정이 한국장로교회 성장 원동력

초기 선교사, 근대적 세계관 형성에 큰 공헌 …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서 역사적 조직

한국인과 장로교회의 최초 접촉은 1870년대 만주에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던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황해도 의주 출신이었던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등을 만주에서 만나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들은 세례를 받으며 한국인 첫 장로교 신자가 되었다. 의주 청년들은 로스 및 매킨타이어와 함께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887년 한글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셩교젼셔〉이다.

▲ 신종철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더불어 황해도 송천(일명 소래)으로 옮겨가 전도에 힘썼고, 이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송천(소래)교회가 세워졌다. 서경조는 소래교회 성도 2명과 함께 1887년 1월에 상경하여, 서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해 가을 언더우드는 직접 소래로 가서 7명에게 세례를 줌으로 소래교회 입교인은 10명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장로교 소속의 일본인 목사 야스까와 도루와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낙스를 통해 세례를 받았고, 미국장로교 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로 있던 루미스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 한글로 성경번역을 시작하였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북장로교와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장로교 등 4개 장로교 선교부를 통하여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북장로교는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1884년 9월 알렌의 입국을 시작으로, 이듬해 언더우드가 입국했고 연이어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서울과 서북지방(평안도 및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1901년 이후에는 ‘호주장로교회’)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자매 데이비스양이 내한하여 경상남도를 선교구로 삼으면서 시작됐다. 호주장로교회는 1889년부터 1945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1980년대까지는 120여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부산·경남지방에서 선교, 교육, 의료, 사회봉사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주장로교회도 보수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특성을 지닌 정통주의 신학을 유지, 계승하는데 일조하였다.

▲ 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역사적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된다. 독노회가 조직될 때 당시의 교세는 목사 47명(선교사 포함), 장로 53명, 조사 131명, 예배처소 984처, 세례교인 1만 7890명, 원입인 2만 1482명, 교인총계 6만 9098명, 학교 402처, 학도 8611명, 연보신화 9만4022원이었다.

1892년 미국남장로교에서는 ‘7인의 개척선교사’로 불리는 전킨, 테이트, 레이놀즈, 마티 테이트, 린니 데이비스, 팻시 볼링, 메어리 레이번 등이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캐나다장로회는 1898년에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직접적인 동기는 독립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다 숨진 메켄지의 죽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리어슨 의사 부부와 푸트 목사부부, 멕레 목사 등이 한국에 파송됐다. 이들은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각 장로교파 선교사들은 새 선교지인 조선까지 와서 서로 경쟁하며 선교하는 것이 유익하지 못하며, 선교지 주민들에게도 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초기 선교사들은 전국을 구획하여 각자 나누어 선교한 결과, 지역마다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때 교회에서 발생하는 현안들을 치리할 정치적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예비적 치리기관으로서 공의회가 조직됐다.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1889년 ‘미국북장로교 미션 및 빅토리아 미션 연합공의회’를 발족했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다음 해에 호주장로교 데이비스 목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임을 갖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1892년 남장로교 선교부가 들어오고 이를 계기로 1893년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미션 공의회’를 발족했다. 이것은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완전히 성립되는 시기까지 전국 교회에 치리권을 가진 상회(上會)가 되었다. 당시 소회(小會)는 평남대리회와 경기충청대리회 둘뿐이었다.

이후 1898년 캐나다장로교선교회가 조직된 후, 1901년 9월 마침내 선교사 25인과 조선인 총대(장로 3인, 조사 6인)가 참여하여 독노회의 전신인 ‘조선야소교장로회공의회’가 조직되었다. 1901년에는 전라대리회 경상대리회가 조직되었고, 1902년 함경대리회, 1907년 평북대리회와 황해대리회가 연이어 조직되며 전국적인 교회 치리기관이 등장했다. 이같이 한국선교가 눈부신 진전을 하게 된 이유는 ‘교회 옆에 학교, 학교 옆에 병원’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회개척과 더불어 의료선교, 교육선교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한국 선교사들은 1890년에 중국 선교사인 네비우스 부처를 강사로 초청하여 2주간의 수양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소개 받은 삼자정책, 즉 자치 자립 자전으로 요약되는 소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토착민의 지도력이 중요시되는 네비우스 정책의 핵심은 ‘성경 중심의 선교정책’이었고, ‘사경회’가 근간을 이루었다. 사경회는 특히 영수, 조사, 권서, 전도부인 등과 같은 지도자를 발굴하는 자리가 됐다.

▲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당시에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였던 여자 교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오른쪽 중앙에 서있는 인물이 초대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마포삼열 선교사이다. 그는 1907년 평양대부흥회 당시에는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장로교회가 자립교회를 목표하고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문서선교와 사회선교에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이런 활동들은 미신타파나 신분제 파괴 등 근대적 세계관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국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호주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노회 설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는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기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들만으로 노회를 조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190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5년간의 과정을 모두 이수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 노회가 아직 없었는데, 장로교회 정치체제에 근간을 이루는 노회설립은 필연적이었다.

그 결과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역사적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이때 모였던 회원은 목사 33명(전원 선교사 회원), 장로 40명(조선인 장로회원)이었다. 회장은 선교사 마포삼열, 부회장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린서, 회계 선교사 이길함이었다. 이 때 제1회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7인(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이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특히 독노회는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할 것을 결의함으로, ‘선교중심’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의 자랑이요, 전통이 되었다.

▲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전도한 결과, 1883년 최초의 자생적 교회인 송천교회(소래교회)가 탄생된다. 사진은 소래교회 설립 당시의 모습. 이후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기와집으로 개축하는데, 외국인들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첫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교인들의 증가로 인해 예배당은 1895년에는 8칸으로, 나중에는 16칸으로 확장된다.

독노회는 전국에 세워진 교회를 효과적으로 치리하기 위하여, 산하에 7개 대리회를 두었는데 경기·충청대리회(50여 교회) 평북대리회(160여 교회) 평남대리회(90여 교회) 황해대리회(50여 교회) 함경대리회(80여 교회) 전라대리회(130여 교회) 경상대리회(190여 교회) 등이다. 아울러 독노회는 장로교회의 교리적 표준인 ‘12신조’를 채택했다. 이는 칼빈의 성경해석을 기초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내용을, 인도장로교회가 요약해 채택한 12신조의 서문만을 수정한 것이었다. 훗날 조직된 총회에서 세 차례(1921, 1930, 1933년) 용어의 표현상 변화만 가미해 오늘까지 사용하고 있다. 독노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으로 채택하였다.

▲ 1912년 9월 1일 독노회가 세워진지 5년 만에 평남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소집된다. 제1회 총회에 보고된 교세를 보면 목사 128명, 장로 225명, 강도사 6명, 조사 230명, 남전도인 46명, 여전도인 70인, 매서인 128명이고, 한 해 동안 세례 받은 사람은 8836명이나 됐다.

부흥운동으로 인해 조선장로교회 신도는 매년 증가했다. 1903년 원산에서 사경회로 인해 촉발된 부흥운동의 불길은 회개와 성령운동으로 특징되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거세게 번져나갔고, 백만인구령운동과 국채보상운동으로 타올랐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게 체험한 조선 신자들은 1919년 3·1운동에서도 정신적 주체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편 계속적인 교회 성장으로 인해 1911년 제5회 독노회에서는 7개 지방 대리회의 조직을 노회로 개편했다. 이렇게 해서평북노회, 평남노회, 황해노회, 함경노회, 경기충청노회, 전라노회, 경상노회가 조직됐다.

1912년 9월 1일 독노회가 세워진지 5년 만에 평남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소집됐다. 이 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국장로교회는 하나의 총회였다. 또한 총회는 설립기념으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를 선교사로 임명하여 1913년 9월에 중국 산둥성으로 파송했다. 이후로 총회에서 선교사들의 파송은 계속됐다. 실로 하나님께서 한국장로교회에 주신 비전이자, 놀라운 은혜였다.

▲ 1887년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었다.
장로교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였다. 1901년 마포삼열선교사는 자신의 사랑채에서 김종섭, 방기창 등 2명을 모집하여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어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4개의 장로교선교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학교 설립이 요청되어, 1904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총 5년간 진행됐는데, 매년 3개월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9개월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사역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9개월 동안 학생들은 복음을 전하고, 가사를 돕기도 했다. 한 마디로 실천적인 교육의 장이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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