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히에로니무스는 345년 달마티아, 오늘의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다. 일명 제롬으로 불리는 이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 아들이 다스리던 때에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루크레티우스 등 고대 석학들의 세계를 탐독 하면서 제롬은 헬라 철학과 로마의 수사학 및 법학에 깊은 조예를 갖게 된다. 제롬은 29세가 되던 어느 날 밤 꿈을 꾼다. “너는 키케로의 제자이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꾸짖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성경에 무지하였던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그때가 373년이었다.

제롬은 이 일 후 로마를 떠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곳이 안디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중병과 사투를 벌였지만 성경연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제롬은 자신의 거처를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헴으로 옮긴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골고다를 생각하기 위해 해골을 옆에다 두고 성경을 읽는다. 제롬은 이곳에서 유대인 랍비들에게 히브리 성경 본문을 입수하여 382년부터 신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 후 23년 동안 계속된 이 작업은 신구약 전문을 라틴어로 번역한 역본으로 세상에 태어나는데, 이것이 벌게이트(Vulgate) 역본이다. 그는 신구약 66권 외에 외경(Apocrypha)도 번역해 ‘교회의 책’으로 불렀다. 제롬의 이 라틴어 성경의 긍정적인 면은 서방 세계를 위해 통일된 성경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부정적인 면은 400년이 넘는 70인역의 전통을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제롬의 라틴어 성경은 유대주의의 흔적을 지닌 구약 본문을 비평 없이 수용함으로 70인역의 전통을 끊어버렸다.

동시대의 인물로 중세의 교사인 아우구스티누스는 70인역을 옹호했지만 제롬의 성경 번역을 상당히 반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제롬의 라틴어 성경은 중세 중반 이후 유럽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이런 제롬이 중세에 건네준 또 하나의 사상이 독신(Celibacy)이었다. 이런 제롬의 사상은 1093년 교황중의 교황이라는 힐데브란트, 즉 그레고리 7세의 법령으로 공포되면서 성직자 의무 독신제로 발전, 수많은 성직자의 족쇄가 된다. 420년 75세의 제롬은 베들레헴에서 영면하여 그곳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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