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직감한 마누엘 황제와 요한네스 2세는 서구 유럽 국가들을 순방하며 구걸 외교를 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우리가 망하면 언젠가 당신들의 나라도 이슬람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방교회들은 “당신들하고 우리는 신학과 교리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며 외면했다. 그러자 동로마의 황제가 다시 구걸했다. “신학과 교리는 조금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같은 예수를 믿고 신앙의 정체성이 같은데요. 그래도 이슬람보다는 우리가 낫지 않나요? 우리가 망하면 언젠가 당신들도 망해요. 그러니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구걸 외교를 해도 서방교회는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5월 29일 이슬람의 오스만투르크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 성벽 높이 바람에 펄럭이던 십자가기는 땅에 곤두박질 당하였고 이슬람을 상징하는 깃발이 십자가 대신 걸렸다.

당시 성 소피아교회를 비롯한 100여 개가 넘는 어마어마한 교회들, 그리고 A.D. 381년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했던 이레네교회까지 모두 이슬람 사원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동로마 제국의 땅 대부분을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다. 만일 서구 유럽의 왕들이 동로마를 도와주었더라면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할 수 없었을 것이며 동로마는 비참하게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은 종교개혁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문제는 이런 역사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신학적 퓨리티(purity)와 사역적 유니티(unity)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 2000년 역사는 퓨리티와 유니티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다 보니 내부에서 소모전을 하다가 파멸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우선 퓨리티를 주장하는 사람은 순혈적 신앙을 지키지만, 사역의 방법과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유니티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무조건 하나 됨만을 주장한다. 그러다가는 종교다원주의로 빠질 위험도 있다.

우리 총회는 WCC 문제로 신학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키려고 모든 걸 버리고 광야에 홀로 나와 교단을 시작했다. 그저 재산이라고는 신학적 순수성과 순혈주의적 신앙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 교단은 유니티보다는 퓨리티에 더 애착이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적 자세로 순수한 신학과 순혈적 퓨리티를 쌓아온 신앙의 선조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우리가 자칫 퓨리티만을 주장하다 보면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확증편향성 내지는 선택적 지각에 빠질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면 시대와 역사를 주도하는 창조적 시야를 갖지 못하고 계속 근시안적 호미질만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지금은 트렉터도 아닌 하늘을 나는 드론의 시대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호미질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좀 더 거시적인 드론적 사고를 해야 한다. 왜냐면 당시 메흐메드 2세가 진격해 온 것처럼, 사단은 지금 동성애와 이슬람, 차별금지법, 인권조례안 등을 통해서 전방위적으로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무너뜨리려고 전략적인 공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목회 생태계가 깨져 버리면 교회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영국교회와 미국교회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교단도 유니티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 개혁신학의 견지로 볼 때는 그들의 신학과 신앙이 다르고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이슬람보다는 낫고, 네오막시즘과 안티 크리스천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태계의 원리로 볼 때 그들의 교회와 교단이 무너지면 우리 교단도 무사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반기독교적인 정서에 대응하고 공격을 막아낼 때는 우리가 함께 유니티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문제 있는 신학과 신앙의 연합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신학적 전통과 신앙의 퓨리티를 지키되, 반기독교적인 정서에 대응하고 그 공격을 막아낼 때는 유니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적, 신앙적 연합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한 사역적, 방어적 연합을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퓨리티와, 한국교회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유니티를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의견을 모으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도 1차원적인 호미적 사고가 아닌, 4차원적인 드론적 사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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