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장애인직업훈련세터 사역 인정 받아

 [인터뷰] 김부식 선교사

▲ 김부식 선교사는 장애인직업학교 말고도 중국 곳곳에 음악학교와 한국문화원을 세웠다. 김 선교사는 총신대 음악과와 총신선교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미드웨스트대학교에서 문학석사, 선교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부식 선교사(GMS)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교사로서 약점이 두어 가지 있다. 우선 그는 평신도다. 요즘 들어 평신도 전문인선교사는 귀에 익은 말이지만, 그가 중국에 들어간 1992년에는 평신도가 선교사가 되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리고 그는 장애인이다. 어릴 적 병을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전다. 장애인 평신도 선교사. 그 이름만으로도 고단함이 느껴지는 삶을 그는 살아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고단한 인생에 놀랍게 역사하셨다.

1992년 중국 연길에 들어간 그는 그해 연변장애인직업기술훈련센터를 세웠다. 1996년에는 훈련센터 졸업생들을 모아 회사를 세우고 10개 장애인작업장을 마련했다. 2002년에는 운남성으로 건너가 소수민족장애인직업기술훈련센터를 세웠고, 같은 해 장애인 작업장과 회사를 세웠다. 장애인들에게 전기, 전자, 피아노 조율, 이·미용, 안마, 자동차 수리, 미싱, 오토바이 수리 등 십여 가지 다양한 기술들을 가르쳤다. 장애인들에게 가르친 기술들은 상당수가 김 선교사 자신이 손에 익은 일들이기도 했다.

“어릴 적 산골에서 살았는데, 다른 동네에 가면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곤 했어요. 서울에 와서 직장을 구할 때도, 장애인이라고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감사한 건 내가 쫓겨 다니면서 배운 기술들이 많아요. 그게 다 선교의 밑거름이 됐어요.”

장애인으로 살면서 받은 상처가 많았기에, 그는 중국에서 만난 장애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마음으로 장애인들을 품었고, 장애를 가졌지만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다고 훈련생들을 격려했다.

장애인직업훈련센터의 성과는 놀라웠다. 1년에 평균 100명 가량을 훈련시켰는데, 그 중 50% 이상이 취업에 성공했다. 공무원이 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세운 장애인직업훈련센터를 거쳐 간 장애인들이 1600여 명이나 되고, 그중에는 목회자가 된 제자들도 50∼60명에 이른다.

그의 사역은 중국 정부에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처음 장애인훈련센터를 세운 1992년에 중국에는 이렇다 할 장애인직업학교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이, 거기다 장애인이 장애인직업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중앙 정부와 각종 방송에서 앞 다투어 취재를 해가기도 했다.

그는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쳤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였다. 직업학교 훈련생들이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격려하고 도왔다. 한번은 그가 운영하던 직업학교로 공안이 찾아왔다. 몰래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하는 것을 다 안다며 증거물을 내밀었다.

“꼼짝없이 추방을 당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공안이 하는 말이 내가 장애인들을 돕는 일이 진심이 느껴진다면서, 오히려 정부에 추천해 상을 받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장애인으로 살게 하시고, 장애인 선교를 하게 하셨는지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는 그간 세운 직업학교를 현지인들에게 다 이양을 하고 최근 안식년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제2 사역을 준비하는 가운데 그는 서울신학교에 새로 생긴 전문인선교사학과 교수로 합류하게 됐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중국에서 추방을 안 당한 이유는 전문인선교사였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한국교회가 전문인선교사 파송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파송교회가 지원을 중단해 최근 7년 동안 한 달에 50만원 남짓으로 살았다. 친구와 친지들이 모아준 돈이었다. 어려운 환경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기대한다며 밝게 웃었다.

“저는 늘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아니라, 두 달란트 받은 자라 생각을 해요. 두 달란트를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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