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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역사관 개관 기념 역사기획] 다시 읽는 총회 백년사 (1) 장로교회 성경적 기원과 발전신종철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종교개혁으로 복원된 장로정치, 칼빈이 정착

모세 이후 공동체 이끄는 정치체제로 운영…스코틀랜드 장로교회 통해 역사적 뿌리내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들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우리 교단 역시 500주년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과 관련해 우리 총회에서 일어난 가장 귀한 사건은 바로 총회역사관을 개관한 일이다. 총회역사관 개관을 기념해 총회 100년을 돌아보는 기독신문 역사기획을 시작하며, 먼저 장로교회의 성경적 기원과 발전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성경에 뿌리를 둔 장로교회

▲ 신종철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

성경에 나타난 ‘교회’라는 단어는 ‘신자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신자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택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원은 성삼위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러면 장로교회의 근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장로’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약 100회, 신약에서 약 60회 정도 사용된다. 구약에 나오는 장로라는 용어들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46회가 모세오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구약에서 장로정치는 모세 이전부터 존재했지만(출 3:16), 모세 이후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끄는 정치체제가 되었음을 볼 수 있다(출 24:1).

신약에서는 장로라는 단어가 65회 나타난다. 특히 신약에서는 장로직과 연관하여 사도적 교회의 정치원리 6가지를 보여준다. 첫째는 교인들이 직분자를 선출한다(행 6:5,6; 14장). 둘째, 감독직과 장로직은 이름과 직무는 다르나 사실상 같은 직책이었다(딛 1:5~7; 행 20:28). 셋째, 각 교회마다 장로가 항상 복수였다(행 14:24; 20:17). 넷째, 장로회에서 장로를 안수하여 임직케 하였다(딤전 4:3). 다섯째, 교인들에게는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장로회(노회)에 상소할 권리가 있었고, 여기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행 15장), 여섯째,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이다(골 1:8). 이러한 원리는 현대 교회 여러 정치제도들 가운데 장로정치체제가 성경에 뿌리박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사도들은 분명히 장로정치제도를 초대교회의 모델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초대 교부들이었던 어거스틴, 제롬, 크리소스톰 등에 따르면 장로정치는 5세기 초반까지 널리 시행되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와 내부적인 이단의 출현으로 인해 장로정치체제에서 점차 감독정치체제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중세의 교회는 비성경적인 교황중심제로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에 이르러 교회 안에 ‘장로’라는 직제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라졌던 장로교회의 부활

▲ 제네바대학 앞 바스티용공원에 위치한 종교개혁 기념비이다. 왼쪽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이다. 칼빈의 모습이 약간 앞으로 돌출되어있는데,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이를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초대교회 이후 거의 사라진 것처럼 여겨졌던 장로정치가 성경적인 형태로 다시 복원된 계기는 ‘종교개혁’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오직 성경’이나 ‘만인제사장주의’ 사상은 성경에서 표현하는 장로교회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운동은 교회정치제도 입장에서는 미완성이었다. 루터의 교회정치제도는 로마교회와 장로교회의 중간형에 머물렀다.

16세기 개혁파교회들 중 장로정치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교회는 ‘보헤미안-모라비안 형제단’이었다. 이들은 1467년에 장로정치체제를 가톨릭의 교황감독제 대신 채택했으며, 목사들을 장로들이 감독한 것으로 나타난다.

개혁교회 장로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던 형제단들은 일찍이 루터를 만났고, 1540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를 방문하여 마르틴 부처와 존 칼빈을 만나 토론하였다. 이와 같은 접촉은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특히 교회의 정치제도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형제단과 더불어 부처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였다. 그는 사도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떤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를 조종하기 위해 임명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위원회를 조직했다.

1530년에 외콜람파디우스를 만난 부처는 ‘그의 주장은 바람직하며 치리(discipline)는 교회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역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는 외콜람파디우스가 만들었던 위원회와 유사한 ‘교회관리단’을 1532년에 조직했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을 ‘키르켄플래거’라 불렀는데 각 교구마다 3명의 모범된 평신도를 세워, 목사의 사역들을 돕는 사역자들이었다.

부처는 자신이 쓴 글과 자신이 목회한 교회를 통해 장로체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부처는 1550년에 왕 에드워드 4세에게 보내는 글에서 목사, 교사(박사), 장로, 집사를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한 부처는 이글에서 장로들 중에 지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장로를 감독으로 표현함으로써 소위 두 종류의 장로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장로제도의 틀 수립한 칼빈

이러한 배경에서 장로제도의 틀을 구체적으로 수립한 사람은 존 칼빈이었다. 칼빈은 1536년 제네바에서 파렐과 함께 종교개혁을 시작했으나, 그의 대적자들로 말미암아 1538년 스트라스부르크로 쫓겨갔다. 거기서 프랑스 피난민이 모인 교회를 맡아 3년간(1538~1541년) 사역한다.
이 시절에 <기독교강요> 개정판이 나왔으며, 1541년에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을 때 칼빈은 장로 직제와 같은 교회정치 체제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스트라스부르크 시절 부처와 카피토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칼빈이 1541년에 만든 <제네바교회의 교회 서식서>에는 부처가 시행했던 교회의 4가지 직분,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가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디모데전서를 인용하여 두 종류의 장로를 구별하여 언급하면서, 말씀의 사역과 영적인 직분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와 교회의 권세가 온전히 보장된 장로정치제도로 목회를 하였으며, 이를 더욱 확장 발전시켰다. 이때부터 장로교회가 본격적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성경에 근거한 칼빈의 가르침, 일명 ‘칼빈주의 사상’은 제네바를 통해서 폴란드, 네덜란드, 프랑스, 헝가리,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칼빈에 의해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아카데미’는 칼빈주의 사상의 요람지가 되었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특히 낙스는 제네바에 피난 왔던 영어권 개신교도들의 교회를 조직하여 목회를 했다. 이때 교회에는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직을 두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신대륙으로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왔고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낙스와 다른 5명의 동료들은 칼빈주의적 ‘스코츠신앙고백’을 만들었다. 1560년 8월 이 고백을 당시 의회가 받아들임으로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가 교회로 인정되었다. 동년 12월에는 존 낙스의 지도하에 스코틀랜드 최초의 장로교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전체 12명의 개신교 목사 중 6명의 목사와 36명의 치리장로들이 참석하였다.

당시 총회는 <치리서>(나중에 ‘제1치리서’로 명명됨)를 만드는데 열정을 다했고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법이 되었다. 이 치리서는 장로회 정치를 성경적 교회정치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당회 노회 대회 총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교회직분에 목사 장로 집사를 언급한다.

1572년 낙스가 죽고 난 후 ‘장로교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드류 멜빌(1545~1622)의 주도 하에 <제2치리서>가 작성되었다. 1578년 멜빌이 총회장 재임 시 이를 받아들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 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장로교회들, 미국의 장로교회들, 호주의 장로교회들, 캐나다의 장로교회들, 남아공의 장로교회들 등의 뿌리가 바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이다.

이 체제는 신대륙인 뉴잉글랜드로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 프랜시스 매케미 목사는 신대륙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 흩어진 수많은 청교도들과 장로교인들을 발견하고 1683~1684년에 스노우힐, 메릴랜드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그의 지도하에 최초의 미국장로교 노회, 즉 필라델피아노회가 1706년 12월 26일에 설립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메케미는 ‘미국장로교회의 아버지’로 불린다.

1716년 미국 최초의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고, 1729년 대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채택하였다. 미국장로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1789년에는 최초로 미국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남북전쟁을 계기로 1864년에는 ‘미국남장로교회’가, 1896년에는 ‘미국북장로교회’가 각각 출범한다. 바로 이 미국북장로교회 소속이었던 호레이스 알렌이 1884년 9월 20일 조선 땅에 상주하는 최초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키워드] 제네바아카데미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학교”

 
제네바아카데미는 1559년 존 칼빈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대 학장은 칼빈의 제자였던 테오도르 베자였다. 이 제네바아카데미를 가리켜서 존 낙스는 말하기를 “사도시대 이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학교”라고 했다.

유럽 각국의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要理)문답을 작성한 올레비아누스도 칼빈에게서 배운 제네바아카데미 출신이었다.

1648~1649년 화란에서 도르트총회가 열렸을 때 총회 의장은 유명한 신약학자 요한네스 보겔만이었는데 그도 역시 제네바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제네바아카데미를 통해 개혁신앙과 장로교 정치체제는 유럽으로 더욱더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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