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 목사(성실교회)

그래도 교회는 이 땅의 소망입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전해야

 

▲ 김영복 목사(성실교회)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2017년 부활절은 다른 때와 달리 특별한 감회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교단적으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고, 노회마다 개교회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들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은 최근 <2016 10대 이슈 및 사회의식 조사>라는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여기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개혁과제로 목회자와 성도들 모두가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는 복음의 본질 회복’을 최우선 과제 1순위로 꼽았습니다. 이어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윤리성 회복’을 다음순위로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40대 미만의 연령층에서는 ‘목회자들의 윤리성 회복’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가 시대의 흐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각종 지적도 ‘문제점을 빨리 해소하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사회 윤리나 법으로 해결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 교회, 교단이 품고 있는 문제를 부활신앙으로 청산하자는 것입니다.

‘무덤에 머물러’ ‘나의 죄를 씻기는’ ‘나 위하여 십자가의’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등 500여 찬송가와 가스펠송을 작사, 작곡한 로우리(Robert Lowry 1826~1899) 목사는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 남북전쟁 직후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신앙적이고 희망적인 찬송을 작사 작곡해 갈급한 심령들에게 새 희망을 주었습니다. 특히 부활절 관련 대표적인 찬송인 160장 ‘무덤에 머물러’는 누가복음 24장 6절 말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를 묵상하면서 영감을 얻어 작사,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소요리문답> 제45문에서 특이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라는 질문은 부활의 사실성을 묻기보다는 부활의 유익성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첫째,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로 죽음을 극복하시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의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도록 합니다(과거). 둘째, 이제 우리도 그의 능력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현재).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미래)”라고 합니다. 부활이 성도의 인생 전반에 걸쳐 큰 유익을 준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45문은 과거와 현재, 미래 즉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누리게 되는 신비롭고 거룩한 구원의 진리를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 사실이 역사상 실제임을 알게 하고, 그 진리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계시하심으로 예수와 함께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도록 합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누리게 되는 구원을 가장 압축하여 보여주고 또한 믿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된 것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존재입니다. 10절의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carrying in the body the death of Jesus, ESV)에서 ‘예수 죽인 것’은 11절의 ‘예수의 생명’과 대비됩니다.

‘항상 짊어짐’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 무시, 모욕, 멸시를 당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고 언제나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바울 일행이 환난과 고생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몸에’라고 말한 것은, 바울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복음에 헌신하는 장소(갈 6:14)이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평소 바울의 주장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롬 8:36)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자신의 경험 안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라는 고백은 앞의 의미를 다른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늘 삶 가운데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삶 가운데 늘 생각하며 깨닫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의 놀라우신 은혜가 그 삶 가운데 나타납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핍박과 끊임없는 죽음의 위험 속에 빠지도록 허용하시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협에서도 살아남아 복음 사역의 효과를 드러내고, 예수께서 종들을 보호하고 계심을 증거하도록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간증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8)

동시에 바울의 삶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탄식할 이유가 없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덧입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은 10절에 대한 확인과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복음에 충성함으로 그가 많은 고난과 환난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롬 6:23)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이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까요? 내 안의 옛 사람이 죽을 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내 감정과 자존심이 죽어야 합니다. 안일과 탐욕이 죽어야 합니다. 세상 명예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는 그 곳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일의 증인”(행 2:32)입니다. 사실 바울은 여러 번 “우리가…증인이로다”(행 2:32, 3:15, 5:32, 10:39)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적인 가치로 물들어 있는 원인이 있습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부활신앙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생명을 생명으로 유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과감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부활 안에 죄와 사망을 이기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확고히 다져서 영육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또한 부활신앙은 이 땅의 소망은 여전히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한국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진정한 개혁의 원동력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때 가능합니다. 또한 아직 우리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대해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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