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백년 미션스쿨, 여전히 찬란한 이름

▲ 영명고 하이파이브데이에 교직원들이 등교하는 신입생들에게 허브화분을 나누어주고 있다.

영생의 가치로 빛나는 기독 인재 키워간다

111년 전통의 대표적 기독사학 …
유관순 열사 등 배출, 애국애족 교육정신 계승 앞장

아침 등교시간 영명학당길을 따라 높은 언덕 위로 활기차게 올라오는 학생들의 귀에 예쁜 선율이 꽂힌다. 매일 아침 친구들의 등굣길을 맞이하는 한빛찬양단의 화음은 영명의 하루가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차임벨이다.

교정 한 가운데 우뚝 솟은 개교 백주년기념탑과 그 주변을 장식한 선교사, 역대 교장,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자취들은 매일 아침 그 앞을 지나는 후배들에게 커다란 긍지이자 학구열을 불태우는 동기가 되고 있다.

▲ 이기서 교장이 ‘박애 진실 면학’이라는 교훈이 새겨진 비석 앞에 선 모습.

공주영명고등학교(교장:이기서 장로)는 111년의 역사를 가진 충남지역의 대표적 기독교사학이다. 미국 북감리회 소속 프랭크 E. C. 윌리암스(한국명 우리암) 선교사가 1906년 개교한 이래 ‘박애 진실 면학’이라는 교훈으로 조병옥 유관순을 비롯한 수많은 남녀인재들을 길러냈다.

영명학교의 태동은 1904년 감리교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부임했던 로버트 아더 샤프 선교사가 1904년 현재의 공주기독교사회복지관 자리의 초가에서 명설학당을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데서 시작된다. 샤프 선교사의 아내 앨리스 샤프(한국명 사에리시)도 명선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여학생들을 가르치며, 부부가 함께 공주 땅에 신교육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샤프 선교사가 논산에서 선교사역을 펼치던 도중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자연히 학교운영도 멈추게 된다. 다행히도 후임자로 부임한 우리암 선교사가 닫혀있던 학교 문을 다시 열어 영명은 정식으로 개교하게 되었고, 이후 우리암은 35년간 영명학교 교장으로 공주에 머물며 사역한다.

사에리시 선교사도 남편 사후 190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명선학당을 영명여학교라는 새 이름으로 운영하기 시작한다. 이후 영명학교와 영명여학교는 마치 남매처럼 나란히 공존하다가 1932년 하나의 학교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공주영명고등학교 백년 역사를 상징하는 기념탑.

‘영원한 광명(eternal brightness)’라는 뜻을 가진 영명(永明)이라는 이름에는 성경이 말하는 ‘영생’의 가치와 세상의 빛이 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실제로 영명학교의 역사 속에는 기독교학교로서 그리고 민족학교로서 뚜벅뚜벅 걸어온 족적이 선명하다.

특히 식민치하 기미년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역대 교사 학생 졸업생들까지 나서서 거듭 봉기했던 반일항거의 역사는 유관순을 비롯한 수많은 겨레의 영웅들을 탄생시키며 영명의 기개를 한껏 드높였다.(상자기사 참조)

이 때문에 1940년 우리암 교장 일가가 추방되고, 뒤이어 영명학교 제1회 출신으로 교장직을 대리한 황인식 부부마저 피검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결국 1942년 제33회 졸업식을 마치고 영명학교는 일제의 강제 폐교로 7년간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학교가 문을 닫고 있던 시기에도 영명의 정신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들 이름을 ‘광복’이라 지을 만큼 한국인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우리암 교장은 추방된 후 인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근거지를 잡고 있던 광복군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꿈에 그리던 해방의 날이 찾아오자 영명학교 출신들의 활약이 시작됐다. 우리암 교장 부자와 황인석 이묘묵 동문 등은 미군정의 요직을 맡아 봉직했고, 훗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조병옥 동문은 경무국장과 대통령 특사로, 박종만 동문은 충남도지사와 문교부 차관 등으로 조국을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이들을 중심으로 영명학교의 복교가 추진되었고, 마침내 1949년 성사된다.

▲ 영명고등학교 교사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회를 열고 있다.

영명학교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는 감리교단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감리교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학교로서 영명의 존재는 교단 안에서 대단히 중요했고, 1964년 학교법인 감리교영명학원 인가로 그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학교의 역대 이사장을 감리교회 감독회장들이 이어 맡고, 졸업생들 중에 표용은 김기웅 이돈하 현상규 이기복 최승일 문성대 등 여러 감독들이 배출되면서 영명학교는 한국감리교회사에 빼놓을 수 없는 좌표를 차지하게 됐다.

1921년 미국 감리회에서 해외선교 100주년을 맞아 영명학교에 건립한 건물을, 2002년 철거하여 영명학당으로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초창기 학교 역사와 선교사역에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학교 역사관에 지금도 전시되고 있는 이 유물들은, 영명학교 뿐 아니라 감리교회 전체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료로 평가된다.

이처럼 뿌리 깊은 영명의 신앙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꿋꿋이 계승되고 있다. 매일 아침 교직원들은 성경통독과 기도회로 하루 일과에 돌입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학부모기도회에는 여러 학교구성원들과 지역교계 등에서 모여 학생들을 위해 간구하는 시간을 갖는다.

▲ 영명고 역사관의 중심을 차지한 유관순 열사 관련 전시물.

학생들 사이에서도 매일 등굣길 찬양 등으로 섬기는 한빛찬양단, 미술재능으로 매주 지역사회 벽화그리기 봉사를 펼치는 그린나래 등 다양한 동아리들이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교목실을 중심으로 각종 절기행사와 성경골든벨, 복음성가경연대회, 원데이 봉사활동 등이 전개되면서 학생들의 가슴에 기독교적 가치들을 심어주고 있다.

김연희 교목실장은 “올해에는 전체 재학생들의 생일을 1주 단위로 챙겨주는 생일데이, 서로를 칭찬하고 정을 나누는 감사데이, 화해의 날로 마련되는 사과데이 등 쓰리데이 사역을 의욕적으로 진행하는 중”이라면서 “이를 통해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신앙적인 성숙을 도모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한다.

영명고등학교는 앞으로 운동장 체육관 등 여러 시설들을 확충해 학생들 뿐 아니라 지역교회 및 시민들과 함께 나누는 공간으로 개방하여 활용할 계획이다. 시설보강이 이루어지면 그 동안 다른 장소에서 개최해오던 4·1만세운동 재현행사도 교정에 유치할 예정이다.

▲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이 녹차단지를 찾아가 진로체험을 하는 모습.

한편으로는 대학입시 중심의 소망반, 취업과 진로 중심의 챌린지반, 특기 개발 중심의 예체능반 등 다양한 학급운영으로 학생들을 위한 맞춤심 교육체제를 도입하고, 다양한 체험학습과 진로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안목을 넓혀주는데 힘쓰며 시대의 발맞추고 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 및 지역교회들과 협력해 교내 유적과 선교사 묘역, 옛 선교사 사택, 만세운동 행로 등을 활용한 선교유적탐방로를 조성하는 일에도 앞장서는 중이다.

이기서 교장은 “공교육의 위기, 미션스쿨의 위기 속에서도 교육선교의 사명을 흔들리지 않고 감당하고자 노력하는 중”이라면서 “지역사회와 조국을 살피고 지켜왔던 영명의 전통을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 영명학교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동문들의 흉상. 오른쪽부터 유관순 열사, 조병옥 박사, 황인식 교장.

삼일운동과 관련해서는 유관순을 빼놓을 수 없다. 천안 매봉교회를 방문하다 사애리시 선교사의 눈에 띄어, 그녀의 도움으로 영명학교에서 공부했던 유관순은 이화학교로 전학한 후 기미년을 맞았다. 영명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앙에 기반을 둔 투철한 민족애를 키워왔던 유관순은 삼일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된다.

동시다발적으로 공주에서도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4월 1일 읍내장이 서는 날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1000여 명이 군중이 동참해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 19명 중에는 김관회 교사, 안창호 목사 등과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도 있었다.

유관순의 부모님은 이미 아우내장터에서 일본경찰에게 살해되고, 유관순은 물론 두 오빠까지 옥에 갇힌 상태에서 남아있던 어린 두 동생 인석과 관석을 돌보아주었던 이들 또한 영명학교 교사들이었다. 특히 두 남매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입혔던 교사 조화벽은 이후 유우석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한편 영명의 항일정신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및 이에 발맞춘 동맹휴업 사건으로 황인석 교장과 조병옥을 비롯한 여러 교사 재학생 졸업생들이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영명학교 설립자 겸 초대교장으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고 스스로도 일제에 의해 추방까지 당해가며 한국의 광복을 위해 많은 애를 썼던 우리암 교장, 1939년 창가사건으로 복역한 안진영 교사,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오익표 정환범 동문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영명학교 출신 인사들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영명중고등학교에서는 해마다 삼일절이 돌아오면 교사들과 학생들과 기념행사에 참석해 만세운동을 재현하며, 선배들의 애국심을 본받을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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