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종 목사(광주동신교회)

성숙한 신앙인격을 갖춰야 합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어도 하나님 영광과 복음 위한 사역 계속돼야

▲ 최우종 목사(광주동신교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행 15:39)

요즈음 저에게 가끔 전화를 하여 고민을 호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여성에게는 ‘갱년기’가 있는데 남성에게는 ‘갱놈기’가 있다고 웃기면서 고독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친구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공부를 잘해 둘 다 명문대학에 다닙니다. 그리고 부인은 보기 드문 미인입니다. 그리고 이 친구의 직장도 아주 건실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남부러울 것 없습니다.

사실 목사인 저는 같이 놀아주고 부대껴줄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친구들이 그립다고 저에게 안타까움을 호소하곤 합니다. 친구를 위해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 친구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됩니다. 예전의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되새기며 더불어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누리고 동역하는 사역이라면 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할까요? 물론 죽음 이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큽니다. 그렇지만 그 심리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죽음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녀들, 배우자, 이웃들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수많은 단절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함께 사역하다가 갑자기 동역이 깨지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던 중, 제1차 전도여행 당시에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나바가 바울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한 것이 다툼의 화근이 되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인데, 제1차 선교여행 때에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동행했다가 그만 도중에 포기하고 예루살렘 집으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선교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는 달리 마가 요한과 동행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견으로 인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갈등이 증폭되어 결국에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갈라서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인 일로나 또한 교회 안에서 사역을 하는 도중에 비슷한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바나바와 바울의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일어나는 다툼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영적 교훈을 배우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주장하기에 앞서, 기도하면서 논리적인 대화를 통해 서로의 주장에 대한 장단점과 사역의 손익을 계산하여 좋은 합일점을 도출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어야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단지 사역의 목표와 사역의 방법 간의 관점에 대한 충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했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의 형편을 살피고 돌봄으로써 교회를 튼튼히 하려하는 일 즉 사역의 목표를 중시했고, 바나바는 사역의 목표보다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 중심을 지향했을 뿐입니다.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심히 다투다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와 의견이 대립될 때에 내 생각과 다른가 같은가를 생각하기보다, 그 문제가 신앙의 본질적 문제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것을 자꾸 절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그 교회는 건강한 조직, 힘과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차선으로 은혜롭게 헤어지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갈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결별한 이후에도 서로를 향해 변함없는 신뢰와 존경을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6절에 보면, 바울이 바나바의 자비량선교를 칭찬, 변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훗날 바울은 자기와 바나바와의 결별에 원인을 제공하였던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습니다(딤후 4:11, 골 4:10).

“세상 사람들은 술 한 잔 하면서 화해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한번 싸우면 결코 화해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말씀은 분쟁과 갈등으로 인해 성도들이 떠나가고 복음의 길이 막혀가는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헤어짐에 마귀가 개입하게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개입하시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경우를 생각하십시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람과 롯의 소유가 많아 좁은 땅에서 함께 양들의 목초지와 안식처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목자들의 다툼은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이 다투는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은혜롭게 실행했습니다. 우리들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대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갈등할 때에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지만 하나님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등의 해결에 있어서는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냈지만, 갈등으로 인해 사역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각 구브로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굳게 하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행 15:41)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을지라도 그 갈등 때문에 맡은 바 직무나 직책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귀한 열매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마가 요한의 관계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빌레몬서 1장 24절에 보면 바울이 마가 요한을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골로새교회로 보낸 바울의 편지인 골로새서 4장 10절 이하에 보면,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찾아오거든 거절하지 말고 따뜻하게 영접하라’고 하면서 그가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마가를 골로새교회에 추천해서 목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자기가 있는 로마에, 자기의 일에 유익한 마가를 보내달라고 초청합니다. 마가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좀 문제가 있었지만 실수들을 통하여 신앙이 성숙해지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십자가 보혈의 복음과 접촉하여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사건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본문의 교훈은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또 교회적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이방 선교라는 중대한 과업을 위기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두 사람의 결별로 인해 이방인 전도 사역이 지연 내지 중단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 전도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결과적으로는 선교가 더욱 강력히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이자 로마 시민권을 갖고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라(행 16:37)를 동역자로 하여 선교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역자로 삼고 그를 훌륭한 선교자로 성숙시켰습니다. 이것이 왜 가능했을까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신앙과 인격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점과 연약함으로 인해 자칫 하나님의 교회가 큰 분란으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인격을 통하여 오히려 더 큰 성장을 가져오도록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선시한다면, 바른 신앙인격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약점조차 주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심히 다투어 갈라섰지만 끝내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해 매진했던 두 사람의 신앙 인격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크게 쓰임 받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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