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조PD의 필름포럼>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기독교인이 볼만한 추천 영화를 소개합니다. 복음의 가치관이 흐르고 한번쯤 깊게 생각해볼 거리를 던지는 특별한 영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편집자 주>
 

제작사 로고가 뜨고 영화가 시작되면 블랙 무지 화면에 몇 분 동안 암전만이 흐른다. 런던 변두리 지역 특유의 악센트를 가진 50대 중년의 남자가 사무적인 말투의 여자의 물음에 짜증이 섞인 답을 하고 있다. ‘영사 사고인가?’ 집중해서 상영관과 화면, 음향을 주시하던 내가 어느 관공서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음성에 익숙해질 무렵, 중년의 대머리 영국 남자가 스크린에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필름포럼의 관객맞이와 영사를 담당하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다니엘은 목수고 케이티는 싱글 맘이다. 둘은 뉴캐슬의 고용노동청에서 만난다. 다니엘은 정부가 제공하는 구직 수당을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런던에서 이 동네로 이사와 주거비 지원을 신청하려는 케이티는 오는 도중 길을 잃는 바람에 약속된 시간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담당 공무원에게 한 달간 자격 정지 제재를 받자 말다툼을 벌인다. 관공서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케이티는 절실하다.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두 아이들을 위한 먹거리를 못 산다. 지켜보던 다니엘은 참지 못하고 나선다. 결과는 둘 다 자격 정지다.

다니엘이라고 케이티보다 사정이 나아서 도우려는 게 아니다. 그는 평생을 목수로 살아오다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돼 정부로 부터 도움을 받으려 한다. 처음엔 의료비 지원을 요청했다. 하루 온종일 몇 시간씩 ARS 자동 응답을 기다리다가 돌아온 대답은 점수 미달로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일을 못해 생활비가 없는 다니엘은 구직자 활동을 해야 고용 수당을 받을 수 있다. 그것도 컴퓨터로 온라인 신청만 가능하단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50대 목수는 그 시간에 이제 인터넷을 배워야한다. 둘 다 생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정부가 내려준 동아줄을 붙잡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아줄 관리인들은 원리 원칙대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제도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대상을 나와 다른 타자(他者)로 만든다. 그렇다고 그들이 잘못된 건 아니다. 수많은 민원인을 상대해야 하는 공무원들은 그들을 객관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거기엔 상대방을 바라보는 긍휼이 없다.

여기 저기 손볼 데가 많은 케이티의 집을 다니엘은 자기 집 인양 수리해 준다. 케이티는 고마움을 표시하기가 변변치 않아 자기 몫의 저녁을 그에게 대접하느라 한참을 굶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 목욕을 좋아하는 딸아이를 아침에 기분 좋게 샤워시키려 욕조를 청소하던 케이티는 깨진 타일 조각을 치우다가 조용히 흐느낀다. 이 가련함에 나도 흐느낀다. 인터넷을 배우고 구직활동 증명을 하느라 그가 평생 지켜온 사람에 대한 신뢰를 깨면서까지(물론 오해지만) 신청한 구직수당을 포기하면서 다니엘은 담당 공무원에게 말한다. “사람은 자존감을 잃으면 끝난 거예요.”

가진 것 없고 직설적이고 시니컬한 영국식 유머를 구사하는 대머리 아저씨 다니엘이 우리에게, 케이티에게 보여준 건 긍휼이고 측은지심이며 자긍심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치열함이다. 그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작은 마음으로 굽어다본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이다. 어쩌면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는 ‘섬김의 리더십’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공무원은 영어로 public servant이다.

조현기 프로그래머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필름포럼의 프로그래머로, 관객들과 영화로 소통하며 영사와 관객맞이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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